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사명 : 왈책 2월 독서토론 『추락』
○ 일시 : 2015년 2월 27일(금) 오후 7시 30분 ~ 10시 30분
○ 장소 : 모임공간 에피( http://www.space-epy.kr/Map )
○ 대상 도서 : <추락>(존 쿳시 | 동아일보사 | 2004년 | 원제 : Disgrace, 1999년)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존 쿳시'의 <추락>를 읽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워즈워드나 바이런 등 낭만주의 시에 탐익하는 '데이비드 루리'라는 백인 교수가 겪는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전편에서 '루리'는 제자 멜라니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충동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성 폭력 가해자가 되고, 후편에서는 그의 딸 '루시'가 강간을 당하면서 '루리'는 피해자가 됩니다. 이 두 이야기 속에서 '루리'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만약, 전편의 구도를 따라가면 후편의 '루리'에서 모순이 일어나며, 후편의 구도를 따라가면 전편의 '루리'에게 모순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작가 '존 쿳시'는 자신의 모순과 분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루리'로 대변되는 작가 존 쿳시는 진보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제스춰를 취하면서 모든 것을 '주체' 형식으로 되돌립니다. 극중 '데이비드 루리'의 분열, 또 '데이비드 루리'로 나타나는 작가 '존 쿳시'의 정신분열증은 식민지 쟁탈을 하면서 '계몽'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식민지 시대 영국의 정신분열증과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작가 '존 쿳시'는 자신의 병적인 분열을 알아채지 못하며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까지도 허무와 염세, 퇴페주의라는 허무의 세계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학이야 말로 들뢰즈가 경멸하는 '뿌리-책 유형' 즉, 환원주의형' 책에 속합니다. 이런 류의 문학은 '생성' 이 아니라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밖에 없습니다.
" 낭만주의에 가장 결여된 것이 민중이다. 영토에는 고독한 소리가 떠돌고 있다. 대지의 소리가 떠돌고 있다. 대지의 소리는 이에 응하기보다는 오히려 공명하고 반향한다. 설사 민중이 있더라도 그것은 대지에 의해 매개되어 땅 깊은 곳에서 나타나 언제 다시 땅속으로 돌아가 버릴지 모르는 민중이다. 지상의 민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하의 민중이다. 영웅은 대지의 영웅으로 신화적인 것이다. 민족의 영웅으로 역사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독일은 그리고 독일 낭만주의는 타고난 것의 영토를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구 밀도와는 무관하게 ‘고독한 땅’으로 산다는 특질을 갖고 있다. 그곳에서는 인구가 대지로부터의 유출물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혼자(Un Seul)>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영토는 민중을 향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친구>나 <연인>을 향해 반쯤만 열린다. 그러나 <연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 <친구>는 불확실하고 무서운 사람이다. (...)
낭만주의적 영웅은, 영웅의 낭만주의적 목소리는 주체로서 즉 ‘감정’을 가진 주체화된 개인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주체성의 소리라는 이 요소는 악기 전체에 그리고 관현악기 전체에 반영되는데, 이와 반대로 악기와 관현악은 주체화되지 않은 ‘변용태’를 동원한다. 그리고 낭만주의에 이르러 이것은 놀랄만큼 커다란 중요성을 띠게 된다. (...) 관현악-기악 편성은 다양한 소리들의 힘을 통합하거나 분리시키며 또 한 군데로 모으거나 사방으로 확산시킨다. 그러나 이 힘이 <대지>의 힘인지 아니면 <민중>의 힘인지에 따라, 즉 <하나-전체>의 힘인지, 아니면 <하나-군중>의 힘인지에 따라 이러한 편성은 변하며 이에 따라 소리의 역할도 변한다. 전자의 경우 역량의 집단화를 만들어내 바로 변용태들을 불러오는 것이 과제인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집단의 개체화를 초래해 이것이 변용태를 구성하고 관현악 편성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 문제다."
- <천개의 고원>(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새물결. 2003년) p.642~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