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년~1753년)는 아일랜드의 철학자이자, 성공회 주교다. 그는 아일랜드 토마스타운 근처에 있는 다이저트 성에서 버클리 귀족가문의 막내이었던 윌리엄 버클리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킬케니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고,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Dublin)에서 1707년 석사학위를 끝마쳤다. 학위를 마친 후에도 그 학교에 남아 있으면서 그리스어 강사로 일했다.
처음 출판한 것은 수학적인 내용을 다룬 것이었으나, 그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시각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위한 소론(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을 1709년에 출간하면서부터였다. 당시 그의 이론은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1710년 <인지원리론(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을 펴냈고, 1713년 <힐라스와 필로누스의 대화(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를 출간했다. 이 저서에서 버클리는 자신의 철학 체계를 제의했는데, 그 체계를 이루는 핵심적인 원리는 '우리의 감각이 재현하는 세계가 지각되는 존재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이 지닌 주요한 목적 중 하나는 당시 우세했던 유물론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 그 이론은 비웃음거리가 되어 널리 알려졌지만, 클라크 박사(Dr. S. Clarke)같은 몇몇은 그를 천재로 여겼다. 그가 영국을 방문한 후, 곧 그는 애디슨, 포프, 그리고 스틸이 속한 모임에 속하게 되었다. 1714년에서 1720년 사이에 여행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학문적인 노력을 유럽 곳곳에서 인정받았다. 1721년 그는 성공회 성직자로 서품을 받았고,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또 다시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에 남아 신학과 히브리어를 강의했다. 1724년 그는 데리의 사제장으로 임명되었다.
1725년 그는 식민지에서 활동할 성직자를 훈련시키기 위한, 칼리지를 버뮤다에 설립하는 계획을 세웠다. 조지 버클리는 자신이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에 봉사하기 위해서, 당시 그의 사제장 직분이 보장한 1,100 파운드의 수입을 포기하고 수입이 100 파운드에 불과한 아메리카 지역 선교사가 되어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는 로드 아일랜드, 뉴포트 근처에 상륙하여, 그곳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을 사들이고 유명한 <화이트홀>이란 집을 지었다. 1730년 10월 4일, 버클리는 "14살쯤 된 필립이라는 이름의 흑인노예"를 샀고, 며칠 후에는 "20살쯤 된 에드워드라는 이름의 흑인노예"를 샀다. "1731년 6월 11일 사제장 버클리는 세 명의 노예, 즉 "필립, 안토니, 그리고 아그네스 버클리에게 세례를 주었다."(노예문서는 브리티시 박물관에서 발견됨, 조지 메이슨, Annals of Trinity Church, 1698-1821, 51).
버클리는 설교를 통해 왜 식민지에서 기독교가 노예제도를 지원해야 하는지, 다른 한편으로 노예들은 왜 기독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일하는 노예보다 오직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노예를 두는 것이, 육으로는 그의 주인에게 모든 것을 순종해야 하는 노예를 갖는 노예 주인들에게 이득입니다. 복음의 자유는 일시적인 노예상태와 일치합니다. 노예는 오직 기독교인이 될 때에만 좀 더 나은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버클리, 제안, 347. 뉴포트에서 한 그의 설교를 보라, 1729년 10월 설교).
그는 그가 세울 학교를 위한 자금 지원을 기다리면서 농장에서 살았다. 그러나 자금은 지원되지 않았고 결국 그는 1732년 런던으로 돌아왔다. 1734년 그는 클로인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후 곧 그는 <알치프론, 또는 세심한 철학자(Alciphron, or The Minute Philosopher)>를 출간했고, 새프츠베리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1734년~37년에 <질문자(The Querist)>를 펴냈다. 그의 마지막 간행물은 시리우스(Siris)와, 타르-물에 대한 의학적 가치를 다룬 논문 <타르-물에 대한 깊은 생각(Further Thoughts on Tar-water)>이었다.
그는 클로인에 1752년까지 남아 있다가, 은퇴한 이후에는 옥스포드에서 아들과 함께 살았다. 그의 다정다감한 성격과 온화한 태도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버클리는 존 로크의 유명론을 비판하며 우리가 지각하는 것만이 실체이며,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즉,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극단적인 경험을 펴면서 관념론을 열었다. 그의 이론은 물질적인 것은 없고, 오직 정신적인 사건과 그것을 지각하는 사고 방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로크는 주체에 따라서 다르게 경험하는 빛깔, 냄새 등의 주관적 성질을 "제2성질"이라고 하고, 주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느끼는 물리적인 연장, 고체성, 운동 등의 객관적 성질을 "제1성질"이라고 한다. 제2성질이 경험 안에 있다면, 제1성질은 물체 자체에 속하는 성질이다. 진리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제1성질 때문이다. 제1성질이 동일하게 경험되는 이유는 사물들이 그런 성질을 타고났기 때문인데, 이는 일종의 "본유성질"이다. 로크의 제1성질은 실재하는 것이며, 이 실재의 대상은 모든 사람의 공통된 경험가능성에 놓인다는 점에서 이전의 관념적 실재론과 달리 경험적·유물론적이다. 이러한 태도는 근대과학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1성질이 유독 물질 그 자체에 속하는 객관적 성질이라고 볼 수 없다는 비판들이 제기되었다.
버클리는 경험되지 않는 성질이란 알 수 없는 성질이고, 알 수 없는 성질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제1성질의 객관성을 비판했다. 그는 <힐라스와 필로누스의 대화(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에서 우리는 기본적이고 부차적인 질(質)적 측면에 의해 대상을 정의한다고 말한다. 왼손을 차가운 물에 담그고 오른손을 따뜻한 물에 담그면, 왼손은 차갑다고 느끼고 오른손은 따뜻하다고 느낀다. 버클리는 한 가지 대상을 뜨겁거나 차갑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온도는 물의 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버클리는 또 크기가 대상의 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대상의 크기는 대상과 관찰자 사이의 거리나 관찰자의 크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대상은 다른 관찰자에 따라 다른 크기이기 때문에 크기는 대상의 질이 아니다. 버클리는 모양도 같은 논리로 논박하였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만약 기본적인 질이나 부차적인 질 모두 물체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관찰하는 질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독일 철학자 아서 쇼펜하우어는 ‘버클리는 최초로 주관적인 시작점을 정말로 진지하게 취급했고, 그것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반박할 수 없게 논증했다. 그는 관념론의 아버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