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안전, 영토, 인구 : 인간에 대한 통치, 사목권력의 출현

by 이우 posted Nov 22, 2017 Views 37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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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자의 은유는 희귀합니다. 하지만 명맥한 예외, 플라톤이라는 중대하고 주된 예외가 있습니다. 훌륭한 행정관, 이상적인 행정관이 목자로 간주되고 있는 텍스트가 플라톤에게는 많이 있습니다. 훌륭한 목자라는 것은 훌륭할 뿐만 아니라 단적으로 참된 목자, 이상적인 목자라는 것입니다. <크리티아스>도, <국가>에서도, <법률>에서도, <정치가>에서도 그렇습니다. (중략) <국가>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죠. 특히 제1권에 나오는 트라시마코스와의 대화가 그렇습니다. 여기서 트라시마코스는 자신에게도 자명한 것이라는 듯, 혹은 상투어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잘 알려진 주제라는 듯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소. 당연히 훌륭한 행정관은 진정한 목자라고 할 수 있소. 그런데 목자가 하는 일을 살펴봅시다. 그러고는 소크라테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은 목자가 본질적으로, 심지어는 절대적으로 자신의 무리에게 좋은 것을 고려하는 자라고 생각하시오? 목자가 솔선수범해 고생하는 것은 그것이 오직 자신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오. 그가 자신의 가축들을 위해 고생하는 것은 오직, 가축을 잡아 목을 따서 팔 수 있기 때문이란 말이오. 목자가 그렇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이기적인 목적 때문이고 가축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겉치례일 뿐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트라시마코스는 목자와의 비교란 행정관에게 필요한 덕을 특징짓는 데 결코 적절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런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당신이 정의한 것은 훌륭한 목자가 아니라고, 그것은 진정한 목자가 아니라 목자에 대한 풍자라고, 이기적인 목자란 모순적인 것이라고, 진정한 목자는 오직 자신의 무리에 헌신할 뿐이지 자신의 안위에는 생각하지 않는 자라고 말입니다. (중략)

  <정치가>의 논의 전개를 간략히 다시 다룰텐데 여러분은 목자의 은유에 어떤 식으로 이의가 제기되는지 대략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치가란 무엇일까요? 플라톤에게 정치가란 무엇일까요? 물론 정치가란 정치가로서의 행위를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특정한 인식과 기술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습니다. 정치가를 특정짓는 인식과 기술은 명령하고 지휘하는 기술입니다. 그런데 명령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물론 왕이 명령합니다. 하지만 신의 명령을 전달하는 예언자, 사자, 민희의 심의결과를 전달하는 전령, 배에서 노를 젓는 자의 통솔자 역시 지휘하고 명령합니다. (중략) 이 명령은 무엇에게로 향할까요? 명령은 무생물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축가가 하는 일, 즉 자신의 의지와 결정을 목재나 석재 같은 무생물에게 부과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생물, 본질적으로 생명존재에게 명령을 부과할 수 있습니다. 건축가와는 달리 정치가는 바로 이쪽에 속합니다. 정치가는 생명존재에게 명령할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동물이건 인간이건 생명존재의 무리에게 명령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그 무리의 목자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정치가는 인간의 목자, 즉 도시국가에서 인구를 구성하는 생명존재 무리의 목동이라고 말입니다. (중략) 따라서 행정관이 무리를 지키는 자라는 주제와 관련해 우리는 상이한 유형의 동물들, 야생동물과 온순한 동물을 구분해야 합니다. 인간은 두번째 부류에 속합니다. 가축적이고 온화한 동물에는 수중 동물과 육상 동물이 있습니다. 인간은 육상 동물 옆에 놓여야 합니다. 육상동물은 날짐승과 그렇지 않은 짐승, 이종교배가 가능한 짐승과 그렇지 않은 짐승으로 분할되어야 합니다. (중략) 지시술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고나해서는 말입니다. 불변항으로서의 목자라는 주제는 무용하고, 동물의 범주에 속해 있는 가능한 가변항들만을 참조토록 만들 뿐입니다.(중략)

  목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뤄질까요?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군중에 복수의 목자가 있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단 한 명입니다. 두 번째로 활동의 형태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목자가 많은 일을 해야만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목자는 무리의 식량을 확보하고, 가장 젊은 양을 돌보며, 병에 걸리거나 상처 입은 양을 치료하고, 명령을 내리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음악을 연주하며 길을 이끌고, 가장 건강하고 다산하는 암양이 튼튼한 새끼양을 낳을 수 있도록 교배시켜야 합니다. (중략) 목자의 단독성 · 단일성의 원칙에 대한 반론이 바로 이 대목에서 곧장 제기됩니다. 플라톤이 왕의 경쟁자, 양치기와 관련한 왕의 경쟁자라고 부른 존재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왕이 양치기라고 정의된다면, 인간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농민이나 빵을 만들어 식량을 공급하는 빵집 주인 역시 양의 무리를 초원으로 인도해 풀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는 목자 만큼이나 인간의 목자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농민이나 빵짐 주인은 왕의 경쟁자, 인간의 목자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병자를 돌보는 의사도 목자이고, 양치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동의 적절한 교육, 건강, 신체의 활력과 능력을 돌보는 체육교사나 교육자도 인간의 무리와 관련해서는 목자입니다. 누구나가 자신을 목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고, 정치가의 경쟁자는 그만큼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애초부터 용인된 불변항이 있었던 것입니다. 행정관이 곧 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의 권력이 근거하는 일련의 존재를 다변화시키면 동물 유형론이 만들어지고 구분이 멈추지 않게 됩니다. (중략) 이 모든 종의 동물 중 특수한 무리가 있는데 그것이 인간의 무리입니다. 이 무리의 선두에 목자가 있습니다. 이 목자는 모든 종의 동물을 지배하는 목자의 화신입니다. 이 목자는 누구일까요? '신 자신'이라고 플라톤은 말합니다. (중략) 왕은 목자가 아닙니다. (중략)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행사되는 특수한 유형의 전원지인 사목의 진정한 역사, 인간들에 대한 통치방식의 본보기이자 모형의 사목의 진정한 역사, 서구세계가 거쳐온 사목의 진정한 역사는 그리스도교와 함께 시작된다고 말입니다. (중략) 교회는 인류 차원에서 구원을 디룬다는 구실로 현실의 삶에서 인간들을 일상적으로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종교입니다. 사회의 역사상 전례 없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점만, 그 윤곽만 말씀드리면, 이처럼 어떤 한 종교가 교회로 제도화됨으로써 다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권력장치가 형성된 것입니다. 기원후 2~3세기경부터 18세게에 이르기까지 1천5백년 동안 발견되고 무르익은 권력장치가 말입니다. (중략)

  13세기부터 17~18세기까지 전체를 관통한 모든 투쟁, 대부분의 투쟁은 사목권력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목권력에 대한 투쟁이었습니다. 존 위클리프부터 존 웨슬리까지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종교전쟁 기간 동안 절정에 달했던 이 모든 투쟁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통치할 권리,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상 생활 · 세부사항 · 물질성 안에서 인간을 통치할 권리가 사실상 누구에게 있는지 알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누가 이 권력을 가질지, 이 권력을 누구로부터 얻을지, 이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지, 각자가 얼마만큼 자율의 의지를 가질지, 이 권력을 행사할 자들은 어떤 자격을 지녀야 할지, 그들의 권한은 어떻게 제한될지. (중략) 종교개혁이 교리와 관련된 대전투라기보다는 사목과 관련된 대전투였고, 종교개혁의 쟁점이 사실상 사목권력의 행동방식이엇다고 할지라도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두 세계나 일련의 세계, 요컨대 개신교 혹은 개신교 교회의 세계와 반종교개혁이라는 세계는 사목 없는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사목을 통해 인간을 통치하는 이 기술을 '기술 중의 기술', '지식 중의 지식'으로 정의한 최초의 인물은 나지안조스의 성 그레고리우스라는 점입니다. 그 뒤로 이 정의는 여러분이 아시는 '기술의 기술', '영혼의 통솔'이라는 전통적 형태로 18세기까지 전해지게 됩니다. 즉 '영혼의 통솔', '영혼의 통치'야 말로 기술의 기술입니다.* (중략)

  아지안조스의 성 그레고리우스 이전에는 무엇이 '기술의 기술', '기술 중의 기술', '지식 중의 지식'이었을까요? 철학이었습니다. 요컨대 17~18세게 이전에 그리스도교화된 서구에서 철학을 계승한 '기술의 기술'은 또 하나의 철학도 아니었고, 신학도 아니었고, 바로 사목이었던 것입니다. 사목이라는 이 기술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타인을 통치하는 법을 배웠고, 또 어떤 사람들은 누구에게 통치를 받아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

 -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미셀 푸코 · 난장 · 2011년 · 원제 : Securite, territoire, population) p.19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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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정식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쓴 <사목의 규칙>(Regula Pastoralis, 590년) 서두에 등장한다. "영혼의 통치야말로 기술 중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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