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44] 질 들뢰즈와 팰릭스 가타리

by 이우 posted Apr 0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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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는 대학에서 철학사를 전공한 철학자이며, 가타리는 의과대학을 나와 실험적인 정신분석을 하던 정신의학자였다. 들뢰즈가 니체와 스피노자, 베르그송, 에피쿠로스 등 생성을 사유하고자 했던 여러 철학자들을 좋아한 니체주의자였다고 한다면, 가타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했고 68년 6월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던 맑스주의자였다. 이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68년 혁명* 전후였다. 이 시기는 1960년대를 풍미하던 구조주의 물결이 퇴조하면서 푸코나 라캉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구조주의로 전향하던 시기였다. 들뢰즈는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이에 주목했던 니체주의자였기 때문에 구조주의자가 되긴 힘들었고, 표상에서 벗어난 사유를 꿈꾸던 스피노자였기에 언어학이나 기호학, 혹은 정신분석학에 빠져들긴 힘들었다. 라캉의 영향 아래 있던 정신의학자 가타리는 정신분석학의 한계와 난점에 대해 먼저 주목했고, 구조주의적 관념에서 자유로왔다.

 

  1969년 전투적인 정신의학자이자 정치적 투사이기도 한 펠렉스 가타리와 만나 들뢰즈는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갔다. 이른바 ‘욕망의 형이상학’이라 불리는 활기찬 사유를 <안티오이디푸스>(1972)에서 전개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80년에는 그 속편이라고 할 <천의 고원>에서 이른바 ‘노마디즘’이라는 새로운 실천철학을 제시했다. 오늘날의 철학은 들뢰즈 사유 안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21세기 전반을 내내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의 사유는 우선 철학사를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동안 타성에 빠졌던 철학을 새로운 활력 있는 담론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의 사유는 새로운 형태의 유물론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그로 인하여 앞으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독해와 정교한 유물론의 전개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남긴 ‘노마디즘’의 사유는 오늘날 네그리와 하트의 유명한 저작인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현대의 핵심적인 정치철학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노마디즘과 코뮤니즘의 관계를 규명해 나가면서 21세기의 실천철학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사유는 특히 예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건축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 중에 있다.

 

  들뢰즈는 푸코, 데리다와 더불어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들뢰즈는 철학사에 대한 방대하고도 독창적인 독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사유 틀을 만들어 갔다. 들뢰즈는 기존의 철학사 이해와는 상반되는 독해를 내놓음으로써 철학의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둔스 스코투스, 데카르트에 대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에 대한 니체와 베르그송, 현상학과 하이데거에 대한 구조주의와 푸코 등 들뢰즈의 독특한 철학사 독해를 통해서 철학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의 결실은 <차이와 반복>(1968)과 <의미의 논리>(1969)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들뢰즈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유의 길을 모색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맞서 수학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나 들뢰즈가 강하게 논박한 인물인 헤겔과 라캉을 기반으로 반(反)들뢰즈적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지젝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사유와 들뢰즈의 사유의 대결이 오늘날 철학적 사유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1995년)

 

들뢰즈_s.jpg    들뢰즈는 1925년 1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엔지니어였고, 형은 독일군 점령기간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기차에서 사망했다. 그는 소르본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48년 철학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한다. 리옹대학 강사를 거쳐서 1970년 파리 제8대학 교수가 되었다. 대학에서 철학·문학·과학을 강의하고 1987년 퇴임한 뒤로 줄곧 좌파 이념에 힘을 보태는 집필과 방송활동을 이어갔다. 실존주의를 비판하고 헤겔적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에 도전했다. '철학자 중의 철학자', '20세기 형이상학의 완성자' 등의 평가를 받는다. 푸코는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흄에 대한 책인 <경험주의와 주관성>을 낸 이후 <니체와 철학>을 내기까지 오랜 침묵을 지키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는 왕성한 저작 활동을 보여 <칸트의 비판철학>, <마르셀 프루스트와 기호>, <베르그송주의>, <자허 마조크 소개>, <차이와 반복>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의미의 논리>,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 <영화 1. 운동-이미지>, <영화 2. 시간-이미지>, <굴곡.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페리클레스와 베르디>, <대담 1972∼1990> 등을 썼으며, <안티 오이디푸스>, <카프카. 소수파의 문학을 위하여>, <천 개의 고원>,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을 필생의 친구 펠릭스 카타리(1930∼1992)와 함께 썼고 <담화> 등의 글을 다른 이들과 함께 썼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가타리와 함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펴내, 자신의 철학 사상에 대한 총정리를 했다.

 

  질 들뢰즈의 사유는 철학과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다. 니체―베르그송―스피노자로 이어지는 철학사 연구가 그의 영토를 표시하는 위도라면, 프루스트―카프카―프란시스 베이컨으로 이어지는 예술 비평이 그에 상응하는 경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존재의 일의성의 관점에서 재현(표상)주의를 비판하고, 생성과 긍정의 의미를 새롭게 해명했다. 들뢰즈는 가타리와의 만남 이후에 이러한 사유의 영역을 확대해,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관계 설정에 주력했다. 이들은 라캉주의가 다양한 관계를 초월적 도식으로 환원한다고 비판하고, 다원적 욕망과 생산의 내재적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고찰했다.

 

  1995년 갑작스럽게 들뢰즈는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프랑스 언론에서는 들뢰즈의 삶보다 들뢰즈의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들뢰즈는 1991년 이후로, 적극적인 집필 작업이라거나 사회활동을 하기가 어려웠고, 80년대 말에 텔레비전 방송에서 영화에 관한 프로그램을 조금 진행한 것이 사회적 활동의 거의 마지막이었다. 프랑스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파리 고등사범과 같은 일류대학을 나온 것에 반해 들뢰즈는 별로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 했다. 들뢰즈 철학은 프랑스 주류 철학에서 등한시되었다. 프랑스 사회의 ‘엘리트주의‘’를 생각해 볼 때, 8대학 출신과 고등사범 출신들의 격하가 심해 들뢰즈는 사망 직후에도 프랑스에서는 그 존재성이 희미했다. 지금 들뢰즈가 획득한 지위는 다른 어떤 외부적인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유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도 판단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 1930년~ 1992년)

 

가타리.jpg     파리 북서부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청년사회주의 단체에서 활약했다. 나중에 의학과 철학을 공부했던 대학생 시절에도 이러한 정치활동은 계속 되었다. 1953년 이래 라캉이 주도했던 세미나에 참여하였고, 1962년~1969년에는 라캉과 공동 작업을 한 뒤 라캉이 결성한 파리 프로이트 학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분석이 지닌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감지하면서 라캉에 비판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는 초기의 횡단성 개념을 통해 구조주의를 공격해나가던 것에서 점차 분열분석 방법을 통해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실천을 모색해갔다. 68년 혁명 이후 대중들의 다양한 욕망의 분출에 주목하고 기존의 정치가 가졌던 억압적 방식을 비판하고 욕망의 정치학을 제기하였으며, 국가 장치를 중심으로 한 사고와 실천을 기계적 작동과 욕망 해방이라는 틀로 바꾸어 나갔다.

 

  1969년 들뢰즈를 만난 이후 가타리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종합을 시도하였고 비(非)라캉적인 용어들을 가지고 사회정치적 무의식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횡단성 개념을 통해 구조주의를 공격해 나갔고 점차 분열분석방법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실천을 모색해 나갔다. 68년 혁명 이후 대중의 다양한 욕망분출에 주목하고 기존의 정치가 가졌던 억압적 방식을 비판하고 욕망의 미시정치를 제기하였으며, 국가 장치를 중심으로 한 혁명적 실천을 기계적 작동과 욕망해방이라는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려고 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에콜로지 운동*에 가담해 분자혁명적인 사고를 에콜로지적 틀 속에서 확장해나갔다. 사회 에콜로지와 정신 에콜로지를 강조하면서, 이것들을 윤리-정치적으로 접합하는 고리로서, 그리고 철학적 실천 개념으로서 에코소피아를 제시하였다. 이 세 가지 에콜로지를 접합하여 사고함으로써 가타리는 자신의 궁극적인 핵심 주제인 '주체성의 생산' 문제를 색다르게 전개해 나갔다. 주요 저서로 <정신 문석학과 횡단성>, <분자의 혁명> 등이 있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저로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천개의 고원> 등이 있다.

 

  가타리는 흔히 '투사'로 묘사된다. 그는 실제로 활동적인 사람이었고, 부딪쳐 본 다음에 그 깨달은 것들을 개념으로 만들고 그 경험들을 확장시키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들뢰즈도 이를 언급한다. 내가 피뢰침이라면 가타리는 번개다, 나는 번개를 받아서 썼다'라고. 개념을 정리하고 체계화한 사람이 들뢰즈지만, 그 개념들의 영감에 해당하는 것들과 구체적인 영역에서의 접근은 가타리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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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년 혁명

 

  프랑스 파리 교외의 낭테르에 있는 파리 대학 분교의 문학부를 1968년 5월 3일 대학 당국이 폐쇄했다. 1967년 11월부터 이 학교에는 시설 개선을 둘러싸고 급진파 학생과 대학 당국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1968년 3월 22일 '빵강 머리 다니'라는 애칭으로 일컬어지던 콩방디를 지도자로 하는 학생 그룹이 대학 당국의 금지령을 어기고 학내 집회를 열었고, 이에 대해 대학 당국은 경찰을 불러들여 유혈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5월 2일에 분교를 점거했고 이것이 분교 폐쇄로 이어졌다.

 

  콩방디의 처분을 둘러싼 조사가 본교(소르본)에서 열렸지만, 본교 당국은 다시 경찰을 불러들였다. 항의하는 무리에 마침내 일반 학생들까지 가세해 경찰과 충돌했다. 학생 약 600명이 체포되고 본교가 폐쇄됐다. '3.22'운동의 결과, 1907년에 결성된 '프랑스 학생 전국동맹(UNEF)'이 지원을 강화했고, 학생 시위도 더욱 격렬해졌다. 5월 11일 오전 2시, 카르티에라탱 거리에는 학생 시위대와 경찰간의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학내 처우 개선 요구에서 비롯된 3.22 운동과 5.3운동은 학내 문제에 머물지 않았고 대학 교직원 조합, 노동 총동맹 들을 끌어들여 드골 정권을 뒤흔드는 전국 규모의 파업으로 발전했다. 이 시위로 드골 정권이 무너졌다. 

 

 

 

 * 에콜로지 운동(Ecology movement)

 

  에콜로지(Ecology)는 생태학을 말한다. 자연계의 생물과 무생물 또는 생물끼리의 상호작용을 하나의 전체적 시스템으로 포착한 학문이다. 에콜로지(Ecology) 독일의 동물학자 에른스트. H. 헤켈의 조어. 1866년 헤켈은 진화론을 배경으로 생물과 환경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을 제창하고 그리스의 오이코스(Oikos, 사는 곳, 거주지의 의미)라는 말을 채용하여 이를 생태환경을 연구하는 학문, 즉 에콜로지(Ekologie)라고 불렀다. 19세기 말에는 영어에서도 에콜로지(Ecology)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미국의 가정학자 엘렌 스왈로 리처드도 에콜로지라는 개념을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생태학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으나, 일반적으로 생물의 생활상태 및 생물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생물과학의 한 분야를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 에콜로지라는 원어를 그대로 쓸 경우 인간과 자연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도모하는 사회운동, 생활자세, 사상, 학술 연구 등을 가리키는 일이 많다. 사회운동으로서 에콜로지는 과학으로서의 생태학과 전혀 다른 것이지만. 생태계 구조에 관한 지식은 에콜로지 운동의 사상이나 구체적 활동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에콜로지의 본질은 '관계'로부터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개개의 생물, 무생물은 어떠한 경우든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관계의 망으로 연결되고 그 연결로 인하여 개개의 존재가 그 존재를 보증 받는다는 전체론적인 세계관이 기본이 된다. 즉, 관계야말로 개개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으며, 만물의 인식에는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이해를 빼놓을 수 없다는 의식이다. 바로 이 의식으로 부터 상호의존이나 공생같은 에콜로지의 종요한 원리가 나온다.

 

  즉, 인간은 물질적·정신적으로 자연환경 안에서 다양한 존재와의 관계로 생명을 유지해가는 것이며, 이 관계로부터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호의존이나 공생과 같은 원리는 인간과 자연환경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상호간에도 적용된다. 말하자면 에콜로지는 인간사회 내부에서도 반지배, 반착취, 반차별의 입장을 견지하며 자유, 평등, 자기실현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를 예리하게 비판하는 입장에 선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도,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도 모두 똑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인식이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개발·오염에 의한 여러 가지 환경문제, 차별·인간소외·빈곤·전쟁과 같은 다양한 사회문제를 모두 하나로 연결된 문제로 인식하여 개별 문제에 실제 대응하면서도 의식으로는 문제의 전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즉,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국면에 관여하는 전면적인 사회 변혁이 그 목표다. 이처럼 에콜로지는 경제성장주의, 경쟁원리, 거대 신앙이 지배하는 현대문명에 대신하는 의식으로서, 나 자신 이외의 다양한 존재(인간을 포함한)를 존중하고 이들과 연대한다. 또한 생명세계를 유지하는 시스템을 지속하고 거스르지 않는 생활, 사회 양상을 명확하게 실현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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