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안티오이디푸스』 : 오이디푸스와 분열분석

by 이우 posted Sep 30, 2016 Views 2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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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이디푸스.jpg

  ... 오이디푸스가 복귀 내지 적용에 의해 얻어진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오이디푸스 자신은 사회장의 리비도 투자의 특정 유형을, 사회장의 생산과 형성의 특정 유형을 전제하고 있다. 개인 환상이 없는 것처럼 개인적 오이디푸스도 없다. 오이디푸스는, 그를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행시키는 자신의 고유한 재생산의 적응된 형식으로, 또 미리 조정된 막다른 골목들에서 욕망을 차단하는 자신의 부적응적 · 신경증적 정체(停滯)들 속에서 집단으로의 통합 수단이다. 오이디푸스는 또한 예속 집단들 속에서 꽃 피는데, 여기서는 기성 질서가 그것의 탄압적 형식들 자체 속에서 투자되어 있다. 그리고 예속 집단의 형식들이 오이디푸스적 투사들과 동일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오이디푸스적 적용들이 출발 집합으로서 예속 집단의 규정들과, 이 규정들의 리비도 투자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열세 살 때부터 나는 알했고, 사회의 계단을 올라 승진했으며, 착취자들의 편에 붙었다.....)


  따라서 무의식 속에서의 결합 종합들의 분리차별적 사용이 있다. 이 사용은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비길 데 없는 무기이긴 하지만, 계급들의 구별들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 분리차별적 사용이 <우리 편이어서 좋다>라는 느낌, 바깥 적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우등 인종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구성한다. 이렇게 해서 개척자들의 작은 백인 아들, 자기네 조상의 승리를 기념하는 아일랜드 프로테스탄트, 주인 인종이라는 파시스트가 생겨난다. 오이디푸스는 이러한 민족주의적 · 종교적 · 인종주의적 느김에 의존하지, 그 반대가 아니다. 아버지가 우두머리에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우두머리가 아버지에게 적용된다. 우리에게 <너는 네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하리라>라고 말하기 위해서건, 우리에게 <너는 네 아버지를 넘어서서 네 조상을 되짗으리라>라고 말하기 위해서건 말이다. (...)


  히틀러가 파시스트들을 단결시킨 것은 은유에 의해서가 아니며, 심지어 아버지 은유에 의해서도 아니다. 은행이나 주식거래, 유가증권, 배당권, 신용이 은행가가 아닌 사람을 단결시킨 것은 은유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럼 싹트는 돈, 즉 돈을 생산하는 돈에 의해서일까? 무의식의 진정한 콤플렉스들이자, 그 위계의 위에서 아래로 쾌감을 전달하는, 경제적-사회적 <복합체>들이 있다. 이데올로기, 오이디푸스, 남근은 여기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원리에 속하지 않고 원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흐름들, 재고들, 흐름의 절단과 유동들이다. 무엇인가가 흐르고 흘러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이해관계를 지닌 주체들뿐 아니라 취해 있거나 잠든 주체들까지도 죽음의 하구로 몰아간다.


  따라서 분열분석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리비도 투자를 분석하는 것. 이를 통해 어떻게 욕망이 욕망하는 주체 속에서 자기 자신의 탄압을 욕망하게끔 규정될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욕망과 사회적인 것의 접목에서 죽음 충동의 역할이 나온다). 이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에서가 아니라 아데올로기 밑에서 벌어진다. 파시스트적 내지 반동적 유형의 무의식적 투자는 의식적으로 혁명적인 투자와 공종할 수 있다.  거꾸로, 혁명적인 투자는 욕망의 층위에서 의식적 이해관계에 합치하는 반동적 투자와 공종할 수 있다. (...)


  그것은 그 자체로 보면 욕망의 견지에서, 오이디푸스가 발생하는 결합 종합들의 분리차별적 사용에 의해 진행된다. "나는 우등 인종이다." 따위가 바로 그런 사용이다. 무의식적으로 혁명적인 투자란, 욕망이 착취당하는 피지배계급들의 이해관계를 재절단하여 모든 분리차별 및 그 오이디푸스적 적용을 동시에 부술 수 있는 흐름을 흘러가게 하며, 역사를 환각하고 인종들을 망상하고 대륙들을 불태워버릴 수 있는 흐름을 흘러가게 하는 그런 식의 투자이다. <아니, 난 너희와 다른 부류야. 난 이방인이고 영토가 없어>. <난 영원히 열등 인종이야. 난 짐승, 검둥이야....>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무의식 속에서 투자하고 대체-투자하는 강렬한 권력이다. (...)


  분열분석은 실을 풀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기의들을 찾아나서는 박식한 실행도 아니요, 하나의 기표를 추적하는 고도의 텍스트적 실행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문학 기계의 생산적 사용이요, 욕망기계들의 조립이요, 텍스트에서 그 혁명적 권력을 뽑아내는 분열증적 실행이기 때문이다. 광기와 본질적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러니까 이것은 ...이다!> 또는 인종에 관한 『이지퇴르』의 명상.


 - 『안티 오이디푸스』(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 민음사 · 2014년  · 원제 : L’Anti-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1972년) <5장 소비의 결합 종합> p.186~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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