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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 '여성'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by 이우 posted Jun 07, 2018 Views 1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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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_나의우파니샤드서울_900.jpg


  自序
 
  시는 아마 길로 뭉쳐진 내 몸을 찬찬히 풀어,
  다시 그대에게 길 내어주는,
  그런 언술의 길인가보다.
  나는 다시 내 엉킨 몸을 풀어
  그대 발 아래 삼겹 사겹의 길을……
 
  그 누구도 아닌 그대들에게,
  이 도시 미궁에
  또 길 하나 보태느라 분주한 그대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너 이 놈, 나 죽었다는 말 못 들었니?
  나쁜 놈, 내 장례식에도 오지 않고.
 
  1994년 5월
  김혜순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서문



  新派로 가는 길 5
  김혜순


  걸어서 저 하늘까지
  저 하늘의 구름城까지 걸어가요
  저 구름城의 모습, 바로 내 모습이에요
  나는 걸어서 저 하늘의 내 안으로 들어가요
  구름城 문이 소리없이 닫히고
  城안에 나는 한없이 갇혀요
  뭉실뭉싯 살이 찌기도 해요 배가 부풀어오르고
  어느 날 살찐 아기가 튀어나오기도 해요 장딴지가
  파르테논 신전 기둥만해졌어요
  차암, 낯뜨거운 날 창문 열고
  나 한번 쳐다본 적 있으셨겠지요
  거 구름 한번 좋다 하셨겠지요?
  그러나 햇빛 양의 치맛자락 아래 그냥 그대 뜨거우시라
  놔두면서 나 혼자 마구 젖었던 거
  구름 기둥 같은 두 다리 싸안고 이리저리 뒹글었던 거
  보신 적 없다 말하진 않으시겠지요?
  내리지 않는 비로 누워서
  혼자 소용돌이치다 혼자 온몸 다 젖었던 거
  빗소리 어디서 아마득히 들리는데
  빨랫줄의 그대 속옷 하나 안 젖는 날
  있었던 거 생각나셨겠지요?
  큰 소리 마른 번개로 눈물 없이 울던 거
  말하려면 할수록 활자와 단어들이
  후드득 후드륵 뚱뚱한 내 뱃속으로 떨어지던 거
  입 안에 침만 고이던 거
  어느 날인가는 파랗게 눈 닦고
  그대 양철 지붕만 망연히 어루만지던 거
  차마 알아채지 못했다고는 안 하시겠지요?
  날마다 슬픔의 몸 바꾸며 소리쳐도
  내 몸 밖으로 물길 열리지 않던 거, 보셨겠지요?
  내 길 열어 그대 머릿결 따라 길을 내고
  그대 뺨 위로 길을 내고 싶어 눈 껌벅이던 거,
  이제 몇십번째의 이승길 걸은 듯하고
  저 높은 산 저 깊은 계속 저 神話의 굽이굽이
  다 지난 듯하여 水面 위에 내 말의 꽃 끝내 못 피우고
  그대 지붕 위에 물꽃 소리 못 피우던 거
  내 몸 혼자 뒤채고 부풀리던 거
  정녕 모르신다곤 않겠지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30~31



  아직도 서 있는 죽은 나무
  김혜순


  초승달의 눈썹이 깜빡깜빡
  열렸다 닫히면서
  애무에 젖는다
  보이지 않는 구름의 손이
  보이지 않는 달의 몸을 만지듯
  달은 칠흑의 허랑방천으로
  천천히 밀리면서
  낌빡깜빡 죽었다 깨어난다

  은은히 숲 속의 나무들이
  달의 발가락처럼 흔들리는 가운데
  어두운 밤의 난간에 기댄
  죽은 나무가 아직도 눕지 않고 서서
  문틈으로 깜빡거리는
  눈썹을 보며
  밤새도록 흐르는 달의
  살을 훔친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46



  어쩌면 좋아, 이 무서운 아버지를
  김혜순


  얘야
  천년 묵은 여우는 백 사람을 잡아먹고
  여자가 되고, 여자 시인인 나는
  백 명의 아버지를 잡아먹고
  그만 아버지가 되었구나
  (망측해라, 이제 얼굴에 수염까지 돋게 생겼구나)
  백 명의 아버지를 잡아먹고
  그 허구의 이빨로 갈아놓은
  문장의 칼을 높이 치켜들고
  나 두리번거릴 때
  거기서 문장의 사이로
  나귀를 타고 걸어 들어오는 너의 모습
  엘리엘리

  너 심겨진 밭에 약을 치고 돌아오는 아버지
  네 팔을 잘라 나뭇단을 만드는 아버지
  네 밑동을 잘라 제재소에 보내는 아버지
  양손이 사나운 칼날인 아버지
  큰 구두를 신어 디뎌야 할 땅도 많은 아버지
  나하고 놀아요, 아버지
  하면 깜짝 놀라는 아버지
  나 아버지가 되기 싫어 크 소리로 말해도
  이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살해했으므로 그만
  아버지가 되어버린 아버지
  경찰 커튼 아버지 겈정 잉크 아버지 기계 심장 아버지
  칼날같이 갈아진 양손을 모두어야
  비로소 제 가슴이 찔러지는 그런 아버지
  얘야, 나는 그런 망측한 아버지가 되었구나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49~50


  사월 초파일
  김혜순


  저 아카시아 흐드러지게 터진 골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노고단
  지붕마다 사람들이 위태롭게
  올라서서 수만 깃발처럼 펄럭거리네


  엄숙하고 경건한 장례 행력 거대한 영정 뒤로 상복을 입은 가족을 실은 검은 승용차 얘야 얘야 못 간다 에미 에비 뇌두고 네 맘대로 못 간다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라 이놈아 이 불효 막심한 놈아 수천 개의 휘날리는 만장들 뒤를 이어 대오를 지은 수만 명의 조문객들 검은 리본을 단 연도의 시민들 이곳을 주검이 통과할 수는 없습니다 시나리오대로 길을 막는 방석모 방패 삼십 분 안에 행렬을 돌리지 않으면 최류탄을 발사하겠습니다 걔는 안 죽었어 이놈들아 한정 없이 살 거야


  땡볕 아래 한없는 대치 아스팔트에 앉거나 눕는 행렬 장기전이 될 거야 그 사이로 김밥장수 커피장수 마스크를 파는 사람 사는 사람 시루떡을 팔러 온 할머니의 양은 다라이 죽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처녀 아울러 김밥과 콜라를 먹는 조문객들 저녁 시간이야 흐르러지는 대오 그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껌을 파는 아이들 신문을 파는 청년들 그 신문으로 모자를 접는 여학생들 두둑해진 전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담배장수 시장보다 김밥 값이 두 배야 바가지야 여기가 해수욕장이냐 그 사이로 성스런 초파일의 연등 행렬 등장 낭랑한 반야심경 합장 어스름 해지는 것과 때를 맞추어 최류탄 발사


  흐트러지는 대오 뛰는 아가씨의 벗겨지는 하이힐 우는 아이 탱탱 드럼통처럼 구르며 뜨거운 커피를 아스팔트 위에 쏟는 보온 물통 그걸 잡으려 뛰는 커피장수 밟히는 콜라 깡통 터진 김밥을 밟는 구두 골목으로 잠입하는 대오 두건을 쓴 사람들의 백 미터 이백 미터 달리기 어디서 물 쏟아지는 소리 깨어지는 떡시루 장삼을 펄럭이며 혹은 연등을 들고 혹은 연등을 버리고 뛰는 중들 연등 위로 넘어지는 옥색 한복 뜯기는 자주 옷고름 노랑 저고리에 붙는 불을 탁탁 손으로 치며 우는 여고생 연등을 밟는 검은 버선 전속력으로 우회하는 검은 지프


  큰일이 나긴 난 모양이야 저 연기
  바람 따라 퍼질 때마다
  눈발이 땅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네
  설악 대폭설 때처럼 저 나방Ep
  흩어지는 너 나방떼
  먹으로 달려드는 저 새떼 먹으러
  하늘 검게 칠하며 돌처럼 달려드는
  저 자동차떼
  막혔다 터져 흐르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72~74



  서울
  김혜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또 유리문이 나온다, 유리문 안쪽엔 출구라고 씌어 있고, 바깥쪽엔 입구라고 씌어 있지만 그러나 나가든 들어가든 언제나 너는 어떤 몸의 내부에 속해 있다. 마치, 난자를 만난 정자가 그녀의 집에 영원히 체포되듯 너는 거기에 속해 있다. 내부의 사람이면 누구나 유리문을 밀고 나가 또 하나의 유리문을 향해 걸어가야 하며, 그곳을 나와서도 또 하나의 유리문을 열어야 한다. 밤이 오면 어떤 유리문들은 네온 사인을 달고 여기가 정말 출구예요 말하는 듯하지만 그러나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어떤 유리문을 열면 길 잃은 파리가 윙윙거리는 방안에 허벅지를 드러낸 여자들이 뒤엉켜 누워 있고, 어떤 방문을 열면 네 시신 위로 구더기들이 한없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유리문은 빗속을 맹렬히 달려 너는 잦은 머리칼을 흔들며 죽어라 그 문을 향해 뛰기도 해야 하고, 어떤 유리문은 지하 깊숙이 미로를 개설하기도 한다. 지하 미로의 매달린 문들의 이름을 믿지 마라. 어떤 문엔 친절하게도 오류역이라 적혀 있기도 하고, 혹은 어떤 문엔 십리를 더 가라고 적혀 있기도 하지만, 그 말을 믿지 마라. 이곳의 사람은 아무도 출구를 모른다. 설탕병에 빠진 개미처럼. 알생의 시간을 다 플어내어 만든 실뭉치 속에 숨어든 파리처럼. 이곳 가슴의 미궁은 그리 넓지 않아 새벽 네시경, 두 시간이면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주파할 수 있지만 몸 밖으로 출구를 찾은 사람은 아직 없다. 가슴속 투명한 미궁의 주인은 오늘 또 세간살이를 몽땅 싣고 정읍에서 올라온 다섯 식구를 접수한다. 그들도 이제 들어왔으므로 출구를 모르리라. 미궁의 유리문들이 점점 늘어난다. 길 위에 길이 세워지고, 물길 아래 물길이 세워진다. 너는 늘 떠나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 벙어리 네 그림자는 말하리라. 땅바닥에 누워 네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서 말하리라. 이 길로 가서는 안 돼요. 그림자 언제나 길은 틀렸어요 말한다. 날마다 복선이 증가한다. 유리벽에 뭘 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너는 유리벽에 매달려 뭔가 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너는 유리벽에 매달려 뭔가 새기려 하고 있구나. 꿈속에 있으면서 꿈속에 전령을 보내려고, 헛되이 허공중에 고운 얼굴을 새기고 있구나. 미로는 날마다 골목 끝에 유리문을 세운다. 이 몸을 깨뜨리고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내 몸 밖에서 누가 나를 아직도 부르고 있는데……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92~93



  新派로 가는 길 1
  김혜순


  종점 옆의 아파트에선 안 봐도 알지요. 이부을 덮고 그 위에다 잠을 덮고 있어도 다 알지요. 첫차가 시동을 거는 소리. 아직 잠이 들깬 조수가 내 귓속에서 하품을 아! 하는 소리. 그리고 내 속에서 w마들었던 당신이 외양간 문을 열고 나를 끌고 나오는 모습. 버스 위로 고무 호스 속의 물이 쏴아쏴아 쏟아지고 물걸레가 내 귓속을 쓰윽쓰윽 닦는 소리. 다시 물이 유리창을 타고 내리면서 어젯밤 내내 달라붙어 있던 내 눈길을 닦아내는 소리. 그리고 당신이 커다란 솔로 내 가슴을 쓱쓱 쓰어주는 것. 아직도 어둠을 질질 흘리고 있는 버스를 다시 주유소 앞으로 끌고 가 덜컹 기름통 여는 소리. 이빠이 넣어 하는 소리 안 들려도 나는 다 듣지요. 그리고 당신이 나를 끌고 논둑길을 걸어가는 것. 나를 잠시 버드나무에 매어두고 샘물에서 물 한 바가지 떠 벌컥벌컥 마시는 것. 당신이 내 숨을 꼴깍꼴깍 넘어오는 소리. 당신 바짓가랑이를 점점이 적시는 물. 돈통을 든 남자가 슬피러를 지이익 끌며 버스로 가다말고 네 귓속으로 침을 칙 뱉는 소리, 그리고 당신이 당신 가슴을 쓸며 눈을 들어 머얼리 마을 앞 행길을 바라보는 것. 아 당신의 눈동자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행길. 다시 그 눈으로 망초꽃밭 한번 쳐다보는 것. 버스가 아무도 서 있지 않은 첫 정류장을 지나 귀 밖을 나서는 소리. 버스 꽁무니에서 솟아나는 어둠이 잠시 행길을 가리는 것 나는 다 보지요. 누워서도 다 보지요. 그리고 당신이 다시 나를 끌고 개울을 거너는 것. 윗옷 밑으로 빠져나온 희디흰 러닝셔츠. 나는 누워서 다 보지요. 당신이 지나온 망초꽃밭의 꽃들이 제각각 진저리를 치며 어둠을 털어내고 애타게 당신을 바라보는 것 나는 다 보지요. 시발점이라 하지 않고 종점이라 하는 종점 옆의 아피트에 누워선 안 봐도 다 알지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99~100



  新派로 가는 길 4
  김혜순


  하얀 눈. 하얀 토끼. 밤새 하얀 눈 내려 하얀 밤. 하얀 토끼가 하얀 철창 바라보네. 하얀 가운. 하얀 시트. 하얀 팔뚝. 하얀 모자. 하얀 스커트. 돌아서는 하얀 종아리. 하얀 샌들. 하얀 눈 내려 난 하얀 아기를 낳았네. 하얀 우산을 쓰고 먹는 하얀 밥. 하얀 피 만드는 하얀 약., 나는 먹었네. 하얀 눈 속의 하얀 하나님, 창문만큼 높아지고. 라얀 눈 속의 하얀 비밀 있어요. 하얀 이불. 하얀 땀. 하얀 코. 하얀 우유 속에 우얀 쥐 너무 많아요. 하얀 숨 막혀요. 하얀 눈 자꾸 내려 길 없어요. 하얀 악마, 하얀 지옥. 너무 멀어요. 하얀 하품. 하얀 잠. 하얀 붕대를 풀어주세요. 하얀 종이 위의 하얀 글씨, 내 하얀 시를 지워야지. 하얀 하나님 무심한 순결, 내 피의 길을 밖으로 열어요.


  참 용하지
  매일 아침마다 하얀 눈꺼풀 열고 하얀 치약을 짜 하얀 이빨에 들이대면서
  하얀 장막을 찢고 대문을 나서는 거


  하얀 눈 속의 하얀 삽. 하얀 집 한 채. 하얀 창문. 하얀 커튼 속의 하얀 등. 하얀 할아버지 드세요. 하얀 맛나. 하얀 나비. 나비. 나비. 나비. 엄마 하얀 나비 좀 보세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이제 며칠째야. 하얀 엄마. 하얀 기침. 하얀 한숨. 하얀 젖가슴. 하얀 귀 뒤를 타고 내리는 하얀 눈가루. 책상 위에 소복소복. 하얀 눈 내리네. 하얀 처녀의 하얀 웃음. 차곡차곡 내려 쌓이는 하얀 새. 그 새들의 감은 눈. 하얀 새가 내리눌러요. 무거워요. 이불 좀 치워 주세요. 바닷속에 해파리들이 늘어나요. 묵처럼 단단해지는 바다. 하얀 바다. 하얀 가루처럼 부서지는 바다. 하얀 모래 위의 하얀 토끼. 하얀 팔뚝. 하얀 주사기.


  눈이 차오르네
  하얀 눈벽이 차오르네
  그래도 나 자꾸만 하얀 벽을 드높이 드높이
  오오랜 내 문명의 끝은 어디인가요?
  부드러움의 지옥
  하얀 설탕 지옥에 빠진 흰 개미
  녹아내리는 하얀 설탕
  하얀 개미를 꿀처럼 결박하는 하얀 설탕 지옥
  숨이 막혀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05~107



  강변 포장마차
  김혜순


  까만 쓰레기 봉지가 강변 포장마차 앞에 놓여 있다. 그 안으로 담배꽁초가 들어간다. 시들은 국화꽃이 구겨져서 들어간다. 코 푼 휴지가 들어간다. 쉰밥덩이가 들어간다. 남은 곱창이 쏟아진다. 국수 가닥이 말라비틀어져 들어간다. 지금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주시기 바랍니다, 단발머리가 들어간다. 말장화가 들어간다. 백납 같은 비구니 둘이 들어간다. 취한 얼굴이 트림을 데불고 들어간다. 문이 닫히려 할 때 아이 업은 여자가 들어간다. 쓰레기 봉지 안으로 씹다 버린 껌이 들어온다. 사과 깡치가 들어온다. 까만 하늘의 별도 들어온다.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가 나와 봉지를 묶어놓고 들어간다. 생리대와 생선 대가리 사이에서 인광이 터졌다가 제풀에 사라진다. 뭉게뭉게 냄새가 섞이고 아이의 머리가 불끈 솟은 다음 울음 소리가 터져 나온다. 까만 하늘엔 까만 별이 뜨고, 파아란 하늘엔 파아란 별이 뜬다. 승객을 모두 바꾼 을지로 순환 전철은 88분 후에 정확히 강변역에서 다시 멈춘다. 까만 쓰레기 봉지가 강변 포장마차 앞에 놓여 있다. 높이 뜬 역 구내로 생리대가 올라간다. 생선 대가리가 올라간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11



  황학동 재생고무공업사
  김혜순


  머리와 꼬리가 다르지 않은 뱀들
  입과 항문이 다 구멍인 저 뱀들
  칼로 내리쳐도 각각 다시
  살아나서 꿈틀거리는
  저 검은 고무 호스들
  불 꺼진 집
  한 칸을 가즉 채운
  구부러진 백만 마리의 뱀들
  눈꼽 낀 흑구렁이들
  그 중 긴 것은 시베리아에 머리를 두고
  부산 앞바다에 꼬리를 둔 것도 있다 하고
  땅 및 서울을 몇 바퀴나 빙빙 도는 징그러운 놈도 있다고 하지만
  이제 죽어 천 토막 만 토막 난 것들
  스쳐가는 오토바이의 불빛에
  잠시 등가죽에 붙은 애꾸눈으로
  창문 밖을 홀기는
  저 녹슨 구름 연통들, 혹은
  팽팽하게 긴장하며
  아랫도리를 빳빳하게 세우며
  쾌락에 전신을 맡기며, 또아리를 풀고
  힘차게 힘차게 땅속 깊은 곳의 물줄기를
  넓디넓은 정원 위에 내뿜던
  이제 갈갈리 찢어진 壯士들의 주둥이들
  주머니가 없어 욕망도 더 큰 검은 구멍 동체들
  이제 대낮이 와도
  머리와 꼬리 사이가 늘 밤인 저 연놈들
  어둠의 서식처들
  황학동 재생고무호스공업사 가득
  엉켜 잠들었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14~115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김혜순


  1.
  아침 일곱여덟시경
  나는 생각한다
  서울에서 지금
  일천이백만 개의 숟가락이 밥을 푸고 있겠구나


  동그랗구나
  숟가락들엔 모두 손잡이가 달렸다
  시끄러운 아스팔트 옆
  저 늙은 나무엔 일천이백만 개의 손잡이가 달린 이파리들이 달렸다


  2.
  하늘이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환하게 내다 걸면 태양이 일천이백만 쌍
  우리들 눈 속으로 떠오른다 그러면


  서울사람들, 두 귀를
  가죽배의 방향타처럼 쫑긋거리며
  이불을 털고 일어난다
 
  바람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 그대 숨이 내 숨으로
  들어오면 머리 위에서 신나는 풀들이
  파랗게 또는 새카맣게 일어선다 오오


  그러다 밤이 오면 죽음이 오백 년 육백 년 전 할아버지의
  배꼽을 지나 내 배꼽으로
  들어오고 일천이백만 개의 달이
  우리의 가슴 속을 넘너들며 마음 갈피갈피
  두루두루 적셔준다


  한밤중 서울의 일천이백만 개의 무덤은 인중 아래
  모두 봉긋하고 오오오
  또 한강은 일번이백만의 썩은 무덤 속을 헤엄쳐나온
  일천이백만 드럼의 정액을 싣고 조용히 내일로 떠난다


  다시 하늘이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내다 걸면
  일청이백만 쌍의 태양이 눈을 번쩍 뜨고
  저 내장들의 땅속 지하 삼천 미터까지
  빛살 무늬 거룩하게 새겨진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2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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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스보스 태생의 사포(기원전 615~570/60년경)가 창작한 문학작품은 전문가들과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구동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그녀가 쓴 방대한 작품들 중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 소수의 작품들과 얼마 안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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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07
    Jun 2018
    05:21

    [문학]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 '여성'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自序 시는 아마 길로 뭉쳐진 내 몸을 찬찬히 풀어, 다시 그대에게 길 내어주는, 그런 언술의 길인가보다. 나는 다시 내 엉킨 몸을 풀어 그대 발 아래 삼겹 사겹의 길을…… 그 누구도 아닌 그대들에게, 이 도시 미궁에 또 길 하나 보태느라 분주한 그대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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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05
    Jun 2018
    05:09

    [문학] 『미덕의 불운』 : '사회체'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그들 중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열두 살이나 열세 살이 된 아이의 신경에 고통을 가하는 순간, 즉각 그 아이의 몸을 가르고, 아주 조심스럽게 관찰하지 않으면, 절대 그 부분은 해부학적으로 완벽히 밝혀질 수 없어. 쓸데없는 생각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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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05
    Jun 2018
    05:05

    [문학] 『미덕의 불운』 : '종교체'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모든 종교는 거짓된 원칙에서 출발하고 있어요, 쏘피.’ 그가 말하였습니다. “모든 종교는 창조자에 대한 숭배를 필요 조건으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만약, 이 우주 공간의 무한한 평원에서 다른 천체들 속에 섞여 둥둥 떠다니는 우리의 영원한 지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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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05
    Jun 2018
    04:55

    [문학] 『미덕의 불운』 : '자연'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아가씨의 그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얼마 안 가서 아가씨를 병원으로 데려가고 말거예요.’ 뒤부와 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였습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하늘의 심판이라든지, 천벌, 아가씨가 기다리는 장래의 보상 등, 그 모든 것은 학교의 문턱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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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02
    Feb 2018
    00:08

    [문학]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입술 · 입맞춤 · 기관

    (...) 나는 키스하기에 앞서 우리가 사귀기 전 그녀가 바닷가에서 지녔다고 생각했던 신비로움으로 다시 그녀를 가득 채워 그녀 안에서 예전에 그녀가 살았던 고장을 되찾고 싶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런 신비로움 대신에, 나는 적어도 우리가 발베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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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01
    Feb 2018
    23:45

    [문학]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죽음, 그리고 일상, 생명 에너지

    (...) 우리는 흔히 죽음의 시간이 불확실하다고 말하지만, 이런 말을 할 때면 그 시간이 뭔가 막연하고도 먼 공간에 위치한 것처럼 상상하는 탓에, 그 시간이 이미 시작된 날과 관계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 죽음이 이렇게 확실한 오후, 모든 시간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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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15
    Jan 2018
    08:55

    [문학]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슬픔

    (...) 질베르트의 징긋한 얼굴을 보는 짧은 순간에 비해, 그녀가 우리의 화해를 시도할 것이며, 심지어는 우리 약혼까지 제안하는 모습을 내가 꾸며 내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상상력이 미래를 향해 끌어가는 이 힘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실 과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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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14
    Jan 2018
    19:19

    [문학]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기억(memorie)과 추억(souvenir), 그리고 작품

    (...) 우리는 집에만 있지 않고 자주 산책을 나갔다. 가끔식 옷을 입기 전에 스완 부인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크레프드신 실내복의 분홍, 하양 또는 아주 화려한 빛깔 소맷부리 밖으로 나온 그녀의 아름다운 손은, 그녀 눈 속에는 있으나 마음 속에는 없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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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3
    Nov 2017
    01:53

    [문학]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 『나를 보내지 마』

    (...) "어째서 헤일셤이 필요했을까? (중략) 너는 작품이 사람을 드러낸다고 했지. 사람의 내면을 말이야. 네가 말한 게 바로 그거지? 그렇다면 그 문제를 제대로 짚은 셈이다. 우리가 너희 작품을 거어온 건 거기에 너희의 영혼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했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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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11
    Oct 2017
    22:59

    [문학] 마광수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초판 서문

    (...) '장미여관'은 내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여관이다. 장미여관은 내게 있어 두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나그네의 여정과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여관이다. 우리는 잡다한 현실을 떠나 어디론가 홀가분하게 탈출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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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14
    Jan 2017
    18:01

    [문학]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 돌베개 · 2016년) 해마다 7월이 되면 어느덧 지나온 날을 돌아보는 마음이 됩니다. 금년 7월은 제가 징역을 시작한지 12년이 되는 날입니다. 궁벽한 곳에 오래 살면 관점마저 자연히 좁아지고 치우쳐, 흡사 동굴 속에 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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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31
    Dec 2012
    19:50

    유토피아(Utopia)

    ( Canon EOS5D / Tokina 80-200mm / 남대문로 / Photo by 이우 ) ... <유토피아>의 제1부는 1500년 당시 영국 농민들이 겪던 처참한 삶의 현장을 고발한다. 사자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양이 사람을 먹는다니…. 모어의 독한 풍자는 그의 머리에서 나...
    Category문학 By이우 Views10393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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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26
    Nov 2012
    18:32

    [문학] 밀실과 광장

    (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낙산 변화마을 ) ...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
    Category문학 By이우 Views9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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