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non EOS5D / Tokina 80-200mm / 남대문로 / Photo by 이우 )
... <유토피아>의 제1부는 1500년 당시 영국 농민들이 겪던 처참한 삶의 현장을 고발한다. 사자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양이 사람을 먹는다니…. 모어의 독한 풍자는 그의 머리에서 나온 갓이 아니고 그가 살던 시대에서 나온 것이다. (중략) 영국 플랑드르에서 모직공업이 흥성하여 양모의 값이 폭등하자, 영국의 귀족들은 밀밭을 초지로 바꾸어 양떼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울타리치기운동(enclosure movement)은 대대손손 땅에 붙어 생계를 이어오던 농민들을 땅으로부터 폭력적으로 추방해 버린 것이다. 자신의 영지에서 노역을 제공하고 생산물을 바쳐온 농노들에 대해 영주들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의무마저 포기한 것이다. 양을 키워서 떼돈을 만져보겠다는 영주들의 탐욕은 봉건적 관계를 해체했지만, 쫓겨난 농민들을 맞이할 새로운 생산관계는 예비되지 않았다. 오갈 데 없는 농민들은 부랑자로, 거지로 거리로 떠돌았다.
부랑자는 잡히면 태형을 당한다. 달구지 뒤에 묶어놓고 몸에 피가 흐르도록 때렸다. 부랑자 두 번 잡히면 귀를 자르며, 세 번 잡히면 공동체의 적으로 사형에 처했다. 1572년 엘리자베스 1세의 법령에 따르면 거지는 자신을 고용해주 고용주를 만나지 못할 경우 혹독한 매를 맞고 귀에 낙인 찍힌다. 재법인 경우 그들을 고용할 고용주가 있으면 살려주지만, 세 번 잡힐 경우 용서 없이 반역자로 사형에 처한다. 부랑자 약 7만 2000명이 헨리 8세의 통치하에 사형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들어서는 300명의 절도범이 교수대에 올랐다.(중략)
“사람들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게 하는 요인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양입니다. 예전에는 얌전하고 조금씩 먹던 유순한 양들이 이제는 무서운 식욕으로 사람까지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양들이 농촌을 삼키고 있다는 것은 독설이요, 풍자이다. 한 명의 욕심꾸러기 지주가 농토를 흡수해서 수천 에이커를 울타리로 둘러막음으로써 수백 명의 농민을 거지로 만들고 있다. 범죄의 사회적 원인을 보라. 농민들을 추방하고 있는 영국 귀족들이 바로 범인이다. 교화도 왕도 공범이다. 지배층의 무위도식과 불의를 항해 삿대질하는 모어의 격노는 계속된다. (중략)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개인의 불행을 개인의 불운으로 넘기지 않고 잘못된 사회적 관계에서 찾고 있는 모어의 관점이다. 부랑자, 거지, 도둑의 비참한 삶이 그들의 개인적 불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줌의 부자들이 땅을 빼앗고 물건을 매점하여 대중을 궁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플라톤은 그의 ‘이상국가’를 만들면서 통치자의 사유재산을 폐지했다. 그의 부부공유제는 정치 지도자의 청빈을 위한 기본 조건이었다. 부인이 있으면 사적 이익을 탐하게 되고, 사적 이익을 탐하다 보면 권력을 남용하고 국가의 공익을 외면하게 마련이라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이제 모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사회 전반에 걸쳐 사유재산을 폐지할 것을 주장한다. 정확히 말하여 귀족과 교회의 ‘토지에 대한 사적 사유권’을 폐지할 것을 주장한다.
“재산이 사유되는 사회,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되는 사회에서 정의와 번영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사람들이 부를 평등하게 소유하는 것을 거부한 아르카디아에 법률을 만들어 주지 낳았던 것입니다. 모든 지성인은 건전한 사회의 필수 요건이 부의 균등 분배임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사유재산을 폐지하지 않는 한, 부의 평등하고 정당한 분배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모든 재산을 공유하는 사회가 되면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을 것임을 모어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이익’이라고 하는 인센티브가 없으면 사람이 나태해지며, 타인 노노동에 의한 속성을 나타내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중요한 문제이고 어려운 문제이다. 하지만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폐지하지 않는 한, 귀족의 봉건적 지배권을 폐절하지 않는 한, 사회 정의는 실현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중략) 유토피아가 하는 모든 사업의 목적은 생존을 위해 투여해야 하는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시간을 늘이는데 있다. 행복이 당신이 찾는 것이 당신이 누리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목적은 모든 시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 데 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이끈 사회주의자들은 하루 7시간, 주 40시간 노동을 주장했다. 토마스 모어는 500년 전에 하루 6시간 노동을 주장하고 있다. 놀라야 할 것은 우리의 무능이다. 500년 전과 비교하여 100배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현대적 생산 능력을 갖고도 하루 6시간 노동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미국은 1950년대 50시간을 투입하여 만든 물건을 지금 12시간의 노동으로 만들고 있다. 생산성이 4배 향상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 1980년대의 생산성이 30이었는데 2000년도의 생산성은 200을 기록했다. 7배의 생산성을 기록한 것이다. 1980년대 우리가 주당 70시간을 일했다면 지금은 동일한 생산물을 주10시간에 생산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생산성의 증대가 노동시간 단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일하는 사람들이 창출한 가치가 그만큼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생산성의 증대가 노동시간의 단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노동자를 생산의 영역에서 축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임금노동자의 생산 능력이 증대할수록 고용주의 해고 능력이 증대하는 것만큼 우리가 겪는 고통스러운 역설도 없다. 생산성이 2배로 증대되었는데 노동시간이 절반으로 단축되지 않으면 노동자 2명 중 1명은 일자리를 잃는다. (중략)
“유토피아에선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 열심히 일합니다. 유토피아에선 모든 것이 공동의 소유이므로 결핍의 공포가 없습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돈이 사라졌고 아울러 돈을 벌려는 욕망도 사라졌습니다. 금전 사용의 종말은 사기, 절도, 말다툼, 분규, 반란, 살인, 배신, 독살 등 많은 범죄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돈이 사라지면 돈으로 인한 불안, 긴장이 사라집니다. 가난, 그것이 돈의 결핍을 의미한다면 화폐의 소멸은 가난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황광우의 <<철학콘서트>>(웅진 지식하우스. 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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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토피아(Utopia) :영국의 정치가이며 인문주의자인 '토머스 모어'가 1516년 발표한 공상소설. 원제목은 <<최선의 국가 형태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이다. 이 책은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은 풍자를 통해 당시 영국 정치 경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으며, 제2권에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토머스 모어가 꿈꾸던 이상 사회를 제시한다. 유토피아엔 사유재산이 없다. 사람들은 하루 6시간 노동을 하며, 나머지 시간은 취미 생활을 하면서 자유롭게 보낸다. 필요한 물품은 시장의 창고에서 자유롭게 꺼내 쓸 수 있고, 주민자치제가 실현된다. <유토피아>는 르네상스 시기의 휴머니즘을 반영한 근대소설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으며, 본래 ‘유토피아(Utopia)’는 '없다‘라는 뜻의 ’u'와 장소를 의미하는 ‘topia'의 합성어로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뜻하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이상향‘이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