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안전, 영토, 인구 : 사목권력의 특징, 복종 · 예속 · 배려 · 봉사

by 이우 posted Nov 22, 2017 Views 2332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책_안전영토인구.JPG


  (...) 고대세계가 끝나갈 무렵 근대 세계가 탄생할 무렵까지 그리스도교 사회보다 더 사목적인 문명이나 사회는 결코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이런 사목, 이런 사목권력은 인간을 법이나 주권자에게 예속시키기 위해 사용된 절차와 동일시되거나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목은 아동·청소년·청년을 교육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과도 동일시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목은 인간을 납득시키고, 설득하고, 그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유인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과 동일시되어서도 안됩니다. 사목은 인간을 통치하는 기술이고 바로 이 측면에서 통치성의 형성되는 지점, 통치성이 결정화되는 지점, 통치성이 발아되는 지점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통치성이 16세기말과 17~18세기에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 근대국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실제로 통치성이 계산되고 숙고된 정치적 실천이 되었을 때에야 근대 국가가 탄생하는 듯한데, 그리스도교의 사목은 이 절차의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히브리의 목자라는 주제와 그리스도교의 사목은 당연히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고,다른 한편으로 그에 못지 않게 개인과 집단에 대한 통치나 사목적 지도 역시 통치술의 발전, 16~17세기부터 정치적 개입의 장이 특수화되는 것과 매우 현저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략)

  아주 대략적으로 도식적이고 풍자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시민들, 말하자면 노예나 이런저런 이유로 시민권이나 법의 결과로 관련해 소수자로 여겨지는 자들이 아니라 시민들은 오직 두 가지 것에 의해서만 지휘를 받았다고, 즉 지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말입니다. 법과 설득, 즉 도시국가의 명령을 통하거나 사람들의 수사(修辭)를 통해서 말이죠. 너무 간략히 말씀 드리고 말았는데, 복종이라는 일반 범주는 그리스인들에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구분되는 두 개의 권역이 있는데, 어느 쪽이든 꼭 복종이라는 차원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첫번째로 법의 존중이라는 권역이 있습니다. 민회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과 행정관의 선고를 존중하는 것, 즉 만인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내려진 것이든, 개인에게 만인의 이름으로 내려진 것이든 명령을 존중하는 권역입니다. (…)

  먼저 이 권역이 있고, 그 다음에 간계의 권력이 있습니다. 간계라고 말하면 지나친 감이 있으니, 궁리해 계획된 행동과 효과의 권역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좋겠네요. 인간들이 다른 인간에 의해 끌려 다니고 설득당하며 유혹당할 때 사용되는 여러 가지 절차의 총체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절차를 통해 웅변가는 청중을 설득하고, 의사는 이러저런 처방에 따르도록 환자를 설득하며, 철학자는 상담하려 오는 자에게 진실이나 자기제어에 도달하려면 이런저런 것을 하라고 설득합니다. 학생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선생은 이런 방법을 통해 학생을 설득시키고, 이런저런 결과에 도달하는 것과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수단의 중요성을 납득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듯 두 개의 권역이 있습니다. 법을 존중하는 것과 누군가가 자신을 설득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 즉 법과 웅변술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목은 그리스 실천과는 완전히 다르고 이상한 무엇인가를 조직한 듯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목은 순수한 복종의 심급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을 조직했죠. 일원화되고, 그 자체 안에 존재의 본질을 갖는 매우 가치화된 품행으로서의 복종 말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바는 이렇습니다. 누구나 알듯이, 무엇보다 이 역시 히브리적 주제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은 아닌데, 그리스도교는 신의 의지, 개별자 각각을 위한 신의 의지의 종교입니다.  (중략) 근본적으로 일차적으로 목자는 판사가 아닙니다. 목자는 본질적으로 의사로서 각각의 영혼과 그들의 질병을 책임져야 합니다. (중략) 저는 양을 이끄는 자와 양떼의 관계가 전면적 의존관계라는 것이야말로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의 사목에 고유한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

  전면적 의존관계란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로 그것은 복종이지만 이때의 복종은 법·질서원칙·이치에 합당하는 엄명에 대한 복종도 아니고, 이성에 의해 도출된 어떤 원칙이나 결론에의 복종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하는 복종의 관계입니다. 엄격한 개인적 관계, 지휘하는 개인을 지휘를 받는 개인과 서로 관계 짓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복종의 조간일 뿐만 아니라 원칙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지휘 받는 자는 이 복종관계 안에서 수용하고 복종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개인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영적인 일에서처럼 물질적인 일과 일상적인 일에서도 목자의 수중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중략) 그리스도교의 복종은 누군가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맡기는 원칙입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그 분이라는 점, 바로 이것이 그에게 자신을 의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자가 다른 자에게 의존하는 것은 응당 수도원 생활에서도 제도화됩니다. 수도원장이나 상급자 혹은 수사의 스승 등과의 관계에서 말이죠. 4세기부터 시작된 공동체 수도원 생활을 조직하고 정비하는 데 핵심이 됐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 즉 수도원 공동체에 들어가는 개인은 모두 상급자나 수사의 스승 등 누군가에게 맡겨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급자가 수사의 스승은  수도원 공동체에 들어오는 자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매 순간 무엇을 해야 좋은지 말해 줍니다. (중략)

  전면적 의존관계란 최종 목적이 없는 관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인들이 의사, 체육교사, 웅변술 교사, 철학자에게 자신을 맡긴 것은 어떤 결과 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결과는 직업에 관련된 지식일 수도, 어떤 완성일 수도, 치유일 수도 있습니다. (...)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복종은 끝이 없습니다. 이 복종이 귀결되는 곳은 대체 어디일까요? 그저 복종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복종적이 되고 복종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복종합니다. 복종의 상태라는 이 개념은 완전히 새롭고 특수한 것으로서, 이전에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에서 복종의 실천이 취하는 결말은 겸손입니다. 여기서 겸손이란 자기 자신이 최후의 인간임을 느끼고,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그로써 복종관계 역시 끊임없이 연장시키며, 각자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데 있습니다. (중략) 성 베네딕트는 훌륭한 수도사를 정의하기 위해 <규칙> 5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자유의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타인의 판단과 지배에 따라 걸으며, 누군가 자기 자신에게 명령하기를 기다린다."

  그리스에서 어느 제자가 철학 교사를 만나 교사의 지도와 행동지침에 복종해 자신을 맡기는 것은 아파테이아(apatheia), 즉 정념(pathe)의 부재라 불리는 무엇인가에 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념의 부재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정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수동성을 더 이상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자기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모든 힘·격정을 자신에게서 제거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이런 운동은 사람들을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바에 예속된 상태,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바에 예속된 상태,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잇는 바에 예속된 상태에 놓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의 아파테이아는 저기제어를 보장했습니다. (중략) 스토아학파의 철학과 후기 에피쿠로스주의에서는 육신의 괘락, 신체의 쾌락마저도 아파테이아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중략)

  그리스, 그리스-로마의 도덕가들이 그리스도교에 전해준 아파테이아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신체의 쾌락, 성적 쾌락, 육신의 욕망을 버리는 것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완전히 다른 효과를 갖게 되죠. 정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에서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질적으로이기주의를 버리는 것, 자신의 독단적 의지를 버리는 것을 의마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육신의 쾌락이 비난 받는 이유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주의자가 주제로 다뤘던 것과 같이 그 쾌락이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안에서 개별적이고 개인적이고 이기주의적 활동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자신이라고 하는 것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갖고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것, 자신을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고 긍정하는 것 등이 그런 활동입니다. 요컨대 복종의실천을 통해 제거되어야 하는 파토스는 정념이 아니라 의지, 곧 자기로 향하는 의지이고 정념의 부재, 아파테이나는 자기 자신을 포기해 버린 의지, 부단히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의지가 됩니다. (중략)

   목자, 경우에 따라서는 수도원장이나 주교 등 그리스도교적 복종의 이론과 실천에서 명령하는 자는 자신 스스로가 명령하고 싶어서 명령하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안되고, 다른 이로부터 명령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명령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시련은 목자가 자기에게 부여된 사목의 임무를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자신이 명령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목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거부가 특정한 의지의 긍정인 한에서 그 사람은 자신의 거부를 포기하고, 복종하며 명령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종의 복종이라는 일반화된 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복종이야말로 사목적 관계가 전개되는 공간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략) 사목은 법의 일반 원칙과 관련해 개인의 개인에 대한 복종의 실천을 출현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그리스도교의 사목은 법과의 간접적인 관계를 통해 개별적이고 망라적이며 총체적이고 항구적인 유형의 복종관계를 창출했습니다. (...)

-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미셀 푸코 · 난장 · 2011년 · 원제 : Securite, territoire, population) p.231~262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