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43] 루이 베르그손

by 이우 posted Apr 0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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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jpg     앙리-루이 베르그손(Henri-Louis Bergson, 1859년 10월 18일 ~ 1941년 1월 4일)은 프랑스의 철학자다. 그는 1859년 10월 18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폴란드계 유태인인 아버지와 영국계 유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7남매 중 둘째,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젊어서 프랑스로 이민을 온 폴란드계 유태인으로 음악가였으며 모친은 영국인이었다. 베르그손은 모친을 통해 일찍부터 영어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작곡가였으나 그렇게 신통하지는 않아서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68년, 그가 9세 때에 프랑스에서 교육환경이 좋기로 유명한 고등학교, 리세 보나빠르트(Lycee Bonaparte)에 입학한다. 1869년 베르그손이 10세 되던 해에 가족이 모두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였으며, 어린 베르그손 혼자 파리에 남아 기숙사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생이었고 고등학교 때는 국내외의 경시대회에서 고전에서 불문학, 수학에 이르기까지 각종 분야의 상을 독차지했다.

 

  그는 한 마디로 말해 천재였다. 프랑스의 전국 학력경시대회에서 라틴어 작문, 영어, 기하학, 불작문, 수학에서 1등을 차지하였으며, 그 외 과목도 3등, 4등을 차지하는 등 전 과목에 뛰어났다. 1877년 수학 경시대회에서 제시된 그의 <파스칼의 '세 개의 원'에 대한 해법>은 다음 해 수학 연감(Nouvelles annales de math?matiques)에 실렸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집에서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고 칠판 앞에서 풀기만 하면 되는"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라슐리에의 <귀납의 기초에 관하여>를 열광에 차서 읽고 "철학에도 뭔가 '심각한s?rieux' 것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고" 철학으로 진로를 선회한다.

 

  베르그손은 19세 때 파리고등사범학교(?cole normale sup?rieure)에 입학한다. 고등사범학교는 인문학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프랑스의 영재들이 모이는 곳으로 샤르트르, 자크 데리다, 장 조레스 등 수많은 명사를 배출한 곳이다. 베르그손은 당시에 수석인 장 조레스에 이어 3등으로 학교에 입학했다. 22살에 철학 교수 자격시험(Agregation)에 2등으로 합격하여(3등은 장 조레스) 앙제 고등학교에 철학 교수로 발령된다. 후에 끌레르몽-페랑, 앙리4세 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수를 지냈다.

 

  33살 때인 1892년, 14세 연하인 루이즈 뇌뷔르제와 결혼한다. 이듬해에 외동딸인 쟌느가 출생한다. 그는 소르본느 대학 교수직에 2번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39살 때 고등사범학교 전임강사, 41살 때에 꼴레쥬 드 프랑스의 그리스-라틴 철학 담당 교수, 1904년에는 현대철학 교수가 된다. 이후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는 등 철학 교수로서 활발히 활동을 벌이게 된다. 1917년에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을 위해 윌슨 대통령을 설득하러 외교관으로 미국에 다녀오기도 한다. 그의 저서들은 매우 유려한 문체와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매우 높아, 주저중 하나인 창조적 진화등의 주저들이 수십쇄를 찍는 등 높은 판매량을 보이기도 했다.

 

  62살 때에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이듬해에는 현 UNESCO의 전신인 국제 지적 협력 국제위원회(CICI) 회원이 되었다. 8월에는 의장에 올랐다. 그가 63살 되던 해에 아인슈타인과 시간 개념에 대한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그의 철학을 돌이켜봤을 때 과학계와는 다툼이 불가피했으리라 여겨진다. <지속과 동시성>이 그 책이다. 이어 그가 68살 때인 1928년에는 그간의 공로와 꾸준히 찬사를 받아오던 문장력을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는 죽을 때까지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다가 1941년, 81살 때에 파리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사상

 

책_창조적 진화.jpg   그는 인간의 생명을 가장 중요시한 '생의 철학' 을 부르짖은 사람으로서, 그의 철학을 창조적 진화의 철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있다'는 것은 오직 우리들의 체험을 통한 경험이나 느낌으로만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또 현재라는 의식 속에는 과거나 미래도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변하는 현재의 시간이야말로 우주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과 사회에 관한 그의 관점 또한 '시간', '변화', '운동' 에 중점을 두고 재해 한 것이다.

 

  종교에는 고정적인 제도, 고로 폐쇄적이게 되는 종교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개방적 종교가 있다고 하여 후자가 필연적으로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도덕에 관한 관점 또한 기존의 고정되어 있는 전통적 도덕의 체계보다, 시시각각 움직이고 계속 변화되어 가는 원칙을 가진 유기체적 도덕의 우수성을 옹호하였다. 사회에 대한 관점에서도 그는 고정되고 닫힌 폐쇄된 사회보다는 변화되고 움직이는 '열린 사회'를 주장하였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열린 사회'라는 용어가 그에게서 빌려온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 사회철학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이라는 그의 마지막 주저에 서술 되어 있는데, 베르그손은 이 마지막 저서를 1932년, 그의 나이 73세 때 출판 하였다. 이때는 이미 <창조적 진화>가 출판된 지 25년이나 지난 후였는데, 이 책이 출판된 후 사람들은 이미 70대인 이 노철학자의 사유의 유연함이 청년 같음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엘랑 비탈(Elan vital, 약동)

 

  베르스송은 리세(고등학교)와 예콜 노르말(고등사범학교)에 다닐 때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고 과학의 기계론적인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기계론이란 자연현상과 인간의 사회현상을 기계처럼 돌아가는 법칙에 의하여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기계론자들은 이러한 법칙을 수학 공식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하고,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법칙이란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하는 걸 말하는데, 따라서 법칙은 시간에 관계없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은 바로 이러한 법칙을 탐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과학은 기계론적 사고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기계론에 심취했지만 공부를 할수록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마치 죽은 시체를 만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다른 방식으로 자연과 인간 사회를 바라볼 수 있을까를 연구했다. 그는 생명의 힘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새로운 사상의 핵심이 바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약동하는 생명'이다. '약동'이라는 말은 생기 있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이 <엘랑 비탈(Elan vital, 약동)>이 바로 진화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엘랑 비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그에게 생명이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힘이다. 법칙이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인 반면 생명은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을 만들어 낸다. 법칙은 예측 가능하지만 생명은 예측 불가능하다. 그러나 생명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면 시간이 매우 중요해진다. 시간이란, 생명의 지속.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뭔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법칙=예측가능=시간의 무가치
  생명=창조=예측불가능=시간의 가치

 

 

  그의 책 <창조적 진화>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 발전을 일으키는 힘이 바로 생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베르그손의 책 <창조적 진화>에서 창조는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의 반대가 아니라 어떤 것을 그대로 베끼는 '모방'과 반대 의미다. 진화는 '조금씩 변화하여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만화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베르그손_창조적진화.jpg


 □ 영향

 

책_물질과기억_한국판.jpg   플라톤 이후 2000년 넘게 이어져왔던 물질들의 "정지"를 전제로 한 존재론 위주의 철학적 담론을, 베르그손은 당대의 최첨단의 과학지식들을 흡수하려고 노력하여(그는 그의 저서 '물질과 기억'의 단 3페이지를 쓰기 위하여 병리학을 5년 동안 공부하기도 하였다) "운동"으로 전환시켜, 이후의 철학 사조들(화이트헤드, 들뢰즈 등)의 사상적 기원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학문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운동을 되도록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학문이라는 것은 일종의 분석 작업이고, '분석'이 가능하려면 동일률(자기동일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학문이 탐구할 대상은, 분석하기 이전과 이후가 동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탐구대상이 분석 과정중에 변화한다면, 분석의 의미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모든것은 매순간 계속 변하고 있고, 한순간도 정지가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면 학문은 불가능하다. 정지는 고대인들의 상식적인 경험에도 비추어 보아도 올바르게 보였고, 학문을 위해서도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플라톤 당대의 과학적 지식으로는 운동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정신과 물질의 잘못된 이원론을 그는 당대의 과학적 성취를 통한 근거를 통해 '정지'가 곧 인간 지성의 '영화적 메커니즘'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가상적 상태(예를 들어 세슘원자는 1초에 91억 9263만 1770번 진동한다)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재로 가정하여 '애초부터 풀 수 없게 만들어진 문제' 임을 밝히고, 이후의 철학적 주류 담론을 무려 2000년간 지속되던 하나의 환상, 곧 '정지' 에서 '운동' 으로, 또한 이것이 기반 하는 인식론의 주제를 '공간' 에서 '시간' 으로, 생명현상의 파악 과정에서는 그 근거를 '양'에서 '질'로 바꿔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