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커피(coffee), 카페(Cafe)

by 이우 posted Oct 29, 2012 Views 1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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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카페테라스.jpg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캔버스에 유채 · 81×65.5Cm · 1888년)

 

  내가 누구인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행복이 무엇이고 불행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내 꿈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울고 웃기 위해서
  화창한 날과 길이 필요하고, 카페와 카바레와 레스토랑이 필요하다.

 

  - 알프레드 델보(Alfred Delvau)의 <파리의 즐거움(Les Plaisirs de Paris)> 중에서


 

  카페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귀족들이 드나들던 사교계의 카페는 주인장들이 앞다투어 유명 건축가를 고용해 내부 장식을 꾸몄지만, 보통의 카페들은 화려하기보다는 오히려 허름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시골의 작은 카페는 <뷔베트(buvette, 작은 술집)>라 불렸고 식료품점을 겸하기도 했습니다. 서민들의 공간, 주흥이 있는 곳, 고유한 시적한 멋, 카페는 거리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은어로 즐겨 지칭되었습니다. 카페를 가리키는 수많은 말이 만들어졌습니다. 카페라는 통칭보다는 ‘술통’, ‘갈증을 해소하는 응급실’, ‘저축은행’ 등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카페는 교회의 숙적이었습니다. 일요일 교회에 올 사람들이 카페에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술꾼들은 그들의 삶을 자조적으로 표현하며 ‘카페에 간다’고 말하지 않고, 계산대가 그들의 제단이라 여기며 ‘예배당에 간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카페마르(cafe mar)’, ‘트로케(troquet)’, ‘만쟁그(mannezingue)’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운 정도입니다. 여자들이 주로 들락거린 곳은 ‘카블로’, 공장노동자들의 소굴은 ‘세나(senat)’, 술잔치가 끝없이 계속되는 곳으로 유명한 카페는 ‘술루아르(souloir)’ 등이라 불렸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소동이 빈번하게 일어나 악명이 높았던 곳은 ‘부쟁고(bousingot, 무정부즈의자) 외에도 ‘뷔뷔(boui-boui)’, ‘비빈(bibine)’, ‘표백제를 파는 집’, ‘마스트로케(mastroquet)’라고도 불렸습니다.

 

  1644년 프랑스 마르세유에 커피라는 것이 처음 도착하면서 프랑스에서 카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길거리에 커피를 마시는 집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홍차를 즐기는 귀족들이 모이는 '살롱'과는 달리 길거리 커피 마시는 집 카페는 귀족, 시민, 노동자, 시골 농부, 남녀 할 것 없이 프랑스 모든 계층이 모이는 열린 공간이었습니다. 카페는 사랑의 공간이자, 지식소통의 공간이었고, 예술의 현장이자 정치 토론장이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변화를 만드는 중심이었습니다.


  예술가들의 영감은 카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주말마다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이 모여 철학을 논하는 파리 생제르맹 가의 '카페 드 플로르'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서재였습니다. 마네, 드가, 르누아르는 몽마르트르의 카페를 좋아했고, 모딜리아니, 피카소, 밀레, 그리고 7년간 프랑스를 여행한 헤밍웨이는 몽파르나스에 있는 카페를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반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묘사한 카페는 걸작으로 남아있습니다.


   여성들에게 카페는 해방공간이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은 장소에서 여가를 보내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시절 카페는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립니다. 여성들은 카페에서 자연스럽게 남자들 대화에 낄 수 있었고, 술을 마실 수도 있었으며 정치나 예술에 대한 생각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또, 카페는 외로운 사람들의 피난처이기도 했습니다. 낯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흠이 되지 않는 장소였습니다. 카페는 은밀한 만남을 갖기에 적합한 장소였고, 소문을 퍼뜨리기에도 안성맞춤입니다. 자연스럽게 카페는 정치 토론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들은 정파별로 팔레 루아얄, 카페 드 발루아, 카페 드 푸아 등에 모여 혁명을 꿈꾸었고, 혁명 세력들이 모자에 초록색 잎을 꽂고 바스티유 함락을 위해 출발했던 장소가 바로 '카페 드 푸아(café Foy)'였습니다.


  18세기 초엽 인구 50만의 파리에는 3백개의 카페가 있었고,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8년엔 60만의 인구에 카페는 1800개에 달합니다. 그러나 영국에서 커피하우스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술을 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커피에 대한 반발도컸습니다. 17세기 후반 영국 시민사회의 거점이던 커피하우스는 여성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부인들이 커피하우스가 남편들을 잡아둔다며 항의한 결과 국왕 찰스 2세가 커피하우스 폐쇄령을 내렸다가 시민들의 분노에 10일만에 철회하기도 했습니다. 런던의 주식거래소 주변의 커피하우스에서는 주식 상담이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이 모두 커피하우스에서 상담을 받자 거래소 자체가 한산해지기도 했으며, 무역상들이 모이던 커피하우스에선 고객 유치를 시도하던 중개상들이 위험 부담을 미끼로 하며 '보험의 시초'가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주로 정책의 토론장이 되었습니다. 토리당과 휘그당 같은 정당들도 각각 선정한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지지자들을 규합했습니다. 네덜란드,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커피를 선점하자 영국에서 카페는 점차 쇠퇴합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경쟁이 과열된 커피 대신 차 시장을 확보했고 점차 홍차의 나라로 변모합니다.


  교회는 시골 농부들이나 서민들이 일을 끝내고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고 목을 축이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보기에 카페는 그저 돈을 낭비하는 유희의 장소일 뿐입니다. 결국 성직자들은 카페 영업을 제한하는 법 제정을 정부에 요구했고, 1814년에 인구 5000명 이하인 마을에서는 예배시간에 영업을 금지하는 법안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카페에 모여 정치 토론을 벌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부 당국을 긴장시키며 엄격한 규제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경찰이 카페와 같은 공공장소를 철저하게 감시하기도 했으며, 카페에 몰래 스며들어 귀를 바짝 세우고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는 프랑스의 카페 문화를 보고 자신의 책에 이렇게 쓰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카페들마다 작은 공연이 열리고, 시가 낭송되고, 토론이 벌어진다. 어림잡아도 프랑스 국민 중 5분의 1이 매일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생생한 목소리로 말한다."


  1789년 성난 민중이 파리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시키고 프랑스대혁명의 시작을 알리기 불과 이틀전 카미유 데물랭(Camille Desmoulins, 1760년~1794년)이 이들 민중을 선동했던 곳이 바로 파리의 <카페 포아(café Foy)>였으며,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반발한 미국인들이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을 계획한 곳도 보스턴에 있던 커피하우스였으며, 1775년 독립혁명의 도화선이 된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 소식을 들은 뉴욕 시민이 대규모 집회를 소집하여 독립 의지를 불태운 곳도 커피하우스였습니다.


  개인적인 언표행위란 없으며, 언표행위의 주체라는 것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말(기호, sign)들은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세계를 구성합니다. 푸코가, 가타리와 들뢰즈가, ‘비신체적 변환’ 혹은 ‘화행이론(話行理論, 사람들이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어떤 것이 발생한다는 언어 행위 이론)’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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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도서 : 『카페를 사랑한 그들: 파리, 카페 그리고 에스프리』(크리스토프 르페뷔르 저 · 강주현 역 · 효형출판 · 원제 : La France des Cafes et Bistraots),  『더 커피 북 - 커피 한 잔에 담긴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니나 루팅거,그레고리 디컴 저  · 이재경 역 · 사랑플러스 · 2010년 · 원제 : The Coffee 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