[사회] 미니마 모랄리아 : 물 만난 고기떼

by 이우 posted Feb 27, 2018 Views 17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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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도로 집중된 산업이 포괄적인 분배 장치를 갖추게 되면서 유통 부문은 해체되었지만 이 부문은 기이한 사후 생존(Post-Existense)을 시작하게 된다. 거간꾼 직업은 그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중개인의 삶이 되며, 심지어 사적 영역 전체가 수수께끼 같은 장사성―이것은 도대체 거래할 것 없을 때조차 온통 장사꾼 기질을 드러내는데―에 먹혀버린다. 안정감이 없는 이 모든 사람들―실업자들뿐 아니라, 자신에게 투자한 사람들의 분노를 언제든 끓어오르게 할 수 있는 명사들까지―은 자신의 장사꾼 자질을 동원해 온갖 간계와 술책으로 살살 빌고 꾀어 온 사방에 널려 있는 사장님들께 자신을 천거할 수 있으리라 믿는데 거기에는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은 순수한 관계란 없을 뿐 아니라, 통할지 안 통할지 사전 검열하지 않은 감정의 움직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매개와 유통의 범주인 '관계'라는 개념이 본래의 유통 부문, 즉 시장에서보다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위계 구조 속에서 번창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전체 사회가 위계적이 되면서 음울한 '관계'라는 것이 온 사방에―오직 자유가 있는 듯이 보이는 곳에조차―ㅡ흡혈귀처럼 달라 붙어 있다. '체계의 비합리성'은 개개인의 경제적 운명에서뿐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기생적 심리에서도 표출된다. 예전에, 직업과 사생활이라는 악명 높은 구별이 존재하던 시절에는―사람들은 그런 구별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 하지만―사적 영역에서 어떤 잇속을 챙기려는 무례한 침입자라는 의심의 눈총을 받았다, 오늘날 어떤 목표에도 눈을 돌리지 않으면서 시적인 삶에 칩거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낯설고 거만한 자로 여겨진다.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의심을 받는다. 사람들은 무자비한 경쟁 사회에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응수하지 않으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리란 것을 믿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 해체되는 데 따른 상황으로부터 자신의 직업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모든 사람과 좋은 친구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랑 받는 사람이며, 어떤 비열한 행위도 인간적으로 눈감아주며 표준화되지 않은 정서는 감상적이라고 단호히 배척하는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권력의 모든 수로와 배출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들이며, 권력의 가장 비밀스러운 판결문을 잘 헤아리고는 이것을 기민하게 소통시킴으로써 밥벌이를 한다. 모든 정치 진영, 심지어 기존 체제에 대한 거부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진영에서조차 발견되는 이런 족속은 독특한 형태의 느긋하고 교활한 순응주의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사심이 없는 너그러움과 타인의 생활에 대한 애정어린 이해심을 보이면서 사람들을 매수한다. 그들은 재치 있고 영리하며 순발력이 뛰어나다. 그들은 해묵은 장사꾼 기질을 최신의 심리학으로 때깔나게 포장한다. 그들은 팔방미인이며, 사랑에도 능하지만 오래가진 않는다. 그들은 충동적으로 남을 속인다기보다는, 기만 자체가 그들의 원칙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잉여가치'라 평가하지만 이 잉여가치를 다른 누구에게 선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신'에 친화력과 증오를 배합한다. 그들은 사려 깊은 사람에게는, 유혹이기는 하지만 가장 사악한 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항'의 마지막 도피처, 전체 메커니즘의 요구로부터 아직 자유롭게 남아 있는 '시간'을 교활하게 장악해서는 욕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뒤늦은 개인주의는 '개인'에게 아직 남겨져 있는 좁은 틈새에마저 독을 섞어 넣는다.(...)

  - 『미니마 모랄리아 -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테오도르 아도르노 · 길 · 2005년 · 원제 Minima Moralia. Reflexionen aus dem bescha"digten Leben, 1951년) p.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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