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45] 들뢰즈·가타리의 철학

by 이우 posted Apr 0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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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현대철학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 흐름은 푸코가 말했던 것처럼 21세기 전반을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는 철학사를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동안 타성에 빠졌던 철학을 새로운 활력 있는 담론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의 사유는 새로운 형태의 유물론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로 인하여 앞으로 철학사에 대한 계속적인 새로운 독해와 정교한 유물론의 전개가 이어질 것이다. 들뢰즈의 사유는 경제와 정치, 사회영역 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건축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도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들뢰즈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유의 길을 모색하려는 인물들도 있다.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맞서 수학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나 들뢰즈가 강하게 논박한 인물인 헤겔과 라캉을 기반으로 반(反)들뢰즈적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지젝 등이 그들이다. 이들과 들뢰즈의 대결이 지금의 철학 지형(地形)이다.

 

 

 잠재성(virtuality)과 현실성(actuality)

 

  들뢰즈는 존재론적으로 잠재성(virtuality)과 현실성(actuality)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들뢰즈 사상에서 잠재성(virtuality)과 현실성(actuality)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우리가 새롭게 끊임없이 해석해냄으로써 우리 삶에 도움이 되게끔 만들어가야 할, 그래서 해석 그 자체가 개념의 창조 과정이 되어야 하는 운동으로 본다. ‘A는 A다’라는 정의가 아니라, 이것을 풀어서 ‘이건 뭐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저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잠재성, virtuality)을 해보면 생각의 갈래에 따라 다른 효과(현실성, actuality)가 나타난다. 이것은 해석과 의미의 다양성을 열어 놓은 것이다. 생각할 때마다 개념 자체가 변이되고 달라지는 것, 이것이 들뢰즈 철학이다.

 

베르그손의 역원뿔.jpg  <베르그손>의 인식은 3개의 지층(單層)들로 이루어진 역원뿔형 구조다. 들뢰즈 철학은 이 3개의 층(層)을 이해하면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단층(單層)의 개념은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 손>의 영향이다. <베르그 손>의 사유는 기본적으로 성층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S가 현재라고 하면, 이 현재의 지점이 ‘액추얼(acture)1) 한 것’, 즉 현실성(actuality)이고, A-B 이 부분은 ‘버추얼(virtual)2)한 것’, 즉 잠재성(virtuality)이다. 잠재성은 아주 깊은 곳이지만 무한히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잠재성은 A에서 A2부분으로 수축되면서 새로운 층위가 형성되고, 이 수축이 P(공시적인 현재)에 닿으면 현실성(actuality)이 된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는 A-B를 ‘이념’이라고 부른다. A1-B1과 A2-B2를 ‘강도’라고 부르고, S를 ‘개체’라고 한다. 그런데 <베르그송 주의>에서는 A-B를 기억, A1-B1과 A2-B2를 ‘회상’으로, S는 ‘현재의 접점’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도식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 <베르그송 주의>와 <차이와 반복>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들뢰즈의 모든 책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크게 잠재성(virtuality)과 현실성(actuality)은 이원론이고, 그 이원론(S-AB)은 강도의 장(A1-B1과 A2-B2)이라고 하는 초원론적 장을 경유하기 때문에 층으로 갈라지고, 이것들은 다시 일회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셋으로 갈라진 이것은 두 개의 표현이며, 구조적으로 볼 때 이 두 개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표현이다.

 

   흔히 베르그손 사유를 ‘이원론적 일원론’이라고도 한다. 두 개의 갈라지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회적인 것들이 두 개로 갈라지고, 지층으로 나누어지는  과정들은 동일한 패턴의 반복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성해 가면서 창조적인 작업으로 나타난다. 베르그손의 사유에서 ‘기억’, ‘회상’, ‘현재’는 생명과 물질이라고 하는 두 이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럴 때는 ‘이원론’이다. 그러나 생명과 물질의 이 이원론은 사실 생명이라고 하는 단일한 것이 폭발력을 가지고 쏘아지긴 했지만, 점점 속도가 저하되면서 응고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물질로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에 결국은 일원적이다.

 

 <베르그손>의 인식 구조를 변용해 들뢰즈의 개념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개체(S)는 잠재성(virtuality)에서 수축하다가 하나의 지층(strate)3), 혹은 판(plan)과 접속(conjonction)해 주체화된다. 그러나 이 주체화는 다른 실체(substance). 혹은 기계(machine)4)들과 같은 배치물의 배치(agencement)5) 속에서 코드화(Codage)6)되어 존재하게 되고 지층이나 영토 속에서 분절(articulation)되어 절편(segmentarit?)7)으로 존재한다. 개체(S)가 잠재성(virtuality)에서 현실성(actuality)으로 수축되는 과정(A→A1→A2→S, B→B1→B2→S)에서도 개체(S) 각 지층들의 배치물의 배치가 고려될 수밖에 없다.

 

들뢰즈의 역원뿔.jpg

 

 

 

존재의 일의성 (一義性, univocite)

 

  들뢰즈가 바라보는 존재는 “존재는 오로지 차이에 속한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차이’라는 하나로 존재의 성격을  규정했다고 해서 들뢰즈의 존재론은 ‘일의성(一意性, univocite)’에 속한다. 존재의 일의성은 들뢰즈 사유의 핵심인 ‘차이의 존재론’으로 귀결되며 ‘차이 자체’에 대한 파악이었다. 존재와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존재론의 기본 문제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들뢰즈의 ‘일의성(一意性, univocite)’은 많은 논란이 있었다. “존재는 오로지 차이에 속한다.” 들뢰즈는 나무형식과 리좀 형식의 비유를 들며 모든 것을 하나로 되돌리려는 환원주의, 일자론(一者論)을 비판했지만, 이 언표는 모든 존재를 ‘차이’라는 하나로 환원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받았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년~)가 들뢰즈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알랭 바디우는 들뢰즈의 존재의 일의성 사유를 말하며 들뢰즈가 ‘일자(一者)’의 철학자라라고 말한다. 바디우는 들뢰즈의 사유는 일자의 사유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일자의 바다의 물방울’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바디우는 들뢰즈의 사유가 ‘단조롭다’고 까지 말했다.

 

 

great chain of being.jpg

 

  들뢰즈가 말하는 다의성(多義性), 일의성(一義性), 유비(類比)는 중세철학의 개념들에 뿌리 두고 있다. 이 문제는 스콜라 철학 전기인 9세기부터 12세기 중엽까지 가장 핵심적인 논쟁으로 꼽히는 <보편자 논쟁>이 그것이다. 존재하는 각각의 개별자(individuals)로부터 보편적인 속성을 축출해낸 개념이 보편자(universals)이며 이 보편자는 종(種, spicies)이나 류(類, fvgenre)와 같은 범주를 가지게 된다. 플라톤은 보편자가 실재한다고 생각했으며(실재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는 실재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유명론). 보통 교회는 실재론에 우호적이다. 이 문제는 신이 보편자들만을 인식하느냐 개별자들까지 인식하느냐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잘 드러나는 것이 수 세기 동안 서양 사상의 중심적 위치를 잡고 있었던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8)이었다. 플라톤 이래 20세기 초까지 서구 사회를 지배해 왔던 이 개념은, 우주가  충만성·연속성·계층성이라는 세 가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의 대사슬(Great Chane of Being)>은 종교적 필요성에 의해 성립되어 존재자(개별자, individuals)를 계층화시키고, 식민지 쟁탈을 합리화하는데 유효한 근거를 제공했다. 세계대전을 겪으며 많이 약화되었으나 이 개념은 지금 세계에도 유효하다. 보편자(universals)를 인정해야 사회 질서 및 제도 유지에 효용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아래에서의 모든 존재는 계층화될 수밖에 없다.

 

 

존재사슬_로버트 플러드.jpg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Kategoria>)에서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실체(usia)로, 실체에 존재하는 실체, 질량, 성질, 관계, 장소, 시간, 상태, 소유, 능동, 수동, 성질, 관계(10개 범주)로 실체를 범주로 나눴다. 범주는 일반성으로 사물을 통합하는 것이다. 각 개별자(individuals)자 하나의 존재로 통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을 ‘존재의 일의성(Univocity of Being)이며, 범주들 사이에는 같은 속성이나 관계가 없어 서로 불연속하며 통약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존재의 다의성(Equvocity of Being)이다. 일의성 입장은 신(천상계)과 세계(지상계)가 통약 가능한 것이 되고, 다의성 입장은 신의 섭리에 따라 만들어진 지상계가 신(천상계)과 소통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런 모순의 타협점으로 나온 것이 ‘존재의 유비성(Analogy of Being)이다. 존재는 일의적이지는 않지만 유비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었으며, 서양 중세사회를 떠받치는 존재론적 입장이 이 유비성이다.

 


  존재의 다의성(多義性, equvocity of being)

 

  존재의 다의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는 여러 가지로 말해진다”는 명제로 확립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언표는 존재론적 표현으로 바꾸면 “존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언표가 광물의 존재 방식, 식물의 존재 방식, 동물의 존재방식, 신(神)의 존재 방식이 다 다르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다의성은 광물, 식물, 동물, 신(神)과 같은 유(類)들의 불연속성, 통약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불연속상에 있으며 서로 통약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존재는 하나의 이름으로 말해지지만, 그 이름은 그것이 결코 하나로 용해시킬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즉 유(類)와 종(種)의 사유가 곧 ‘동일성’의 사유임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따르면, 서로 다른 범주는 공통점을 통해서만 범주들의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된다면,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는 동일성을 의미하는 범주에 종속되고 말 것이다. 이 경우 가장 상위 유(類)들이 하위 유(類)를 종속시키면서 범주를 형성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범주의 하위 개념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② 유비(類比,劉備,有備, analogy of being, anologie)

 

책_의미의 논리.jpg    유비(anologie)란 두 개의 사물이 몇몇 성질이나 관계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유비의 개념을 통해서 범주들 사이에 연계성을 부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한단어가 어떤 대상에서 선차적으로 사용되고 다른 것들이 후차적으로 사용 될 때 후차적인 것은 기본 대상(제1유비=선차적인 것)의 관계 속에서만 사용된다. 예를 들면, ‘건강’의 경우 선차적으로 사람과 동물에 사용된다면 ‘동물이 건강하다’는 특징인 혈색이나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음식 음료는 후차적으로 사용된다. 즉, 건강(1차 유비)의 관계 속에서 혈색이나 음식이 사용 된다.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비는 다의성과 일의성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던 토마스 아퀴나스(Saint Thomas Aquinas, 1224년~1274년)에 의해 부활한다. 중세 시대에 존재와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는 어려운 문제였다. 교회 입장에서는 신은 ‘존재’해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존재를 초월해야 한다. 세계와 신의 존재가 일의적이라면 신의 초월성이 위협을 받고 범신론(汎神論, 우주, 세계, 자연의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하는 세계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만약, 세계와 신의 존재가 다의적(多義的)이라면 우리는 신에 대하여 어떤 설명이 불가능해져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 초경험적(超經驗的)인 것의 존재나 본질은 인식 불가능하다고 하는 철학상의 입장)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존재는 다의적이지만 통약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즉, 존재는 유비적이라고 주장하며 이 문제를 봉합했다. 아퀴나스가 생각하기에 모든 존재는 다의적이지만 몇몇 성질이나 관계를 공통으로 갖고 있다. 들뢰즈는 이 유비의 사유가 한편으로 존재를 공통의 유(類)로 놓지 못하면서도, 존재의 보편성을 단지 동일성으로만 파악하고, 다른 한편으로 무엇이 개체들의 개별성을 구성하는지를 말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동일성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고, 개별성 구성에 대한 비판은 추상적 사유의 비판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유비의 사유는 진정한 보편도, 반대로 진정한 개별성도 파악하지 못한다.

 


  ③ 존재의 일의성(一義性, univocity of being, univocite)

 

  존재의 일의성(一義性, univocite)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년~ 1308년)’에 의해 서구 철학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스코투스는 존재의 일의성을 주장하며, 신과 세계, 세계의 모든 범주는 서로 통약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이성을 신뢰하는 아퀴나스의 주장에 반대했다. 아퀴나스는 지성에 의해 의지가 결정되고 제약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만약 신의 의지가 이성에 종속되거나 제약받게 된다면 그것은 신 자신이 제약받는다는 얘기가 되므로 이성을 위에 놓으면 신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의 의지야말로 신의 절대적인 능력이 된다는 것이 스코투스의 생각이다. 그리하여 아퀴나스의 '주지주의(主知主義)'에 대비하여 스코투스의 주장을 '주의주의(主意主義)'라고 한다. 도덕에 대한 입장에서도 아퀴나스의 순서는 완전히 다르다. 아퀴나스는 신의 명령이 선하고 신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신은 그것을 명령한다고 말하지만, 스코투스는 신이 그것을 명령하기 때문에 선하다는 것이다. 스코투스는 아퀴나스가 신뢰하는 이성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성을 통해 경험 세계와 신 사이의 연관 관계를 이성을 통해 밝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존재론,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론이다.

 

책_들뢰즈철학사_s.jpg   들뢰즈는 철학사를 연구하며 이런 존재론을 스피노자와 니체에게서도 발견한다.

 

  “존재자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데도 존재가 일의적이라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유비적 사유에서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외부적 시선읕 통해서, 즉 범주들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러나 일의적 사유에서의 차이는 각 존재들 내부에서 즉 역능(potentia=puissance)에 의해서, 강도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역능의 정도들로서의 차이이며, 유와 종의 위계(이런 위계는 ‘포르퓌리오스의 나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에 입각한 차이(즉 동일성의 전제 위에서의 차이)는 이차적인 것이 된다.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일의적인 존재의 표현들이며, 그들의 차이는 역능의 정도에서의 차이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도 동일성은 남아 있다. 실체의 동일성이 그것이다. 만일 스피노자에게서 실체의 동일성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순수하게 양태적인 우주, 또는 차생적인(diff?rentiel) 우주일 것이다. 이것은 곧 표면의 사유, 사건의 사유이다. 그러나 존재가 완벽하게 일의적이라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개별자들은 역능의 상이한 표현이 되며, 사물들에 대한 파악은 질적 본질(존재의 유비)에서 양화 가능한 역능(존재의 일의성)으로 옮겨간다. 이것은 곧 한 사물의 ‘임(esse)’에서 ‘할 수 있음(posse)’에로의 옮겨감을 말하며, 이로부터 여러 실천철학적 함의들이 전개된다.”

 

  만일 스피노자적 동일성마저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그리고’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즉 남는 것은 “존재, 일자, 또는 전체로 규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의 바깥” 관계들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유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런 관계들의 ‘배치’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뢰즈에 의하며, 사물들은 ‘배치’ 안에서 구체성을 획득한다. 존재의 다의성과 유비 논란이 들뢰즈가 ‘배치’라는 개념으로 융합되는 것이다. 이 배치 개념에서 개체는 다양체(multiplicit?)9)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양체는 외적인 다양도, 형이상학적인 라이프니츠의 일자(一者)도, 베르그손의 다자(多者)의 개념도 아니다. 들뢰즈에 있어서 개체는 영토화·탈영토화 운동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하기 때문에 다양체이며, 그 어디에도 정해진 노선을 그려놓지 않고 오직 차이 때문에 존재하는 다양체다.

 


차이의 철학

 

책_차이와 반복.jpg    들뢰즈는 획일성?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에 대해 사유한 철학자이며, 생성과 창조에 주목한 철학자였다. 그래서 들뢰즈의 사유를 두고 흔히 ‘차이의 철학’이라고 부른다. 들뢰즈가 제안하는 차이의 개념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차이와 반복>이다. 이 책은 원래 1968년 저자의 국가박사 학위 청구 논문이었다. 이 한 편의 박사 논문은 당대 식자들이 “비바람을 동반한 폭풍우”라 부를 만큼 충격적이었다. 들뢰즈가 기존 철학사 전체를 재편하고 철학적 변형을 꾀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 시대 이후 줄곧 서양철학의 근본이었던 ‘자기 동일적인 존재’, 즉 이데아라는 발상 자체를 뒤집었고, 헤겔과 하이데거보다 더 멀리 나갔으며 니체의 반플라톤주의적 전희를 완성했다. ‘차이와 반복’에서 구축하는 존재론은 플라톤의 ‘이데아’ 이래 지속된 이원적 세계관, 또 관념론과 인식 자체가 달랐다. 들뢰즈 이전의 서양철학은 감각이 인식하는 사물을 이데아(원형)의 복제로, 하나의 관념으로 인식했으며, 사물이 얼마나 원형과 관념에 가까운가에 따라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들뢰즈 이전의 세계는 이데아의 이상적 요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들뢰즈는 이념 세계를 정염 세계 속으로 되돌렸으며, 추상적인 관념을 물질화했다.

 

  그는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동일성이라는 거대한 그늘에 가려 있던 수많은 차이를 긍정적인 힘으로 끌어낸다. 들뢰즈가 충실히 사상을 계승한 베르그손은 자신의 저서 <물질과 기억>에서 물질이라는 개념을 ‘무수한 이미지들의 총체’라고 말한다. 쉬운 예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 사람은 이미지의 총합이며,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생성한다. ‘나는 그 사람이 눈이 커서 좋아’, ‘키가 커서 좋아’, ‘참 착해’…. 관념의 세계는 이 이미지의 합으로 ‘사랑’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만든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인지하고 설명하기 위해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축출해 평화, 사랑, 국가, 민족, 이념, 선과 악 등의 추상적 개념을 만들었지만, 이 개념들은 오히려 개별자들을 계층화하고 개별적인 차이를 말살했을 뿐이다.

 

  들뢰즈는 존재와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는 존재와 사물을 규정하는 근원적 요소라고 생각했다. 들뢰즈는 ‘차이’를 세계를 형성하는 ‘궁극적 단위’라고 말하며, 개념을 만드는 “유사성·동일성·유비·대립 등은 근원적 차이 혹은 차이의 근원적 체계의 결과나 생산물로서 이 외에는 더 이상 다른 것으로 고려하지 않는다”(<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들뢰즈에 의하면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 자체로서 ‘차이화’의 과정이다. 닮은 것들은 오직 다름(차이)으로 인해 닮으며, 다름(차이)만이 서로 닮음을 인증하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우리 삶은 아 차이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이때 반복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바로 ‘차이’의 반복이다. 하나의 연극, 하나의 오페라, 하나의 교향곡도 연주할 때마다 연주 시간이 다르고 연주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어떤 경우에도 동일한 반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반복은 항상 차이를 전제로 한 반복인 것이다. 종(種)과 유(類)로서 인류 역시 생명과 죽음을 반복하지만, 동일한 것으로서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머금은 채 반복한다.

 

  들뢰즈의 이 생각이 닿은 곳이 노마디즘(nomadism)이었다. 노마디즘은 새로운 가치의 창안. 새로운 삶의 방식의 창조, 그것을 통해서 낡은 가치를 버리고 낡은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탈주는 도주와 다르다. 도주가 동일성을 피하는 퇴행(退行)이라면, 탈주는 새로운 차이를 생성하면서 역행(逆行)이다. 노마디즘이란 차이를 생성하는 일이다.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질 들뢰즈

 


욕망 이론

 

책_앙띠 오이디푸스.jpg   사람은 무엇인가를 욕망한다. 권력을 갖고 싶다는 욕망,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무엇을 이루겠다는 열정, 성적 충동, 정의를 위한 희생, 성공하겠다는 욕심 등….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설정하고, 성취하고, 절제하며, 조정할 것인가에 고민한다. 이 욕망의 문제를 무의식의 차원에서 이해한 것은 프로이트(S. Freud 1856년?1939년)였다. 그는 인간을 성적 욕망의 주체로 보고, 성의 충동적 강렬함이야말로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실체이자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가족을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형성되고 작동되는 공간으로 보면서 억압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욕망을 설명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가족을 넘어서 사회의 구조 속에서 욕망을 분석함으로써 욕망의 사유를 한 차원 높였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어머니를 성적으로 강하게 갈구하던 아이가 남근기에 이르러 거세에 대한 공포를 겪어내고, 그것을 계기로 성적 정체성과 인격을 형성해 간다는 이론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철학의 세계에 끌어들인 라캉의 이론도 닮아 있다. 프로이트의 성(sex, 性)적인 <리비도(libido)>를 <언어구조학>으로 등치시키면 라캉의 정신분석이다. 라캉 이론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상상계’와 ‘상징계’로 변용된다. 어느 것도 구획되지 않는 연속성의 ‘상상계’에서 언어(기호)를 배움으로써 이름이 주어지고, 지칭하는 것들이 하나하나 생겨남으로써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주체가 형성된 아기는 엄마와의 연속적인 관계에서 강제적인 단절을 경험하면서 ‘상징계’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욕망의 결핍이 있다.

 

  이렇게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은 인간의 욕망이 결핍으로부터 비롯되고 인간의 의식적 행동의 기저에는 무의식적인 갈망이 있다는 것. 욕망이란 늘 채워지지 않지만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그것이 이 두 정신분석학자들의 생각이었다. 인간은 상징계 안에서 채워지지 않는 타인의 욕망을 쫓아 의사, 변호사가 되고자 하고, 대통령, 장관을 갈구한다. 그러나 누구나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하며 여기에서 결핍이 생기며, 이 결핍은 병적 증후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이론을 전면적으로 반박하고 나선다. 이들은 프로이트, 라캉에 대한 반박을 가족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왜 욕망의 메커니즘을 좁은 가족 안에서만 보며, 욕망을 성적인 개념으로만 보느냐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개념을 이른바 '가족 드라마(family romance)' 안에 가둬 두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혁명적 사유 안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욕망을 당나귀 눈 앞에 걸어둔 당근처럼 쫓고 쫓아도 먹을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 욕망이란 끝없이 분출하는 ‘생명력’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conatus)와 닮아 있다. 들뢰즈, 가타리의 이론에 의하면 욕망은 기표를 바꿔 놓기도 자유롭게 가지고 놀기도 하며, 기표들의 체계에 저항하고 구멍을 내고,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 또 해체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

 

  서구 철학사에서 욕망은 부정적인 것이며 결핍이라고 여겨 왔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다르게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욕망이 결핍과는 무관하다고 보았다. 또한 욕망은 무의식적 에너지의 능동적 흐름이며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생산하는 긍정적인 힘이라고 생각했다. 욕망은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무의식이므로 사회는 이를 자유롭게 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만 권력을 가진 자는 늘 타인의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고 순응시키는 쪽으로만 전략을 수립해 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기에 주목했고 이러한 욕망의 통제 방식을 <코드화>6)라고 부르며 사회 체제가 갖는 문제점을 설명하였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Anti-Oedipus)>에서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달리 억압과 순응의 구조가 사회를 구성하고 그것이 생산의 힘으로 작동된다고 보았다. 달리 말하면 욕망을 억압하고 순화하는 가족은 가부장제의 폭력적 힘이 작동하는 파시즘의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욕망의 생산성에 주목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문제를 사회에 적용해 사유했다.

 

  들뢰즈의 욕망을 두고 “그것은 도처에서 작동한다. 때로는 순조롭게 기능하고 때로는 중단되면서 다시 시작한다. 그것은 숨을 헐떡이고 달궈지고 먹어 치운다. ... 그것은 기계5)”라고 말한다. 욕망이 그 자체로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무의식이며 긍적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이 힘들 사이의 관계일 뿐이라고 정의한다. <힘에의 의지>는 외적인 힘들 사이의 관계를 지시하는 기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욕망은 항상 무언가를 생산하기 때문에 생산은 항상 ‘욕망하는 생산’이라고 말한다. 즉,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이란 모든 개체들이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 즉, <힘에의 의지>이며, 모든 개체는 모두 권력의지를 갖고 있는, 무언가를 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는 ‘욕망하는 기계’라는 것이다. 그는 욕망을 ‘강도를 가진 기계적 조립’이라고 부른다.

 

책_감각의 논리.jpg  그는 또한 아방가르드 시인이자 극작가인 아르토의 ‘기관 없는 신체’라는 용어를 차용해 <기관 없는 몸체(body without organs)>라는 용어로 ‘욕망이 작동되지 않는 기계’를 설명한다. ‘기관이 없다’는 것은 욕망이 신체 위에 등록되지 않은 상태, 따라서 강도가 0(zero)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쉬운 예로, 식욕이 없다면 입은 <기관 없는 몸체(body without organs)>가 되고, 욕망이 생기고, 욕망이 등록되면 입이 먹는 기관, 즉 <욕망하는 기계(desiring machine)>가 된다.
 
 이러한 그의 욕망은 프로이드나 라캉의 욕망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들뢰즈에게 있어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생산이다. 프로이트 식의 욕망이 표상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내부에서 치환될 뿐인데 비하여 들뢰즈의 욕망은 표상을 알지 못하고, 사회적 관계 전체에 투여된다.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의 개념은 결핍이나 결여로 개념화하는 모든 전통적 관점을 거부하는 무의식적 에너지의 능동적 흐름이다. 욕망을 상실된 대상이나 결핍에 대한 수동적 반작용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생산하는 능동성이며 작용이다. 그러나 욕망은 무목적성과 자동결정성과 같은 기계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생겨난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은 욕망을 지향하는 기계라는 뜻과 함께 욕망으로 움직이는 기계라는 뜻을 모두 포함한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호두를 까는 기계와 같이 아무런 목적이나 의미도 없이 그저 욕망하고 성취할 뿐이다. 욕망은 원시공산주의시대, 전제군주시대, 자본주의 시대의 영토를 구획하고 실현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부족을 이루며 생활했던 원시 사회부터 욕망은 통제되기 시작한다. 코드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인 셈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다양한 욕망의 흐름을 각각에 어울리는 코드로 통제하는 방식이며 통제의 중심이라 할 만한 게 없는 시기이다. 욕망을 본격적으로 통제하게 되는 시기는 고대 사회이다. 여기서는 왕이 국가를 지배하며 이를 중심으로 욕망이 통제된다. 이것은 하나의 강력한 코드 아래에 다른 모든 코드들을 종속시킨다는 의미에서 ‘초코드화’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초코드화 사회는 왕권이 붕괴되고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욕망을 다스리는 방식이었다.

 

  현대 사회는 왕이 사라지고 코드화의 중심이 없어짐으로써 다양한 욕망이 자유롭게 충족될 수 있는 탈코드화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고대 사회의 왕의 역할을 자본이 대신하며 이를 중심으로 욕망이 통제된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는 오히려 어느 사회보다도 강력한 초코드화가 이루어진 사회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는 겉으로는 이전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듯 보이나 실상은 자본에 의해 욕망이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상품생산과 이윤추구만을 강요하므로 인간 내면의 다양한 욕망을 충족하기 어렵다. 대부분 인간의 욕망은 자본을 향한 것이거나, 자본으로 성취 가능한 것이거나, 자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들이다. 근대의 인류는 자본의 감옥에 갇혀 버렸으므로 자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이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욕망들이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에만 편중됨으로써 내면의 다양한 욕망들은 폐기되거나 억압될 수밖에 없다. 기계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코드화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사회 체제의 변화를 설명하였고 욕망이 갖고 있는 능동성과 생성의 에너지가 상실되는 현상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제약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코드화로부터 벗어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노마디즘’이다. 노마디즘은 주어진 코드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것, 창조적인 것을 찾아나서는 유목을 말하며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태도를 뜻한다.

 


리좀(Rhizome) : 본질철학과 주체철학의 전복

 

책 천개의 고원.jpg   들뢰즈와 가타리가 창안한 개념인 리좀(Rhizome)이란 개념은 극한의 실천적인 개념이다. 지금까지의 서양적 사고인 본질철학과 주체철학을 해석하고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서 리좀적 사고의 실천을 강조한다. 리좀은 철학상의 하나의 개념을 창조하는 것을 넘어, 사고를 실천하는 양식 ?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좀’은 뿌리의 줄기를 의미하며 뿌리와는 구별된다. 리좀과 가장 확실하게 대비되는 것이 나무이다. 들뢰즈 ? 가타리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서양의 사고방식은 나무를 모델로 삼아왔다. 나무와 뿌리를 모델로 하는 사고양식에는 항상 중심(초월적인 시점=신)이 존재하고, ‘그리고…그리고…’로 이어지는 연속성의 논리가 지배한다. 정신분석학 ? 언어학 ? 계보학 ? 이원론에서도 드러나듯, 서양의 지식을 지탱하는 것은 이런 나무 형태의 사고라고 들뢰즈 ? 가타리는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가치에 대한 다양한 사고와는 다르다. 나무 형태의 사고에도 다양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다양성은 중심을 가진 다양성이었다. 리좀은 다양성으로부터 1을 빼는 것, 즉 n-1의 다양성이다. 그래서 리좀은 중심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다. 항상 중간, 사물의 틈, 존재의 사이, 간주곡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창안한 개념인 ‘리좀’은 대나무나 잔디, 고구마, 감자, 토란 등의 뿌리줄기처럼 위계를 알지 못 하는 수평적 연결의 상이다. 나무에는 뿌리, 줄기, 잔가지, 잎 그리고 꽃과 열매가 있다. 나무는 좌우대칭의 잘 짜여진 구조이고 질서정연한 형태다. 근대사회는 수목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군대처럼 질서화되어 있고 피라미드처럼 위계적이다. 이 수목구조와 반대의 개념이 ‘리좀’ 구조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근대사회와 이성주의를 비판하는 개념으로 리좀을 차용했다. 동시에 그들은 ‘수목구조’라는 개념에 함의된 근대의 과학, 제도, 권력, 정주, 자본, 제국, 합리, 이성 등을 해체하는 한편 새로운 사유의 틀이 필요하다고 보고 ‘리좀’에 다원적 무질서와 예측불가능의 우발성을 삽입했다. 이런 사유로부터 탄생한 리좀은 ‘망상조직과 같은 다양체’이며 여러 특질을 가진 다질성의 복합체다.

 

  수목구조는 모방과 동일성에 대해서 하나의 이념형, 원형이 있고 그것을 모방해서 유전적 방식으로 나눈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아들이 또 아들을 낳고, 이런 식으로 내려가는 유전적 계열이다. 그러나 리좀구조는 수유저적 계열과는 다른 수평적 네트워크의 개념이다. 서구 근대철학이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 때, 혹은 존재론적 근원을 상정할 때, 세상은 선형적(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근원과의 유사성을 준거로 평가되고 위계화된다. 들뢰와 가타리의 사유는 이런 근원을 파기하고, 근대적 주체를 파기한다. 이제 세계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場)으로서, 관계들이 펼쳐져 있는 면(面)으로서 이해된다.

 

  리좀은 여러 존재들이 복잡하게 접속되면서, ‘그리고’를 만들고 외적으로 부과되는 억압적 코드들로부터 탈주하는 장(場)이다. 사물들 사이에서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사이들’은 늘 변해간다. 혼돈서질서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이런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시키는 것,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것, 이 사유가 ‘리좀(rhizome)’이다.

 


노마디즘(Nomadism)

 

  노마디즘(Nomadism)는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살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노마드, Nomad)>에서 나온 말이다. <유목주의>라고도 한다. 들뢰즈(Gilles Deleuze)가 1968년 발표한 <차이와 반복>이라는 저서에서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철학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기존의 가치나 철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찾는 것을 뜻하며 학문적으로는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탐구하는 것을 뜻한다. <노마드(Nomad)>는 사전적으로는 '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말이지만, 공간적인 이동뿐 아니라 특정한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가며 창조적인 행위에 바탕을 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들뢰즈는 노마디즘을 영토화(territorialization),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 재영토화(reterritorialization)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영토란 일반적으로는 동물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는 장소를 말한다. 호랑이나 늑대, 멧돼지나 개들, 어떤 조류들은 자신의 분비물이나 냄새, 소리 따위로 어떤 장소가 제 구역임을 선포하고, 다른 동물 개체가 그 장소 안으로 들어왔을 때 가차 없이 공격적인 행동에 나선다. 이것을 <영토화 개념>이라고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영토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탈영토화>라고 한다. <탈영토화>해 다른 곳에 다시 영토를 만드는 것을 <재영토화>한다. 들뢰즈는 영토화의 개념을 공간적인 이동뿐 아니라 사유와 삶의 방식으로까지 확장했다.

 

  서양란은 말벌을 본뜨면서 탈영토화하고, 말벌은 이 이미지 위에서 재영토화를 이룬다. 말벌과 서양란 상호간의 모방은 ‘미메시스, 의태(擬態), 속임수’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서양란의 말벌 되기, 혹은 말벌의 서양란 되기는 서로 간에 탈영토화하면서 동시에 재영토화를 꾀하는 운동들이다. 탈영토화의 여러 운동과 재영토화의 여러 과정은 끊임없이 가지를 뻗고 또 서로를 받아들인다. 서양란은 말벌의 이미지를 만들고 말벌을 본뜨면서 탈영토화하지만, 말벌은 이 이미지 위에서 재영토화된다. 한편 말벌은 서양란의 생식 장치의 한 부분이 됨으로써 탈영토화되기도 하지만, 서양란에 꽃가루를 옮김으로써 서양란을 재영토화한다.

 

  이처럼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는 서로 쌍을 이루는 개념으로, 탈영토화는 하나의 구조나 체계를 벗어나는 것이며, 재영토화는 그 벗어남이 새로운 구조나 체계로 다시 나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영토는 생산이 이루어지는 환경을 말한다. 영토는 생산에 불가결한 조건이지만, 욕망의 흐름은 끊임없이 새로운 접속, 새로운 환경을 향해 뻗어나가는 경향이 있다. 주어진 영토의 경계를 항상 벗어나려는 운동이 탈영토화인데, 이는 다른 한편에서 새로운 영토의 형성, 즉 재영토화를 예비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개념들을 탈코드화(decoding)와 재코드화(recoding)의 다른 명칭으로도 사용한다. 코드(code)는 정보의 전달과정에서 그것을 변환하고 해독하는 규약 혹은 규칙이다. 코드들은 신체에 포획되고 고착되어 일정한 불변적 질서로서 욕망의 흐름을 통제하는데, 이것을 <코드화(encoding)>라고 부른다. 반면 끊임없이 코드를 벗어나려 하는 분열적 흐름은 <탈코드화>라고 부른다. 코드화 혹은 영토화는 욕망의 흐름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과정을 의미하고, <탈코드화> 혹은 <탈영토화>는 억압과 통제를 벗어나 탈주하려는 흐름을 뜻하며, 이러한 탈주의 흐름을 포획하여 다시 억압하고 통제하는 매커니즘은 <재코드화>로 불린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코드화와 영토화를 동의어처럼 사용하기도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욕망을 통제하는 규칙이나 규범은 <코드>, 통제가 이루어지는 환경이나 제도는 <영토>로 구별된다.

 

  탈영토화 또는 탈코드화된 욕망의 흐름들을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고착된 사회적 구조에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탈주선(Lines of Flight)>이라고 부른다. <탈주선>은 <탈영토화>의 통로로서 기능하며, 무한한 분열증식으로 새로운 욕망의 흐름과 그 대상을 창조해나가는 역동적인 힘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탈주선을 타고 다른 양식으로 뜻밖의 형태로 언제라도 나타날 준비를 하는 유랑민을 노마드(nomade)라 부르며, 마조크, 프루스트, 카프카 등을 노마드에 포함되는 작가로 평했다.

 


  “자기 고유의 지층 위에서 하나의 유기체는 탈영토화된다. 자신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면서 동시에 자신을 외부와의 우연적 관계들의 집합 속에 내어 놓는 내부 환경을 더 많이 포함하면 할수록 더욱 더 탈영토화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발전의 정도들은 상대적으로만, 그리고 속도들, 관계들, 미분적 비율들의 견지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탈영토화를 하나의 완전히 긍정적인 역량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탈영토화는 자신의 정도들과 문턱들(겉지층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항상 상대적이고, 하나의 이면을 갖고 있으며, 재영토화 안에 하나의 보완성을 갖고 있다. 외부와의 관계에 의해 탈영토화된 하나의 유기체는 자신의 내부 환경 위에서 반드시 재영토화된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새물결, 2003) 중에서

 

 

  ... 정착민은 정해진 한 곳에 붙박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유목민은 한 곳에 붙박히지 않고 여러 곳을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이지요. 노마디즘, 혹은 유목주의란 한마디로 하나의 가치, 하나의 스타일, 하나의 영토에 머물지 않고 반대로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탈영토화 운동 속에서 사는 방식을 말합니다. ‘나의 전공은 사회학이야, 저건 나의 전공역이 아니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하는 식의 태도는 하나의 영토에 머물러 살아가는 전형적인 정착민의 태도지요. (중략) 노마디즘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거나 거기에 자리잡는 태도(재영토화)가 아니라,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디든 항상 떠날 수 있는 태도(탈영토화)를 말합니다. 즉 그것은 재영토화가 아니라 탈영토화에 의해 정의됩니다. 재영토화하기 위해 탈영토하는 것이 아니라, 탈영토의 운동 안에서 잠정적으로 재영토화하는 것이라 말해도 좋겠습니다.

 

  이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점과 선의 관계로 구별합니다. 사실 정착민도 이동하며, 유목민도 멈추기 때문에 이동이나 탈영토화를 유목민에 대응시키고 정지나 재영토화를 정착민에 대응시키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정착민은 예컨대 이사를 가거나 출장을 가는 사람처럼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이동합니다. 유목민 역시 사막의 대상들처럼 오아시스를 찾아 이동하지만 그것은 이동하는 궤적 가운데 통고하는 점에 불과하며,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사 가거나 출장 가는 사람이 목적지를 바꿀 수는 없지요. 어떤 경로를 취하든 목적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동이 선을 그리고, 멈추는 곳이 점으로 표시됨을 안다면, 정착민의 경우에는 선이 점에 종속되어 있는 반면, 유목민은 점이 선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활동을 조직하는 방식에서도 양자는 구별됩니다. 정착민은 영토적으로 조직됩니다. 땅을 소유하거나 당에 긴박되는 형식으로 정착민은 조직되지요. 가령 중세의 농민들은 토지에 매여 있었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영주들도, 호족들도 영토를 기반으로 자신의 ‘식솔들’을 조직하며, 영토적으로 구별되지요.

 

  그러나 유목민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동하며 사는 것이 그들의 삶이기에 영토를 할당하거나 소유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합니다. 나아가 사람이나 동물의 이동의 흐름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말뚝을 박고 드나들 수 없는 울타리를 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유목민이었던 북미 인디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울타리를 치는 유럽의 이주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였지요. 하지만 유목민 역시 활동이 조직되어야 하기에, 개체들을 집합적 단위로 묶는 조직의 방식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영토적 조직 방식 대신 번호적 조직 방식을 사용합니다. 10개 가구를 묶어서 10호대로 만들고 아무 숫자나 부여합니다. 마치군대에서 9소대니 5중대니 하듯이. (중략)

 

  정착민과 유목민은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에서도 구별됩니다. 가령 유목민의 궤적은 정해진 경로를 가는 경우에조차 하나의 길을 그대로 밟아가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옆으로 벗어나면서 가고, 사정에 따라 가지 않던 길로 가기도 하며, 그래서 예정과 다른 엉뚱한 곳에 이르기도 합니다. 평면 위의 물이 어느 방향으로나 흘러갈 수 있듯이, 미리 정해진 하나의 길이 없습니다. (중략) 모든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공간. 이것이 바로 유목민의 공간이지요. 이를 ‘매끄러운 공간’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정착민은 논사를 짓기 위해서든, 수해를 막기 위해서든 아무 곳으로나 흘러가는 흐름을, 범람하는 물의 흐름을 그대로 방치하지 못합니다. 홈을 파고, 수로를 만들어 그 홈을 따라 흘러가게 합니다. 사람들의 흐름이나 삶의 흐름 역시 동일합니다. (중략) 길에다 돌을 깔고 테두리를 세워 도로로 만들지요. 울타리를 치고 홈을 파서 정해진 시점과 종점을 잇고, 그 홈을 따라서만 사람들이나 삶이 흘러가게 만듭니다. 막히면 그대로 고이고 멈추고 마는 도시의 도로들이 그렇지요. 시위대의 흐름을 정해진 도로로 제한하는 경찰의 역할, 사고의 흐름을 정해진 ‘도로’로 제한하는 학자들의 역할, 삶의 흐름을 먹고 살기 위한 노동으로 제한하고 포섭하는 자본가들의 역할, 이 모두가 흐름의 범람을 막기 위해 홈을 파는 메커니즘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흐름을 통제하기 위한수단으로 만들어진 공간을 ‘홈 패인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목은 떠돌면서 사는 방랑이나 방황이 아닙니다. (중략) 칼 하나 들고 강호를 넘나들고 사막을 돌아다니지만 마음은 언제나 그 여자가 있는 곳에 매여 있는 <동사서독>의 구양봉은 떠돌고 방황할 때조차 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유목민이 아닙니다. (중략) 유목민과 다 쓴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이주민을 혼동해선 곤란합니다. 오히려 유목민은 사막이나 초원처럼 불모의 땅이 된 곳에 달라붙어 거기서 살아가는 법을 창안하는 사람들입니다. (중략) 새로운 가치의 창안. 새로운 삶의 방식의 창조, 그것을 통해서 낡은 가치를 버리고 낡은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탈주선을 그리는 것, 그게 바로 노마디즘의 요체입니다. (중략)노마디즘에서 결정적인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즉 새로운 차이를 만드는 것이고, 새로운 변이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

 

-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그린비, 2009) 중에서

 


  "신인류의 대안은 노마드의 세계에서 찾아야 한다. 그들은 불, 언어, 종교, 민주주의, 시장, 예술 등 문명의 실마리가 되는 품목을 고안해냈다. 반면 정착민이 발명해낸 것은 고작 국가와 세금, 그리고 감옥뿐이었다. (중략) 인간이라는 종을 탄생시킨, 생물체들의 그 엄청난 뒤얽힘은 이동성, 미끄러짐, 이주, 도약, 여행으로 이루어졌다. 인간의 역사가 노마드적인 것이 되기 훨씬 전에, 아메바에서 꽃으로, 생선에서 새로, 말에서 원숭이로 진화된 생명의 역사 자체가 이미 노마드적이었다."

- 자크 아탈리의 <호모 노마드> 중에서

 


 

註 ) ……………………………………………………………………………………………………………………………

 

  1) 액추얼(acture) :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

 

  2) 버주얼(virture) : 물리적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가상한 상태.

 

  3) 층(strate) : 동질적(同質的=homog?ne)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層)’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이 따로 구분되어 존재하게 될 때 ‘층화(層化, stratification)’가 성립한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 등 구분되어 존재할 때 지층(地層)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계층(階層)들이 성립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 그러나 경계선들이 무너지고 다질적(多質的, h?t?rog?ne) 조성(造成)이 이루어질 때, 사물들은 ‘탈기관체(脫器管體)’를 향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혼화면(混和面)’에 존재하게 된다. 층들이 혼화면을 향해 해체되기 시작하면 ‘탈층화(脫層化=d?stratification)’가 이루어진다.

 

  4) 기계(machinique) :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기계(機械)’는 ‘메카닉(m?canique)’과 구분된다. 메카닉은 일상 속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계이지만,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so?ma’에 해당하며, 궁극 실체인 물질이 어떤 형태로든 개별화된 모든 것를 가리킨다. 여기에 유기체도 포함된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더 나아가 관료조직, 자본주의 등도 ‘기계’다. 이 기계들의 배치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이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탈구축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층들을 향하기도 하고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기계적 배치. 즉 특정한 기계적 배치가 띠고 있는 활성화?역동화(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의 정도가 있다. 이 기계적 배치의 층화가 늘 세 종류로 나뉘어 파악된다. 저서 <천의 고원> 전체를 관통하는 구분이다. ①유기화(organization) 또는 조직화, ②기표화(signifiance)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해석’. ③주체화(subjectivation) 또는 예속주체화(assujettissement).

 

  기계적 배치는 층화의 방향에서 말할 때 생물학적-신체적으로는 ‘유기화’되며, 무의식적-구조적으로 말할 때 ‘기표화’되며, 의식적-사회적으로 말할 때 ‘주체화’된다. 우리는 바로 이런 신체, 바로 이런 기표(이름-자리), 바로 이런 주체가 층화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기관 없는 몸체>의 방향으로도 향한다. 이 때 우리의 신체는 “되기”를 통해서 탈구축(脫構築)되고, 우리의 기표는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의 이행 및 순환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고, 주체는 스스로에게 다른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된다. 그 극한에 이르면 모든 주체들을 귀속시킴으로써 ‘만인-되기’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5) 배치(agencement) : 사물이나 언표(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기계들’)은 일정한 영토성,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그리고 서로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일정한 배치(agencement)를 형성한다. 그러나 배치는 형성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해간다. 배치는 개별화된 사물(‘기계’)도, 언어적 구성물도 아니다. 배치는 유기적으로 배열된 전체도, 분산되어 있는 복수적 존재들도 아니다. 배치는 기계들과 언표들 각각이 또 서로 간에 접속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매우 역동적인(실체화되지 않는) 장(場)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라는 배치는 개별적인 사물도 견고하게 구성된 유기적 조직물도 추상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건물, 지우개, 칠판, 노트북 같은 기계들과 말하고 듣고 사유하는 담론적 코드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서 장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라는 배치는 사라진다. 그리고 뒤에 다시 반복된다. 선수들, 심판, 경기장, 관중 같은 기계들, 경기규칙들 등을 비롯한 코드들이 일정하게 접속해 장을 형성할 때 ‘야구경기’라는 배치가 성립한다. 경기가 끝나면 그 배치는 해체된다. 그러나 다시 반복된다.


  6) 코드화(Codage) : 사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되고, 일정한 언어적?의미론적 코드에 입각해 기능할 때 ‘영토성(territorialit?)’이 성립한다. 야구공, 배트, 글러브, 야구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등이 일정하게 배치되어 접속되고, 동시에 야구 규칙 및 스포츠 관람이라는 일정한 코드가 작동함으로써 ‘야구장’이라는 영토성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카리에 의하면 어떤 영토성, 어떤 코드도 생성을 완전히 닫지 못한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으며, 탈주선(脫走線, ligne de fuite)이 있다. 세계는 항상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일정한?고착적인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코드화(codage)’가 이루어 진다. 영토화는 배치와 코드화를 통해 ‘탈영토화(脫領土化, d?territorialisation)’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층화(層化)는 늘 ‘탈층화(脫層化)’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시 다른 영토에 접속되어 ‘재영토화’된다. 탈영토화는 다시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로 귀결된다. 그러나 영토화는 다시 탈영토화에 의해 누수하고 탈주한다. 생성, 즉 차이의 생성(차생, 差生, diff?rentiation)과 고착화의 변주가 들뢰즈가 인식하는 세계다.


  7) 분절(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 :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切片性)’이다. 분절화는 ‘잘라(分) 붙이(節)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도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된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각한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이들의 갯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잘라-붙임이기에 분절은 늘 이중분절이다. 저서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등),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등),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등)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8)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 : 수 세기 동안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은 서양 사상의 중심적 위치를 잡고 있었다. 이는 우주가 무생물인 돌로부터 시작해서 일차원적 순서에 따라 정렬되었다는 견해이다. 식물이 다음에 오고, 그리고는 동물, 사람, 천사, 최종적으로 신이 온다. 이것은 사람의 계급에 대해 매우 세부적으로 말한다. 물고기 위에 양서류, 그 위에 파충류, 그 위에 원숭이, 그 위에 사람을 줄세운다.  이 견해는 심지어,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의 (미생물의) 발견 훨씬 이전에도, 가시적이고 생명있는 세계와 무생물과의 가운데에 있는 비가시적 세계까지도 예측했다. 비록 진화론자들은 여기에서 초자연적 정상(summit 신)을 제거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견해는 아직도 우리와 함께 한다. 존재의 사슬 개념은, 비록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들로부터 파생되었으나, 신플라톤주의 플로티누스에 의해 처음으로 체계화되었다.

 

  이 용어는 우주의 3가지 보편적 특징인 충만성·연속성·계층성을 가리킨다. 충만성의 원리는 어떤 가능한 존재도 자기모순적이지 않는 한 현실적이기 때문에 우주는 존재의 다양성을 최대로 보여주는 '가득 찬' 것임을 뜻한다. 연속성의 원리는 우주가 무한한 계열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형태는 자신과 이웃하는 형태와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속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선형적 계층성의 원리는 이 계열이 가장 저급한 유형부터 최고의 완전한 존재 곧 신에 이르는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존재의 사슬이라는 생각은 그 구성 개념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왔지만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가 처음으로 체계화했다. 플라톤은 〈국가 Republic〉에서 '선의 이데아'를 영원하고 불변적이며, 말할 수 없이 완전하며 보편적 욕구대상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티마이오스 Timaeos> 에서 데미우르고스 사상과 융합되어 있다. 데미우르고스는 '선한 존재이고 선한 존재는 어떤 다른 것이 생기는 데 대해 시기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변화의 세계를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속체의 정의를 소개했으며, 존재의 다양한 계층을 지적했다. 그리하여 플로티노스에 이르면, "일자(一者)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갖지 않으며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완전하다. 뿐만 아니라 일자는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 흐르며, 그 과잉으로 말미암아 타자(他者)를 만들어낸다"라고 하는 〈엔네아데스 Enneads〉의 주장으로 이어진다. 일자로부터 다자(多者)가 생겨나는 이 과정은 가능한 한 가장 다양한 종류의 존재가 그 하강 계열에서 실현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플로티노스와 이후의 저술가들은 존재의 등급이라는 생각에 힘입어 악의 존재를 선의 결여라는 의미로 설명할 수 있었다. 이 생각은 낙관론을 뒷받침하는 논증도 제공했다. 즉 최고의 완전자를 제외한 모든 존재는 어느 정도 불완전하거나 악하므로, 그리고 전체 우주의 선함은 그 충만성에 있으므로, 최선의 가능한 세계란 가능한 가장 다양한 존재와 따라서 모든 가능한 악까지 포함하는 세계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9세기에 이르러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9) 다양체(multiplicit?) : 배치 개념은 맥락에 따라 ‘다양체(多樣體)’로 부를 수도 있다. 다양체(multiplicit?)는 배치와 유사한 개념이지만, 수학적-자연과학적인 보다 복잡한 맥락을 함축한다. 다양체는 개체도, 개체들의 단순한 집합도, 유기적 전체도, 추상적 존재도 아니다. 다양체는 질적으로 상이한 존재들이 접속, 일탈, 통합, 분지(分枝)를 통해 역동적으로 형성하는 장(場)이다. 다양체는 항구적 존재도 일시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지속되기도 하지만 늘 역동적으로 변해간다. 때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야구 경기’도 사회마다 지역마다 시간에 따라 다양체를 만든다. 전통 존재론(개체들, 유기적 전체, 추상적 존재 등)으로 포착되지 않는 존재들, 그러나 우리 삶의 도처에서 얼마든지 발견되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개념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새롭게 제시된 존재가 ‘다양체’다. ‘배치’ 개념 및 ‘다양체’ 개념은 분절화, 절편성의 선들과 탈주의 선들, 층들과 탈층화 운동, 영토성들과 탈영토화 운동 등을 모두 보듬는 개념이고 따라서 보다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 달리 말해 배치와 다양체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배치와 다양체가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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