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에피스테메 5월 모임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by 묵와 posted May 0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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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일정

 

일 시 : 2014년 5월 18일(일) 오전 11시 ~ 오후 1시
대상 도서 :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저 | 동문선  | 2001)
장 소 : 모임공간 에피(02-389-7057, www.space-epy.kr, 약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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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 <카프카>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저 | 동문선  | 2001)

 

  프라하 태생 실존주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문학업적, 사상을 조명한 책이다.   카프카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도 유용한 책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목한 카프카 문학의 소수성과 그 가치를 실감해볼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카프카 문학에 따라다니던 존재의 불안이니 부조리니 하는 실존주의적 수사들이 꽤나 진부하고 재미없게 들릴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발견한 카프카는 욕망하고 생성하며 '소수적' 글쓰기로써 '도래할 민중'을 창조하는 '문학-기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에서 등장하는 개념들이 실험되고 응용되는 구체적인 장이기도 하다. 번역자인 이진경이 역자 서문에서 이 책을 두고 들뢰즈와 가타리 철학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그런 맥락에서다. 

 

 

저자 소개

 

·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1995년)

 

들뢰즈_s.jpg    들뢰즈는 1925년 1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엔지니어였고, 형은 독일군 점령기간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기차에서 사망했다. 그는 소르본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48년 철학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한다. 리옹대학 강사를 거쳐서 1970년 파리 제8대학 교수가 되었다. 대학에서 철학·문학·과학을 강의하고 1987년 퇴임한 뒤로 줄곧 좌파 이념에 힘을 보태는 집필과 방송활동을 이어갔다. 실존주의를 비판하고 헤겔적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에 도전했다. '철학자 중의 철학자', '20세기 형이상학의 완성자' 등의 평가를 받는다. 푸코는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흄에 대한 책인 <경험주의와 주관성>을 낸 이후 <니체와 철학>을 내기까지 오랜 침묵을 지키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는 왕성한 저작 활동을 보여 <칸트의 비판철학>, <마르셀 프루스트와 기호>, <베르그송주의>, <자허 마조크 소개>, <차이와 반복>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의미의 논리>,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 <영화 1. 운동-이미지>, <영화 2. 시간-이미지>, <굴곡.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페리클레스와 베르디>, <대담 1972∼1990> 등을 썼으며, <안티 오이디푸스>, <카프카. 소수파의 문학을 위하여>, <천 개의 고원>,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을 필생의 친구 펠릭스 카타리(1930∼1992)와 함께 썼고 <담화> 등의 글을 다른 이들과 함께 썼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가타리와 함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펴내, 자신의 철학 사상에 대한 총정리를 했다.

 

  질 들뢰즈의 사유는 철학과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다. 니체―베르그송―스피노자로 이어지는 철학사 연구가 그의 영토를 표시하는 위도라면, 프루스트―카프카―프란시스 베이컨으로 이어지는 예술 비평이 그에 상응하는 경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존재의 일의성의 관점에서 재현(표상)주의를 비판하고, 생성과 긍정의 의미를 새롭게 해명했다. 들뢰즈는 가타리와의 만남 이후에 이러한 사유의 영역을 확대해,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관계 설정에 주력했다. 이들은 라캉주의가 다양한 관계를 초월적 도식으로 환원한다고 비판하고, 다원적 욕망과 생산의 내재적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고찰했다.

 

  1995년 갑작스럽게 들뢰즈는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프랑스 언론에서는 들뢰즈의 삶보다 들뢰즈의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들뢰즈는 1991년 이후로, 적극적인 집필 작업이라거나 사회활동을 하기가 어려웠고, 80년대 말에 텔레비전 방송에서 영화에 관한 프로그램을 조금 진행한 것이 사회적 활동의 거의 마지막이었다. 프랑스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파리 고등사범과 같은 일류대학을 나온 것에 반해 들뢰즈는 별로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 했다. 들뢰즈 철학은 프랑스 주류 철학에서 등한시되었다. 프랑스 사회의 ‘엘리트주의‘’를 생각해 볼 때, 8대학 출신과 고등사범 출신들의 격하가 심해 들뢰즈는 사망 직후에도 프랑스에서는 그 존재성이 희미했다. 지금 들뢰즈가 획득한 지위는 다른 어떤 외부적인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유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도 판단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 1930년~ 1992년)

 

가타리.jpg    파리 북서부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청년사회주의 단체에서 활약했다. 나중에 의학과 철학을 공부했던 대학생 시절에도 이러한 정치활동은 계속 되었다. 1953년 이래 라캉이 주도했던 세미나에 참여하였고, 1962년~1969년에는 라캉과 공동 작업을 한 뒤 라캉이 결성한 파리 프로이트 학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분석이 지닌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감지하면서 라캉에 비판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는 초기의 횡단성 개념을 통해 구조주의를 공격해나가던 것에서 점차 분열분석 방법을 통해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실천을 모색해갔다. 68년 혁명 이후 대중들의 다양한 욕망의 분출에 주목하고 기존의 정치가 가졌던 억압적 방식을 비판하고 욕망의 정치학을 제기하였으며, 국가 장치를 중심으로 한 사고와 실천을 기계적 작동과 욕망 해방이라는 틀로 바꾸어 나갔다.

 

  1969년 들뢰즈를 만난 이후 가타리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종합을 시도하였고 비(非)라캉적인 용어들을 가지고 사회정치적 무의식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횡단성 개념을 통해 구조주의를 공격해 나갔고 점차 분열분석방법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실천을 모색해 나갔다. 68년 혁명 이후 대중의 다양한 욕망분출에 주목하고 기존의 정치가 가졌던 억압적 방식을 비판하고 욕망의 미시정치를 제기하였으며, 국가 장치를 중심으로 한 혁명적 실천을 기계적 작동과 욕망해방이라는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려고 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에콜로지 운동에 가담해 분자혁명적인 사고를 에콜로지적 틀 속에서 확장해나갔다. 사회 에콜로지와 정신 에콜로지를 강조하면서, 이것들을 윤리-정치적으로 접합하는 고리로서, 그리고 철학적 실천 개념으로서 에코소피아를 제시하였다. 이 세 가지 에콜로지를 접합하여 사고함으로써 가타리는 자신의 궁극적인 핵심 주제인 '주체성의 생산' 문제를 색다르게 전개해 나갔다. 주요 저서로 <정신 문석학과 횡단성>, <분자의 혁명> 등이 있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저로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천개의 고원> 등이 있다.

 

  가타리는 흔히 '투사'로 묘사된다. 그는 실제로 활동적인 사람이었고, 부딪쳐 본 다음에 그 깨달은 것들을 개념으로 만들고 그 경험들을 확장시키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들뢰즈도 이를 언급한다. 내가 피뢰침이라면 가타리는 번개다, 나는 번개를 받아서 썼다'라고. 개념을 정리하고 체계화한 사람이 들뢰즈지만, 그 개념들의 영감에 해당하는 것들과 구체적인 영역에서의 접근은 가타리의 몫이었다.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소수적인 문학의 세 가지 특징은 언어의 탈영토화,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직접성의 연결,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다. '소수적' 이라는 말은 어떤 문학을 특징짓는 것이라기보다는, 거대한(혹은 기성의) 문학이라고 불리는 것 안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문학의 혁명적 조건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거대한 문학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태어나는 불행을 겪는 이들조차 그 나라 언어로 글을 써야 한다. 마치 체코의 유대인이 독일어로 글을 써야 하듯이, 혹은 마치 우즈베키스탄인이 러시아어로 글을 써야 하듯이. 구멍을 파는 개처럼 글을 쓰는 것, 굴을 파는 쥐처럼 글을 쓰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자기 자신의 저발전(低發展)의 지점을 찾아내는 것, 자신의 방언을, 자기 자신의 제 3세계를, 자신의 사막을 찾아내는 것. 주변적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수많은 논란이 있었다. 민중 문학이란 무엇인가,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소수적인 문학과 같은 좀더 객관적인 개념을 경우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논란에 적절한] 규준을 마련하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민중 문학이나 주변적 문학 등을 정의하도록 해주는 것은, 오직 다수적인 언어 그 자체의 소수적인 이용을 그것의 내부에서 수립할 가능성 뿐이다. 문학이 현실적으로 표현의 집합적 기계가 되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잘 다룰 수 있으며 그 내용을 진전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가를 치름으로써만 가능하다. 카프카는 정확하게도 소수적인 문학은 훨씬 더 쉽게 질료를 가공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표현 기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이고, 대체 그것은 또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표현 기계]이 언어와 다양한 탈영토화의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고 있다. 즉 체코어를, 동시에 농촌이라는 환경을 떠나 버린 유대인의 상황, 하지만 '문서 언어'로서 독일어의 상황이 그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더 멀리 나아갈 것이며, 표현 안에서 이러한 탈영토화 운동을 더 멀리 밀고 나갈 것이다. [위와 같은 경우] 오직 두 가지 방식만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러한 독일어를 인위적으로 더욱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으로, 상징주의, 몽환주의, 신비주의, 은폐된 기표 등과 같은 모든 자원을 부풀리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라하학파가 선택했던 방법인데, 구스타브 마이링크나 막스 브로트를 포함한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원형이나 유대 신비주의, 연금술 등을 기초로 하는 상징적인 재영토화의 필사적인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민중과의 절연을 더욱 강화했고, 오직 '시온의 꿈'으로서 시오니즘 안에서만 그 정치적 출구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카프카는 신속하게 다른 방법을 택한다. 아니 발명한다. 프라하의 독일어를 있는 그대로, 심지어 그 빈곤한 그대로 선택하는 것이 그것이다. 간결함을 통해서 탈영토화를 향해 언제나 더욱더 멀리 나아가는 것...... 어휘가 건조해지는 만큼, 그것을 강렬도 속에서 진동하게 만드는 것. 모든 상징적인 용법, 혹은 의미적 내지 단순한 기표적 용법에 대해서 언어의 순수하게 강도적(强度的)인 용법을 대립시키는 것. 비형식화된 완전한 표현, 강렬한 질료적 표현에 이르는 것. (이 두 가지 가능한 방법과 관련해, 물론 다른 조건에서지만 조이스의 방법과 베케트의 방법에 대해서 [동일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두명의 아일랜드인 역시 소수적인 문학을 낳는 훌륭한 조건 속에 있다.


  소수적이라는 것, 다시 말해 모든 문학에 대해 혁명적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문학의 영광이다. 조이스에게 있어서 영어 및 다른 모든 언어의 사용. 베케트에게 있어서 영어 및 프랑스어의 사용. 그런데 전자는 언제나 풍부함과 중층성(다원적 결정)을 통해 나아가면서 세계의 모든 재영토화를 작동시킨다. 후자는 건조함과 간결함을 통해, 의도적인 빈약성을 통해 나아가면서 탈영토화를 밀고 나가 강렬도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지점에까지 도달한다.)


  자신의 것이 아닌 언어 안에서 사는 사람이 오늘날에는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언어조차 잘 모르거나, 자신이 사용해야만 하는 다수적인 언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는 이민자, 특히 이민자의 아이들의 문제고, 소수자의 문제며, 소수적인 문학의 문제지만, 또한 우리 모두의 문제기도 하다. 즉 어떻게 자신의 언어로 소수적인 문학을 이룰 것이며, 언어 활동을 천착하여 간결한 혁명적 선을 따라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자신의 언어에서 유목민, 이민자, 집시가 될 것인가? 카프카는 말한다. 요람에서 아이를 훔치라고, 팽팽한 줄 위에서 춤추라고.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