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사 : 왈책 9월 독서토론 『정오의 희망곡』
○ 대상 도서 :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 시인선 315 | 이장욱 (지은이)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 일시 : 2015년 9월 18일(금) 오후 7시 30분 ~ 10시
○ 장소 : 모임공간 에피( www.space-epy.kr )
○ 주관 : 인문학공동체 에피쿠로스( www.epicurus.kr)
이장욱의 두 번째 시집 <정오의 희망곡>을 읽었습니다. 시인은 감탄할 만한 시적 감수성으로 ‘인칭이 소멸된 나른하면서도 몽환적인 현대인의 병적인 증후'를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광호의 해설처럼 “이장욱을 한국 시의 가장 불행하고 ‘우울한 모던 보이’로 명명될 수 있다”면, 이장욱이 바라보는 우리 세계는 '세계 없음(worldless)의 공간'입니다.
'세계 없음(worldless)'이란 우리가 예전에는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세계(world)’에 살고 있었는데, 유토피아적 전망 자체가 사라져버린 이곳은 이제 세계가 아니라 단순한 장소(place)에 불과하다는 바디우(Alain Badiou, 1937년~ 현재)의 조어입니다. 알랭 바디우는 오늘날 사회의 특징을 ‘세계 없음(worldless)’으로 규정했습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년~1976년)는 ‘인간을 거기-있음(현존재)’으로 규정했고, ‘거기’란 ‘인간이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는 세계’를 뜻했지만, 바디우가 바로 보기에는 정작 '세계'에는 인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철저하게 개인을 파괴하고, 개별자들을 소비자와 유권자, 대중(mass)으로 환원시키면서 이제 세계에 남아 있는 것은 모두 동일한 모습과 값으로 매겨지는 인간 군상들이 있을 뿐 개인은 없다는 개념이 세계 없음(worldless)의 공간입니다. '세계 없음(worldless)'이란 바로 '인간'이 없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완고하게 연결되어 있고 서로 통하지만 단절하고 싶기도 하고 그립기도 한'(<전선들> 세계, '우호적이지만 그래서 냉소적인'(<정오의 희망곡> 세계에서 우리는 거리를 사뿐사뿐하게 걷는 코끼리로 살아가며 탈인칭됩니다. <정오의 희망곡>이란느 표제와는 다르게 이 시집에는 희망이 아니라 오히려 권태와 절망이 비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지(意志)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시인 이장욱, ‘우울한 모던 보이’ 이장욱은 의미 없음의 세계에서 ‘사랑’이라는 정념(情念, passion)을 찾아냅니다. 어찌되었던 '나는 너를 사랑하고'(<근하신년>),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모여들고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랑을 합니다.'(<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꽃처럼 무심하지만 당신과 나는 꽃처럼 어지럽게 피어납니다."(<당신과 나는 꽃럼>)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세계 속으로 던져지고(피투성, 被投性, Geworfenheit , thrownness) 기표(記標, signifiance)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들뢰즈의 말처럼 '정념적인 배반'을 하는 정념(情念, passion)이 있어 탈-기표할 수 있습니다(접속구, 接續口, conjun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