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기억(memorie)과 추억(souvenir), 그리고 작품

by 이우 posted Jan 14, 2018 Views 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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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집에만 있지 않고 자주 산책을 나갔다. 가끔식 옷을 입기 전에 스완 부인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크레프드신 실내복의 분홍, 하양 또는 아주 화려한 빛깔 소맷부리 밖으로 나온 그녀의 아름다운 손은, 그녀 눈 속에는 있으나 마음 속에는 없는 그런 우수의 빛으로 피아노 위에 놓인 손가락을 더 길어 보이게 했다. 스완이 그토록 좋아하던 소악절이 포함된 뱅퇴유 소나타 일부를 그녀가 내게 연주해 준 것도 바로 이런 날 가운데 하루였다. 그러나 약간 복잡한 음악을 처음 들을 때면 아무 소리도 들리리 않는 법이다. 하지만 나중에 이 소나타 연주를 두세 번 들었을 때, 나는 그 곡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처음 듣는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 첫 번째 듣기에서 아무 것도 구별하지 못한다면, 두 번째, 세 번째도 처음과 같을 것이므로, 열 번 들었다 해서 더 잘 이해하리란 법은 없다. 아마도 척 번째 듣기에서 결핍된 것은 이해가 아니라 기억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이란 상대적으로 우리가 듣는 동안 마주치는 일상들의 복잡성에 비하면 아주 미미해서, 잠을 다며 수많은 걸 생각하고는 즉시 잊어버리는 인간의 기억 만큼이나, 또는 이제 막 들은 것을 조금 후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반쯤은 어린애로 돌아간 사람의 기억 만큼이나 짧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인상에 대한  추억을, 기억은 즉시 제공해 주지 못한다.* 하지만 추억은 점차적으로 우리 기억 속에서 두 세 번 들었던 작품에 의해 형성된다. 마치 중학생이 자러 가기전에는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학과를 여러 번 읽어서 다음 날 아침에 암송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나는 그날까지 소나타의 어떤 부분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스완과 스완 부인이 뚜렷이 알아본 악절은 내 명료한 지각과 거리가 멀었다. 마치 기억해 내려고 애쓰지만 대신 빈 허공을 발견하게 되는 이름처럼. 그러나 이 허공으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 그렇게도 헛되이 찾던 이름의 음절은 단번에 스스로 떠오른다. 그리고 진정으로 드문 작품이란 우리가 즉시 기억하지 못하며, 뿐만 아니라 그런 작품 가운데서도 내가 뱅퇴유 소나타를 들었을 때처럼,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는 부분을 먼저 인지한다. 스완 부인이 가장 유명한 악절을 연주했으므로. 뿐만 아니라 내가 소나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을 때에도, 이를테면 거리감이나 안개 탓에 어렴풋한 부분밖에 들어오지 않는 역사기념물처럼 내게는 소나타 전체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시간 속에서 구현되는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작품의 인식과 관계된 우수가 연유한다.

  소나타 안에 가장 깊숙이 감추어졌던 부분이 내개 드러나면서 내가 처음 알아보고 좋아했던 것이 습관에 의해 내 감성 영역 밖으로 끌려나가면서 나로부터 빠져나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나타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지만, 난 한 번도 소나타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 소나타에는 우리 삶과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삶보다 덜 환멸스러운 이 위대한 걸작은 처음부터 작품이 가진 최상의 것을 주지 않는다. 뱅퇴유 소나타에서 가장 먼저 발견하는 아름다움도 가장 빨리 싫증나는 아름다움으로, 아마도 그런 아름다움이 우리가 이미 아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동일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움이 멀어지면 그 구조가 너무도 새로워 우리 정신에 혼란을 야기하며, 그래서 우리가 식별하지 못하고 손도 대보지 못한 채 그대로 간직해 왔던 악절을 좋아하는 일만 남는다.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채 매일 그 앞으로 스쳐 가던 악절, 그 유일한 아름다움의 힘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던 악절이 이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악절을 떠나는 것도 우리가 맨 마지막일 것이다. (중략)

  다른 작품들보다 더 심오한 작품을 파악하는데 필요한 시간이란 이 '소나타'에 대해 내게 필요했던 시간처럼 일반 대중이 진정으로 새로운 걸작을 좋아할 수 있을 때까지 흘러가는 수십 년 혹은 수 세기의 축소판이자 일종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중의 몰이해를 피하려는 천재는, 어쩌면 동시대인들에게는 작품 이해에 필요한 거리가 부족하므로 후대를 위해 쓰인 작품은 후대에 의해서만 읽혀야 한다고 말할 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서 잘못된 평가를 피하려는 모든 비겁한 노력은 헛된 짓이며 이런 평가는 피할 수 없다.

  천재의 작품이 즉각적인 찬미를 자아내기 어려운 이유는 작품을 쓴 자가 예외적 인물로서 그와 비슷한 인물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천재를 이해할 수 있는 드문 지성을 생산하고 또 배양하고 증식하는 것은 바로 작품 자체다. 베토벤의 사중주곡(12번, 13번, 4번, 15번 사중주곡) 자체가 오십 년이나 걸려 그 작품을 이해하는 청중을 낳고 길렀으며, 그리하여 모든 걸작이 다 그렇듯이, 예술가의 가치가 아니라면 적어도 지식인 사회에서(걸작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폭넓게 구성된, 즉 그 작품을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발전해 나간다. 작품 자체가 이런 후대를 창조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작품이 보존되었다가 후대에 가서야 알려지는 경우, 그 후대는 작품의 후대가 아니라, 단지 오십 년 뒤에 사는 동시대인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바로 뱅퇴유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작품이 제 갈길을 가기 위한다면, 작품을 아주 깊은 곳으로, 아주 먼 미래의 한복판을 향해 내던져야 한다. (중략)

  아마도 지평선 위의 모든 물체를 균등하게 만드는 착시 형상과도 유사한 현상에 따라 그림이나 음악에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혁명은 그래도 어떤 일정한 규칙을 존중하며, 그러나 현재 우리 앞에 있는 인상파나 불협화음의 추구, 중국 음계의 사용, 입체파, 미래파는 전 시대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전 시대의 것을 우리 정신이 오랜 시간의 동화작용을 통해 동질적인 실체로 전환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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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어로 '기억(memorie)'은 흔히 사물을 환기시키는 능력을 가리키며, '추억(souvenir)'은 이런 능력의 실행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가리킨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하며, souvenir가 사물을 회상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경우 기억은 보다 중요하거나 광의의 모호한 대상과 관계되며, 추억은 비교적 협의의 구체적인 대상과 관계된다고 설명된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 민음사 · 2016년  · 원제 :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A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제3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1> p.184~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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