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사 : 왈책 12월 독서토론 『상실의 시간들』
○ 대상 도서 : 『상실의 시간들』(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 최지월 | 한겨레출판 | 2014년)
○ 일시 : 2016년 1월 8일(금) 오후 7시 30분 ~ 10시
○ 장소 : 모임공간 에피(www.space-epy.kr)
○ 주최 · 주관 : 인문학공동체 에피쿠로스(www.epicurus.kr)
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최지월의 장편소설 <상실의 시간들>을 읽었습니다. 이 소설 <상실의 시간들>은 주인공 석희가 엄마의 죽음을 치러내면서 사십구재에서 탈상인 100일까지의 일을 꼼꼼하게 그려낸 소설입니다. 작가는 이 소설의 화자(話者)인 석희를 통해 인간은 탄생에서 죽음의 순간까지 사회에 의해 규정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 안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삶이란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신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으며, '사회발전 양상’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며, '오래된 관습과 불문율에 기초한 봉건적 조직 속에서 크고 작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욕망에 따라 결단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 어린 숙희의 말처럼 ‘일상을 구성하는 물건들의 질’에 달려 있지도 않습니다. 태어나고(birth) 생존하고(survival) 재생산하고(reproduce) 죽어가는(death)는 우리는 사회의 규정과 이러저러한 배치물들이 만들어내는 그 사회의 기표(記標, signifiant)가 기입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어떤 사회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가, 어떤 사회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가?"
"우리는 모든 곳에서, 모든 방향으로 절편화된다. 인간은 절편적 동물이다. 절편성은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지층들에 속해 있다. 거주하기, 왕래하기, 노동하기, 놀이하기 등 체험은 공간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절편화된다. 집은 방의 용도에 따라 절편화된다. 거리는 마을의 질서에 따라 절편화된다. 공장은 노동과 작업의 본성에 따라 절편화된다. 우리는 사회 계급,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등 거대한 이원적 대립에 따라 이항적으로 절편화된다. 우리는 나의 일, 내 동네의 일, 도시의 일, 세계의 일……. (중략)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인데 (중략) 욕망은 왜 스스로 억압되기를 바라는가, 욕망은 어떻게 자신의 억압을 바랄 수 있는가? 이처럼 포괄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미시 파시즘밖에는 없다. 확실히 군중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권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군중들은 이데올로기적 속임수에 기만당하는 것도 아니다. 욕망이란 필연적으로 여러 분자적 층위를 지나가는 복합적인 배치물과 절대 분리될 수 없으며, 이미 자세, 태도, 지각, 예감, 기호계 등을 형성하고 있는 미시-구성체들과도 분리될 수 없다. 욕망은 결코 미분화된 충동적 에너지가 아니라 정교한 몽타주에서, 고도의 상호작용을 수반한 엔지니어링에서 결과되는 것이다."
-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9. 1933년-미시정치와 절편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