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

by 이우 posted Jul 06, 2017 Views 10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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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MF 이후 지구화 물결이 거세게 밀어닥치면서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말이 좋아 유연성이지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살이로 변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경쟁이 부각됐다. 이웃도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삶은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라던 이해가 무너지지 있는 것이다. 이제는 무조건 앞으로 달려야 한다. 기업은 비대해지는데 직장인은 피폐해진다. 젊은 맞벌이 부부들은 자식을 갖는것을 모험으로 생각할 지경이다. 삶 자체가 불확실해져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 홀로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공포와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지금 유토피아와 지옥, 이 들 중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로의 변화와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를 통해 이런 상황을 설명한다. 유동적 국면의 근대에는 우리의 삶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주던 여러 가지 제도들이 순식간에 끊임없이 변화한다. 또 권력은 이미 상당 부분 전지구적 공간으로 이전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정치는 지역 차원에 국한되어 있는 탓에 국민국가의 시민들이 안고 있는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개인들을 보호해 주던 국가 장치도 사라졌기 때문에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며 겪게 되는 각종 불운한 일들은 오롯이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유동하는 세계에서 모든 보호 장치들을 박탈당한 헐벗은 개인들, 어느 곳이든 지유롭게 윰직이는 자본의 세계에서 어느 곳으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개인들, 불안과 공포로 말미암아 영혼을 잠식당한 개인들에게 말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개인들은 더 이상 세상을 살기 좋겠다는 진지한 희망을 품을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든 혼자서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이 세상에서는 오로지 '도피'만이 유일한 생존 전략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불안은 도차에 만연해 있다. 주거지를 요새처럼 무장하고 장갑한 차량을 차고 다녀도 사라지지 않는 불안과 공포, 이런 세계에서는 유토피아의 의미마저 바뀌게 된다. 과거에 '유토피아'는 요원하지만 사람들이 갈망하고 꿈꾸던 목표였으며, 진보의 결실을 공동체에서 서로 공유하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유토피아는 '개인의 생존'을 이야기하는 담론이 되어버린 것이다. 경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해야 하고,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사냥꾼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곤혹스러운 세상에서 유토피아나 진보는 지옥과 동일한 의미를 가질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지옥인가? (...)

  우리는 과연 이런 지옥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제 여든을 훌쩍 넘긴 노학자는 체념도 냉소도 없이 여전히 혈기왕성한 젊은이처럼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옥을 견디며 살지 않을 바에는 지옥을 지옥이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들, 지옥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고, 끊임없이 지옥이 아닌 곳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라고 말이다. (...)

 - <모두스 비벤디*-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지그문트 바우만 · 후마니타스 · 2010년 · 원제 : Liquid Times: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 2006년) p.176~178 옮긴이 한상석의 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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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잠정적 타협) : 후일 좀더 적극적인 회담을 통해 다시 대체할 목적으로 행해지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합의, 혹은 '생활 방식'이나 생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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