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20] 카를 마르크스(Marx)

by 이우 posted Feb 2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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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_Marx.jpg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인란트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역사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이다. 맑스, 막스, 칼 마르크스란 말도 쓰이지만 표준어법에 따르면 “카를 마르크스”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라인란트의 유서 깊은 로마 가톨릭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대에 걸친 유대교 랍비의 후예였다. 그 가문의 성은 원래는 모르데카이(Mordechai)였으나 마르쿠스(Markus)로 고쳤고 다시 마르크스(Marx)로 바꾸었다.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는 유대인이 관직을 갖는 것을 금하는 차별 법령을 피하기 위해 1817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가 기독교로 개종한 또다른 이유는 그 자신이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마르크스는 개방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젊은 시절의 마르크스의 저서 중 집필의 궤적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글은 고등학교 시절 쓴 세 편의 소논문이다. 그 중 세 번째 것인 <어느 젊은이의 직업 선택에 관한 고찰>은 그의 인생이 어떤 방향을 취하게 될 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마르크스는 직업 선택을 앞둔 젊은이라면 의무, 자기희생, 인류의 안녕, 완성에 대한 숙고에 입각해야 하며, 이런 종류의 관심이 서로 상반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자신의 미래와 관련된 일련의 불안들과 연결시켰다. 마르크스는 열 일곱 살 때부터 이상적인 결정과 인간 생활의 실제적인 결정들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트리어의 고등학교를 나온 뒤 1835년 10월 본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였다. 아들이 자신처럼 변호사가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고, 점점 법학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아들의 변화를 보면서 아버지는 아들이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그에 맞는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했으며, 결국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 대학교에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도 그는 역사와 철학에 몰두하였다.

 

  베를린에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에게서 미학적, 철학적 혁명의 방안을 찾고자 하는 브루노 바우어 등의 헤겔좌파, 혹은 청년헤겔학파와 교제하였는데 당시 그의 동료들은 박학다식함과 논리로 토론을 주도하는 청년 마르크스의 똑똑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당시 독일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철학은 단연 헤겔의 것이었다. 헤겔은 역사와 사회의 발전은 절대정신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며 그 과정은 변증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절대정신의 대변자이자, 실현도구라고 보았으며, 그 보편국가가 프로이센이라고 얘기함으로써 프로이센에 철학적 존재이유를 제공했다. 이러한 헤겔에 대해 청년헤겔학파로부터 비판이 가해졌다. 그들은 헤겔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라고 파악했다. 아울러 프로이센을 보편국가라고 주장한 헤겔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것이 반체제적 혁명의 씨앗이 된다고 여긴 프로이센 정부에 인해 청년헤겔주의자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가해진다. 마르크스의 활동도 이에 영향을 받아 계속 제약되었다.

 

Marx02.jpg  결국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1841년에 청년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에 대한 논문으로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청년헤겔학파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1836년 <기독교의 본질>을 비롯한 기독교 비판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후에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전도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정리, 헤겔철학에 과학적 요소를 부여하고자 했다.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크스는 청년좌파들과 반체제적 언론인 라인신문을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아 언론활동에 투신했다. 이 시기에 사고의 전환점, 특히 철학에서 변화를 맞이한다. 당시 독일 철학은 대단히 관념적이며 추상적이었는데, 철학적 이슈에서 사회경제적, 좀 더 나아가자면 '정치경제적인' 이슈로 방향을 전환한다. 라인 지방 농부들을 취재하던 도중 경제와 관련된 주제의 기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843년에 <라인신문>은 폐간되었는데, 당시 마르크스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프로이센에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편집장직을 사임합니다.'라는 광고문구와 프로메테우스(마르크스)가 독수리(프로이센)에게 괴롭힘당하는 그림으로 저항했다. 1843년에 <헤겔 법철학 비판서>를 발표하는데 청년헤겔학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나, 거기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 생존에서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유물론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독일에서 급진좌파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 시로 이주한다. 본격적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의 혁명적 집단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는데,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의인동맹(義人同盟, 독일어: Bund der Gerechten)이라는 비밀결사단체에 가입하는데,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비밀결사체였다. 이 단체를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쓴 것이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특징적 일부가 이 당시 저술에 나타난다. 독일의 관념철학에서 벗어나 역사유물론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844년에 쓴 <유태인 문제에 관해서>에서 그는 유태인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사적으로 해방된 것이지 인간으로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 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해서>는 독일의 신흥 부르주아들의 취약성을 지적하면서 프롤레타리아만이 역사적 과업을 지탱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파리수고(유고)'로 알려진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수고>에서는 역사유물론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역할과 생산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소외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의 소외론은 인간 해방을 갈구하는 휴머니스트로서의 마르크스를 강조하는 학자들의 주장 근거가 되고 있다. 실제 마르크스는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 소외된다고 <소외론>초판에서 주장했다. 이 해에 그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난다. 파리 시절의 마르크스는 정열적으로 활동했으나, 급진적 인물이 체류하는 것을 기피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지내게 된다.

 

  1846년에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한다. 600여 페이지의 방대한 저작인 이 책은 엥겔스와 공저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가득 차있다. 이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청년헤겔주의자와 결별을 선언하고 있으며 그들과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저작은 마르크스의 사상 발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유물론에 대하여 최초로 체계적으로 서술했으며,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자본주의 자체가 잉태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1848년 2월,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인동맹의 선언문으로서 발표된 것이다. 당시 이 조직은 블랑키와의 차별을 선언하면서 비밀결사에서 공개조직으로 탈바꿈하려하고 있었다. 혁명적 이들에 의한 소수의 급진적 음모와 비밀결사를 선호하던 블랑키파와 그 주도권 장악을 놓고 치열한 논쟁과 암투가 있었고, 결국 마르크스파가 다수가 되어 공산주의자동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들이 이런 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1848년 2월 혁명 덕분이었다. 혁명적 낙관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공개적인 단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 선언> 속에는 새로운 이론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과거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물에서 이야기한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프롤레타리아 승리의 확언을 선언문에 맞게 단순명료하게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마르크스의 초기 사상에서 보이는 휴머니즘적 철학적 고뇌는 상당히 감소하고 정치경제학적 내용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이에 대해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1850년에는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를 차례로 발표하는데, 계급 투쟁이 정치적 차원에서 어떻게 복잡하게 전개될 수 있는가에 대해 서술한 것이었다. 이 저작들은 경제적 시각이 아닌 정치적 시각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Marx_Family_and_Engels.jpg  1850년대는 혁명을 즉,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시대의 흐름이 거꾸로 흐르는 수구반동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1840년대 경제 공황을 겪고 있던 유럽 경제는 1850년대에 들어와 호황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여기에서 채굴된 금이 유럽으로 들어왔고, 교통수단의 속도가 사람이나 말의 힘을 이용할 때보다 빠른 증기 엔진이 운송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급진파들의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각적 혁명을 주장하는 이들과 혁명의 절정기는 이미 지나갔다는 분파로 분열된 것이다. 후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이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대영박물관에서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완전히 습득하여 마르크스 자신의 정치경제학이 성숙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본론> 집필을 구상해나가는 속에서 초고(Grundrisse)가 발견되었다. 이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지적 발전과정과 사적 유물론의 기본적 원칙을 정리해 놓고 있다. 마르크스의 초기사 상에서는 비판적인 철학적(critical philosophy)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변증법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며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846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운동과 메커니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에 나온 <자본>에 그러한 연구가 결집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역사까지 확대되어 형성된 사상이 역사유물론이다. 역사유물론은 마르크스 사상의 독특한 핵심이다.

 

  마르크스는 명석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이 있으나 자기 주장이 강하고 독선적인 면이 있었다고 한다. 술과 사교생활을 좋아해 모든 친구들과 불화를 일으켜가며 논쟁을 벌이기 일쑤였고, 술집이 운집된 골목에서 술집을 모두 돌아다니다가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그랬기에 마르크스를 존경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친우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엥겔스가 “그의 반대자는 많았어도 개인적인 적은 없었다”고 했듯이 그렇게 냉정하지는 않았고, 마르크스가 논쟁에서 고집이 센 모습을 보였던 것도 모난 성격을 가져서가 아니라, 당시 유럽 지식인들사이에서 난립하던 이상적 사회주의들을 비판함으로써 과학적 사회주의로 귀결하기 위함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 근거로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가 살던 시대에 난립하던 사회주의 조류들인 보수적 사회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추상적인 사회주의 등을 풍자와 논박으로 비판한다.

 

  마르크스는 성격이 따뜻해서 자신도 어렵게 살았지만 손님을 박대하는 법이 없었고, 어린이들을 좋아해서 딸 엘레노어에게 부자들이 목수의 아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면서도, “예수가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외적으로는 부르주아지를 비난하면서도 사적으로는 부인과 아이들이 부르주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안간힘을 썼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세상에 알려진 ‘그의 가난’은 절대적 가난이 아니라,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상대적 가난’이라는 얘기다. 그가 호색한으로 애인이 많았을 뿐 아니라, 아내 예니 베스트팔렌이 데리고 온 하녀 헬렌 다무스와의 관계로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은 유명하다. 이에 대해 평생의 동지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보호하기 위해 “마르크스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라고까지 선언하지만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프레데릭’이라는 이름이 붙은 아이는 후에 외과의가 되지만 프레데릭이 ‘위대한 예언자’의 아들이라는 별칭은 떨어지지 않았다.

 

  또한 마르크스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산책을 하고 부인의 임종을 지킬만큼 처자식에게는 자상한 가장이었지만 부모와 형제자매에게는 경원시했다 한다. 실제로 가난에 시달릴 때 유산을 염두에 두고 아픈 어머니와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그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차피 병도 들고 살만큼 산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아버지 하인리히의 사진을 관에 묻히는 순간까지 소지하고 있었고, 마르크스가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다기보다는 마르크스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평가가 있다. 그 근거로 마르크스의 모친은 자본론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 자본이나 만들지”라고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