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죽어가는 자의 고독 : 죽음을 배제하는 현대사회의 특수성

by 이우 posted Jul 20, 2017 Views 17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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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사회의 특수성에는 첫째, 선진사회에 속한 개인들의 수명이 포함된다. 평균 기대 수명이 75세인 우리 사회에서 20대나 30대에 죽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기대 수명이 40세였던 사회라면 사정이 다를 것이다. (...)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선진 사회에서도 죽음의 객관적 위협은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잊혀질 수 있다. 이 사회의 많은 영역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다. (...)

  두번째 특수성은 자연적 과정의 마지막 단계인 죽음의 체험이다. 현대사회에서 죽음의 체험은 위생적 표준을 높여 놓은 의학과 각종 실질적 조치에서의 진보를 통해 중요성을 획득했다. (...) 자연적 과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이 어느 정도 통제될 수 있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위안을 얻는 것이다. 이전과는 달리 오늘날의 죽음은 의사의 의술, 식이요법, 약물치료에 의해 연기될 수 있다. 오늘날처럼 사회 전 영역에서 과학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이 끝없이 토론된 적도 없었다. (...) 오늘날 죽음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앎은 의학과 보험에 의해 죽음을 연기시키려는 시도와 이것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뒤덮여 있다. (...)

  세번째 특수성이란 현대 선진사회에서는 내적으로 폭력이 크게 진정되었다는 점이다. (...) 현대사회의구성원은 타인의 폭력으로부터 꽤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으며, 폭력에 의한 죽음을 예외적인 일, 범죄와 관련된 일로 본다. (...) 현대 선진 사회에서 폭력은 지배자가 허용하는 특정 집단만이 사용하는 단계에 도달한다. 많은 경우 경찰과 군대만이 처벌받지 않고 무기를 휴대할 수 있으며, 특정 경우에 한하여 그것을 사용할 권한을 가진다. 대충 이삼백년 동안의 발전 과정 속에서 유럽의 국가 조직과 그 후속적 조직 행태들은 무력을 효율적이고 독점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준과 유형을 획득했으며, 이로써 인간관계에서 어느 정도 열정을 제한하고 폭력을 배제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아주 억제된 사회에서조차 일상에서 죽을 것이라는 기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꽤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는 사고 및 살인 통계를 차치하더라도, 집단 간 갈등이 폭력적 해결로 치닫는 경우가 우리 시대에도 늘어나고 있다. 그 갈등 당사자들은 적을 죽이고 자신의 집단 구성원을 희생해야만 갈등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와 같은 생사를 건 전투는 평화시라고 할지라도 대개 계획 · 준비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타인을 죽이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고 엄중한 처벌을 받는 상황에서부터 국가나 당, 혹은 기타 집단에 의해 타인의 살상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요구되는 쪽으로 상황이 바뀌었을 때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가 변화한다는 점이다. 양차 세계대전의 경험과 그보다 강렬했던 강제수용소의 경험은 살상을 금지하고 죽어가는 자와 죽은 자를 가능한 한 정상적인 사회적 삶으로부터 격리시키려 했던 도덕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준다. (...) 양차 대전에서의 살상과 죽어가는 사람들, 죽음에 대한 민감성은 얼마 못 가서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빠르게 증발해 버렸다. (...) 이 문제에 대한 전형적인 대답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는 개인의 양심 구조가 국가의 외적 강제 기제 여전히 의존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현대사회가 가진 네번째 특징으로서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설명하는 데 언급이 필요한 사실은, 이 사회가 고도로, 그리고 특수한 유형으로 개인화된 사회라는 점이다. 개인의기억 속에 있는 죽음의 이미지는 그 사회에 만연한 자기 자신에 대항 이미지, 인간 존재에 대한 이미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을 기본적으로 '독립된 개별 존재', '창문 없는 단자', '고립된 주체'로 간주한다. 이 경우 다른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 전체 세계는 외부 세계에 위치한다. 사람들의 내부 세계는 이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고,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의해 타인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것과 같다. (...)

  모든 인간 존재는 외부의 동식물에 의존해서 살아가며, 외부의 공기를 마시고, 외부의 빛과 색깔을 본다. 그 또는 그녀는 외부의 부모로부터 태어났고 외부 사람들을 사랑하고 미워하며 친구로 삼거나 적으로 만든다. 사회적 실천의 수준에서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보다 초연한 성찰 속에서 이러한 경험은 종종 억압된다. 복잡한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종종 자신의 '내적 자아'가 이 외부 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경험한다. 사실 강력한 철학적 전통이 이 환상적 이분법을 정당화한다. (...)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의미 있거나 의미 없는 것으로,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체험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체험된 의미다. 두 아이의 부모이자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치자. 그 남편은 서른다섯 살이었고 중앙선에 침범해 들어오는 차에 치여 사망했다면 우리는 이것을 의미 없는 죽음이라고 말한다. 이는 죽는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인간 외적 의미를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의 삶과는 어떤 관계도 없는 사람, 즉 상대방 운전자의 삶이 마치 밖에서 우연히 뛰어들듯이 침입해 일거에 삶, 목표, 행복하고 안정적이었던 한 인간의 정서, 나아가 그 가족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어떤 것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 그 가족 구성원에게 가족이라는 사회적 무대, 인간조직은 매우 긍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으면서 기능하고 있었다. 어떤 것이 한 개인의 삶에 대해 그러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기능을 강화시킨다면 그것은 그 또는 그녀에게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한 개인 혹은 집단에 대해 그러한 기능을 하던 것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거나 실현 불가능해지거나 파괴된다면, 우리는 의미의 상실이라는 차원에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죽어가는 사람이 아직 살아있는데도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진정 외로운 것이다. (...)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더라도 그 자신이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을 때 그는 고독하다고 할 수 있다. (...) 이 예는 또한 죽어가는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산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이미 배제되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이 얼마나 참혹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죽음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기나긴 꿈 속으로 떠나가고 세상은 사라진다. 두려운 것은 죽어가는 고통이며, 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산 자의 상실감이다. 죽음을 둘러싼 집합적이거나 개인적인 환상은 종종 사람들을 섬뜩하게 한다. 그 공포의 독성을 완화하고 유일한 삶이라는 소박한 현실을 그에 맞세우는 것은 아직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

- 『죽어가는 자의 고독』(노베르트 엘리아스 · 문학동네 · 2012년 · 원제 : Uber die Einsamkeit der Sterbenden, 1982년) p.5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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