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41] 이데올로기 : 마르크스 Vs 알튀세르

by 이우 posted Apr 0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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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_알튀세르.jpg


 

  이데올로기(독일어: ideologie, 영어: ideology)는 사람이 인간 ·자연 ·사회에 대해 규정짓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의 형태를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아이디어(Idea)’와 같은 어원이니 말뜻 자체로는 ‘생각’이나 ‘관념’이다. 그러나 단순한 아이디어와 달리 이데올로기는 여러 가지 생각과 관념이 뭉친 덩어리를 가리킨다.

 

  ① 이론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 : 가장 가까운 말로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정한 개별 이론보다는 철학자나 정치가, 경제학자 개인의 포괄적 이론 체계를 가리켜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애덤 스미스의 분업 이론은 이데올로기가 아니지만 자유경쟁 자본주의에 관한 그의 경제 사상 전반은 이데올로기에 해당한다.

 

  ② 가치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 : 가치 중립적인 이론 체계에 비해 약간 가치가 개입된 이데올로기는 흔히 ‘이념’이라고 번역한다. 대표적인 예는 정치 이데올로기다. 이것도 이론 체계처럼 복합적인 이념의 덩어리를 가리키며 대중을 정치적 행동으로 이끌고자 할 때 주요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해방 직후 우리 사회를 얼룩지게 했던 좌익 세력과 우익 세력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그런 경우다.

 

  ③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을 말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와 지식사회학에서는 특정한 계급의 계층이 자신들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배후에 숨기고 마치 보편적인 것처럼 내세우는 이념이나 관념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회를 사실상 지배하는 부르조아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경제성장 정책을 마치 사회 각계각층에 골고루 이익이 돌아가는 것처럼 선전할 때 그 이데올로기는 진실을 은폐하는 허위의식으로 기능한다.

 

  ④ 담론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 : 이데올로기를 추상적인 담론 체계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리오타르는 전통적 형이상학에 바탕을 둔 거대 담론을 비판하는데,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사실상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리오타르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는 과거와 같은 통합적인 사회 쳬계가 아니다. 과거에는 사회의 각 부분이 단일한 목적 아래 결집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게 전혀 불가능하다. 부분은 전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독자적인 존재와 운동의 방식을 가진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거대 담론으로 세계의 기원과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이데올로기적 기획은 파산했다고 본다. 심지어 인간 해방을 지향하는 혁명적 이념?예컨대 마르크스주의?조차 거대 담론의 일반적인 결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것은 모두 무의미하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역사적으로 실패했으며, 탈현대에는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다. 거대 담론은 항상 ‘통합’이라는 목적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국 그릇된 목적론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마르크스주의란 낡은 계몽주의의 기치를 현대에 되살리는 환상이라고 단정한다. 계몽, 자유, 해방 같은 근대의 거창한 이념들은 중세의 신을 대체한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⑤ 무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이 아니며 심지어 ‘의식’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이다. 노란 색안경을 쓰면 세상이 노랗게 보이듯이 이데올로기는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늘 쓰고 있어야 하고 쓸 수밖에 없는 색안경과 같다. 주체가 이데올로기를 가지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주체이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 허위의식

 

마르크스.jpg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란 인간, 자연, 사회에 대해서 품고 있는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이념이다. 좀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처음 학문적으로 사용한 것은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자 D.드 트라시의 <이데올로기 개론>(1801)이었다. 그의 이데올로지(관념학)는 관념의 형성과정을 개인의 심리 ·생리적 기반에 결부시키는 것으로서 단편적인 심리적 고찰에 그친다. K.마르크스와 F.엥겔스의 <도이치 이데올로기>에 이르러 사람들의 관념 형태가 사회의 전체적 구조에 계통적으로 관련지어졌고, <경제학 비판>(1959) 서문에서 이데올로기론이 성립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조를 ‘해부학적’으로 규명했는데, 이데올로기에 관해서도 ① 그것이 본인의 사회적 존재에 따라 결정되며, ② 따라서 필연적으로 계급성 ·당파성을 지니고, ③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그 경제적 착취의 사실과 결부하여 폭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유물론 원칙이 이데올로기론의 근저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는 특히 관념론적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라고 규정했다.

 

  마르크스는 어느 시대에서나 지배자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에 대한 피지배자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무기로서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을 정립했다. 이에 대하여 사회학에서의 이데올로기론은 그것을 특수적이라 하여 ‘보편적 이데올로기’의 견해를 주장한다. <K.만하임>에 의하면 그것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적대하는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입장까지를 이데올로기론적 고찰의 대상으로 하려는 견해라는 것이다. <만하임>은 계급대립을 초월한 인텔리겐치아의 입장에 의해서 보편적 이데올로기의 견해를 지지할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와 같은 인텔리겐치아 자체가 어떤 사회적 기반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어 반드시 ‘보편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발달한 사회심리학적 이데올로기론은 사회적 기반과 이데올로기 중간에 퍼스널리티(personality)라는 매개의 항(項)을 두는 점에 특색이 있다. 이것은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집단의 이데올로기보다도 각 개인의 퍼스널리티 요인을 분석하는 것에 의해서 개인적 이데올로기의 심리적 형성 과정이나 병리현상(病理現狀)을 추궁하는 경우가 많으며,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다. 알튀세르는 네오막시즘적인 측면에서 이들 이데올로기에 접근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 무의식

 

알튀세르.jpg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확립한 경제이론의 독자적인 대상은 무엇인가? <자본>의 대상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대상과 그의 선행자들의 대상 사이에 있는 독자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알튀세르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자본>의 부제를 통해 질문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대답을 시도한다. 즉, <자본>은 정치경제학이 스스로 사실들의 명증성을 갖는다고 간주하는 '경제적 사실들'-즉 자신이 어떠한 설명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주어지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절대적 여건의 영역-을 대상으로 삼는 바, 이를 통해 이 '주어진 것'들의 명증성을 폐지하는 한편, 이들의 조건에 대한 분석을 가능케 함으로써 기존의 정치경제학과 근본적으로 단절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정치경제학의 (지식의) 대상과 구조를 한편으로 주어진 경제적 현상들―소비, 분배 및 생산―의 동질적 공간과, 다른 한편으로 욕구의 주체로서 인간―경제적 인간으로 주어진 것―에 기반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인류학'을 무매개적이며 직접적으로 관련지우는 것으로 파악한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이 양자의 통일체를 거부함으로써 정치경제학의 대상 자체를 거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을 통해 '고전적 인류학'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소비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이를 경제적 주체의 인간적 본성과 관련시켜 모호하게 정의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개별적 소비와 생산적 소비를 구분하여 이로부터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제 1부문과 제 2부문의 구별을 끌어내고, 부문간 비율의 생산구조에 의한 결정을 명확히 함으로써 가치실현과 자본주의적 축적의 과정 및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법칙에 있어 본질적인 발견을 이룩한다.

 

  또한 사용가치와 '욕구'를 역사와 경제적 기능에서의 효과에 의해 정의함으로써 양자를 외관상 직접적인 양태로 결합하는 듯 보이는 개인적 소비를 통해 한편으로 생산의 기술적 능력(즉, 생산력)과 다른 한편으로 소득의 분배(즉, 잉여가치와 임금으로의 분할형태)를 확정하는 사회적 생산관계들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게 한다. 특히 소득의 분배 문제는 인간을 사회계급들로 분류하게 만드는데, 이 때문에 인류학적인 기초가 설 이론적 지반이 사라지게 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생산과 함께 욕구를 결정하는 본질적인 요인으로서의 분배에 관해서도 마르크스는 두 가지 측면, 즉 소득의 분배(생산관계에 관련된 것)일 뿐만 아니라 사용가치의 분배로 파악하는데, 여기에서 사용가치는 앞서의 분류에 따라 제 1부문(생산수단)과 제 2부문(소비수단)으로 나뉘고 이중에 전자는 소득과도 교환되지 않고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자본가계급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교환되는 바, 이로써 사용가치 분배의 배후에서 인간의 사회계급으로의 분할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즉, 어떠한 경우에서든 그 분할 속에서 생산관계들과 생산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로써 소비와 분배를 지배하는 것이 생산이라는 마르크스의 기본적 테제―이들 경제적 '현상들'이 '생산관계들'의 지배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가 인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배와 소비에 대한 생산의 우위는 중농주의만큼 오래되었을 뿐더러 '생산의 경제학자' 리카도(D. Ricardo)에 와서 그 체계적인 형태가 부여된 바 있으며, 이 때문에 생산의 우위를 주장했다는 것만으로는 마르크스의 독창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알튀세르는 잉여가치와 관련된 논지를 구사하면서, 이와 동일한 견지에서 리카도의 '소득의 분배'를 대체하는 마르크스의 '생산관계' 개념을 부각시킨다. 즉, 마르크스의 독창성은 생산의 우위를 주장하거나 증명한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개념에 대해 구래의 개념이 지시하는 대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의 대상을 설정함으로써 생산의 개념을 변형시켰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책_for marx.jpg   알튀세르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생산을 노동과정과 생산관계의 통일로 이해하였는데, 알튀세르는 노동과정의 분석에 있어 두 가지 본질적인 특징, 즉 노동과정의 여러 조건의 물질적 성질과 노동과정 속에서 생산수단이 갖는 지배적인 역할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노동과정의 물질적 조건―마르크스는 이를 '경제적 존재형태'라고 개념화했다―에 대한 강조는 한편으로 모든 종류의 인간주의적·주관주의적·관념론적 노동관(觀)에 대한 부정의 역할을 수행하며, 다른 한편으로 물질적 조건의 재생산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하는 긍정의 역할을 수행한다. (노동과정이라는 '지식의 대상'에 대한) 이같은 마르크스의 과학적 통찰은 특히 생산관계와 관련하여 경제적 분석의 장에서 구체적인 이론적·실천적 효과로 드러나는데, 이것이 앞서 말한 바 있는 불변자본/가변자본, 제1부문/제2부문 등의 개념이다.

 

  한편, 노동과정에서 '노동수단'의 지배적인 역할에 대한 마르크스의 강조는 경제적 성장의 변형에 종속되는 외적 성질에 대한 '공격양식'을 확립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적 기본범주인 '생산양식' 개념을 성립케 하고, 동시에 상이한 노동수단간의 질적인 차이로서의 '생산성' 개념을 함쎄 구성해냄으로써 역사의 '시기구분' 뿐만 아니라 역사의 개념구성 자체를 가능하게 한다.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는 생산이 자연에 대해 가하는 물질적 공격의 분화적 정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분화적인 통일양식 그리고 그러한 통일의 변이 정도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생산양식 개념은, 그러나 '인간-자연' 통일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들의 통일체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 개념을 통해 생산의 물질적 조건과 함께 생산의 '사회적' 조건을 연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사회적 생산관계들은 '한편으로 생산의 담당자들과 다른 한편으로 생산의 물질적 수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한 기능으로서 존재하는, 생산의 담지자들 사이의 관계들에 나타난 독자적인 유형'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인간과 사물간의 관계와 대비하면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파악하는 인류학적 편향을 정정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 역시 생산과정 속의 물질적 요소들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알튀세르는 분배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하는데, 그에 따르면 분배는 한편으로 생산수단과 다른 한편으로 생산의 담당자들 사이에 고정된 어떤 규칙적인 비율로 이루어지는, 생산의 담당자들에 대한 생산수단의 일정한 귀속관계로 정의된다. 또한 저자는 봉건적 생산양식에 관한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독해하면서, 마르크스가 생산에 관련되는 상이한 요소들―노동력, 직접적 노동자, (직접적 노동자가 아닌) 감독자, 생산의 대상, 생산수단 등―의 결합과 상호관련(이것이 곧 생산관계이다)을 통해 상이한 생산양식을 정의하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결합은 (현실적 생산이라는, 결합체의 결과가 갖는 고유한 성질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독자적인 결합양식들―재산, 소유, 처분, 향유, 공동체 등―을 매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바, 현재의 요소들의 상이한 관계들에 대한 독자적인 관계들을 적용하게 되면 정의된 생산양식들의 생산관계들을 구성하는 제한된 수의 구성체들이 생산되며, 이것이 이른바 '사회구성체'이다.

 

책_역사적 맑스주의.jpg  이상의 분석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개념은 이 '결합'형태들의 변이원리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역사주의가 아닐 뿐더러 그 자체로 분석의 독창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앞서의 분석 속에서 마르크스는 현재적인 요소들의 일정한 결합형태가 그 결합의 존속을 위해 불가결한 지배와 종속의 일정한 형태, 즉 사회의 특정한 정치적 양태를 포함하고 있음을 증명했으며, 이러한 정치적 구성체의 필연성과 형태가 기초하는 수준 역시 입증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알튀세르는 생산관계가 법적·정치적 및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자신의 고유한 실존 조건의 전제로 삼는다는 것과 함께 생산관계가 사회적 총체의 어떤 수준에 위임된 효과성의 정도를 확정시킨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는 다시 생산관계들이 상부구조적 실존조건이 추상되면 자신들의 개념들로는 사유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일정한 생산양식에서 생산관계들에 대한 개념의 정의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상이한 수준 전체나 그 고유한 접합유형(즉, 효과성)에 대한 개념의 정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알튀세르는 소위 '경제적인 것' 그 자체의 정의를 근본적으로 혁신한다. '경제적인 것'은 직접적 혹은 명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오직 전체구조의 상이한 수준들의 독자적 인 존재와 접합에 대한 정의를 전제로 하는 그 개념의 구성에 의해서만 식별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의 구성은 경제적인 것을 생산양식의 구조 속에 있는 하나의 수준, 심급 또는 영역으로서 엄밀히 정의하고, 그 구조 내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독자적인 장소, 그 확장 및 그 한계를 정의함으로써 전체 속에서 그 스스로를 정확하게 '분할'하고 '접합'해 냄을 통해 가능하다. 알튀세르는 이것이 생산관계들에 의한 경제의 결정이라는 마르크스의 테제로부터 도출되는 첫 번째 이론적·실천적 결론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주어진 경제적 현상들의 동질적 공간이라는 정치경제학의 전제는 설자리를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두 번째 결론이 도출된다. 알튀세르는 경제를 사회전체의 전반적인 구조 속에서 그 자신의 고유한 위치를 차지하는 하나의 구조화된 영역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장소와 그 자신의 (상대적인)  부분적 자율성 속에서 하나의 부분적인 구조로서 기능하며,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자신의 요소들을 결정한다고 파악하고 있는 바, 이에 따르면 생산관계들의 구조가 이들 장소의 점유자인 생산의 담당자들이 차지하고 수행하는 장소와 기능을 결정한다는 논리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진실된 '주체'는 소박한 인류학이 상정하는 '구체적 개인들'이나 '진실된 인간'이 아니며, 오히려 장소와 기능에 대한 정의자 및 분배자, 즉 생산관계들 그리고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들이 된다. 결국 욕구의 주체로서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인류학 역시 소멸하게 된다.

 

  이상의 논의들을 정리하면서, 알튀세르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근본적인 수정이 인식론적 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한다. 서유럽의 철학을 지배하는 '지식이론'의 합리적 핵심으로서 현실의 대상에 대한 지식은 '구체적인 것'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아니라 그 이론적 가능성을 위한 절대적 조건으로서 그 대상에 대한 개념의 생산에 의해 얻어진다는 테제를 추출해내면서, 기존의 선형적 인과성의 개념을 매개하는 것을 통해서는 심원한 구조적 복합성에 의해 결정되는 경제적 현상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으므로, 정치경제학의 (지식의) 대상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과성을 설명할 수 있는 상이한 개념(혹은 합리성)이 요청된다고 말한다.

 

책_on ideology.jpg   알튀세르는 이러한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 마르크스의 과학적 발견 속에 '실천적인 상태'로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본질적인 논의를 하기 위해 저자는 우선 고전철학이 효과성을 고찰하는 두 개의 개념(및 개념체계)을 고찰한다. 첫 번째의 체계는 인과성을 이행적이고 분석적인 효과성으로 환원함으로써 요소들에 대한 전체의 효과성을 고찰할 수 없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체계이며, 두 번째의 체계는 그 요소들에 대한 전체의 효과성을 다루기 위해 상정되었으나 원리적으로 전체가 내적인 본질로 환원될 수 있어 전체의 요소들이 표현의 현상적 형태들에 불과하다는 라이프니쯔의 표현개념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 두 개념 모두 구조적 전체라는 전혀 다른 통일성의 유형, 즉 다른 구조에 의한 어떤 한 구조의 결정과 지배적이고 결정적인 구조에 의한 종속적인 구조의 요소들의 결정을 사고할 수 없다. 흔히 '과잉결정'으로 표현되는 이같은 구조적 인과성 개념을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 가치이론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인식론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서술'개념 속에 전부 요약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견해 속에서 구조를 경제적 현상들의 외부에 본질이 아닌, 그 효과들 속에서 갖는 내재성의 형태로 정의하였다고 말한다. 즉, 효과들은 구조의 외부에 있다거나 구조에 의해 특징을 각인 받는 하나의 미리 존재하는 대상, 요소 혹은 공간이 아니며, 동시에 구조는 그 고유한 요소들의 독자적인 결합이고 구조의 전체적 실존은 그 효과들로 구성된다는 구조적 인과성의 기본적 내용들을 모두 깨닫고 있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그러나 마르크스가 이같은 구조적 인과성을 명확히 개념화하지 못하고 다만 이전의 낡은 개념을 매개로 자신의 철학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결코 그로부터 기인하는 모순을 넘어서지 못하였음을 말하면서 그러나 마르크스에게 극복의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마르크스를 징후적으로 읽어냄으로써 '실천적으로 존재하는' 마르크스의 철학을 개념화함을 통해서만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지체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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