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39] 자크 마리에밀 라캉

by 이우 posted Mar 2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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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jpg    자크 마리에밀 라캉(프랑스어: Jacques-Marie-?mile Lacan, 1901년 4월 9일 ~ 1981년 9월 9일)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다. 에콜 노르말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에 의학으로 전향했으며, 소쉬르의 영향 하에서 형성한 이론으로 구조주의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은 현대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1901년 프랑스의 파리 시에서 태어났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처음으로 철학을 접하였고, 이후 의학과 정신병리학을 배웠다. 1932년에 의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930년대 초현실주의 화가, 작가들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와 표출에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정신세계를 언어학적으로 탐구하는 데에 일찍이 관심을 보였다. 1936년 파리 정신분석학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그의 '프로이트로의 회귀'라는 명분에 의한 기존 정신학에 대한 비판으로 인하여 다른 정신분석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53년 그는 파리정신분석학회(프랑스어: Soci?t? Parisienne de Psychoanalyse)의 회장이 되었으나, 6개월 만에 교육 방식으로 인한 갈등으로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파리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여 프랑스정신분석학회(프랑스어: Soci?t? Fran?aise de Psychanalyse)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세미나를 시작하였는데 이 세미나는 정신분석학자들 뿐만 아니라 장 이폴리트와 폴 리쾨르와 같은 철학자들에게서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 세미나는 1979년까지 계속되었다.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정통적인 분석법을 사용하였고 치료가 정신분석학의 목표라는 생각을 거부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많은 동료학자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1963년 국제정신분석학회가 프랑스정신분석학회의 가입을 위해서 학회에서 라캉을 교육분석가 목록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하자 그는 프랑스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였다. 1964년 파리프로이트학회를 창설하였는데, 이 단체는 1980년 라캉 스스로에 의해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충분히 추종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1966년 논문집 <에크리(?crits)>의 간행으로 유명해져 구조주의의 대표적인 학자로 떠올랐다. 1981년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라캉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대한 해석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프로이트가 경제적, 지형학적 인격모델 위에서 리비도의 역동적 흐름과 억압을 무의식적 과정의 핵심 내용으로 제시했다면, 라캉은 철학의 고유개념이었던 주체 개념과 언어학의 새로운 성과들을 무의식 분석에 결합시켰다. 이로서 정신분석은 말하는 주체에 관한 과학으로 새롭게 정초되었으며,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독특한 개념들이 정신분석의 새로운 지평에서 이론화 되었다. 라캉은 욕망과 무의식을 언어의 심급인 대타자의 담론에 일치시키면서 인정의 문제와 존재 상실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탐구했다.

 

  하지만 라캉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적인 특징인 애매한 용어의 사용과 과학 지식의 오남용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앨런 소칼과 리처드 도킨스가 있다. 도킨스는 라캉을 두고 “라캉이 사기꾼인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굳이 전문가의 의견을 들이댈 필요도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라캉의 무의식① : 타자의 담론

 

책_라캉의 주체.jpg   소쉬르가 언어 속에서 구조가 존재하는 양태를 분석하였다면, 라캉에게는 그 구조가 바로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언어를 통해 만들어지고 언어의 구조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라캉의 기본 원칙은 이러한 구조언어학의 원칙을 가진 채 프로이트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무의식에서는 언어학에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1대1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기의는 다양한 기표들 사이에서 떠돌게 된다.

 

  라캉은 기표의 개념 정의를 ‘구조에 의해서 연결된 언어활동의 물질적 요소들의 전체’라고 하고 기의의 개념 정의를 ‘진술 속에 서술된 경험의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라캉은 언어의 기호에 있어 기의보단 기표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무의식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기의를 다양한 기표 속에 숨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어떤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쓴다고 했을 때 그 떼를 쓰는 기표 행위는 단순히 장난감이 가지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엄마의 관심을 끌고자하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기표 행위가 단 하나의 기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표의 구조적 측면은 무의식에서 야콥슨이 말하는 은유와 환유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즉 라캉의 무의식은 은유와 환유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다. 은유는 기표의 의미가 '유사성'에 의해 다른 기표에 의해 대체되는 것을 의미하고 환유는 한 의미의 기표가 '인접성'에 의해 자리를 옮겨 치환되는 것을 말한다.

 

  라캉과 소쉬르의 기호에 대한 가장 큰 차이점은 '기호=기표(S)/기의(s)'라는 도식에서 중간의 선에서 나타난다. 소쉬르에게 기표와 기의 사이의 /는 양자의 관계를 뜻하지만, 라캉에게는 기표에 의한 기의의 억압, 즉 무의식을 나타나게 된다.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통합이며 그것은 어지러운 관념과 공허한 소리 이미지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라캉의 경우 기표와 기의는 하나로 통합되지 않으며 기표는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 이것은 무의식의 기표(꿈, 행위, 언어 등)는 기의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기표를 다른 기표들과의 관계, 징후와 연관 속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기표가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고 한다.

 

  그러나 계속 미끄러진다면 기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어떤 의사소통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라캉은 ‘고정점(point de caption)’ 혹은 ‘정박점(anchoring point) 개념을 도입한다. 고정점, 정박점이란 말 그대로 기의를 교정함으로써 기표의 미끄러짐을 중단시키는 지점이다. 여기가 기표가 기의를 만나는 지점이며, 주체가 태어나는 것이 이 지점이다.

 

  기의는 기표 밑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짐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주체에게는 이 미끄러짐이 잠정적으로 멈추는 어떤 부착점이 있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이런 고정점이 없거나 이 점들이 부서질 때 정신병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고정점은 잠정적인 것이다. 고착된 것이 아니라 잠시 고정된 것이고 다시 뜯어서 변경할 수 있으며, 기표 연쇄 항들을 변경시킴으로써 의미의 흐름을 다른 것으로 고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라캉이 말하는 주체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나타나면서 동시에 사라진다. 따라서 주체의 자율성은 존재하지 않고 주체는 끊임없이 미끄러질 뿐이다. 무엇인가를 말할 때 행과 행 사이, 곧 고정점에서 계속 생산되고, 프로이트 식으로는 ‘주체는 말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진리를 생산하고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한다.’ 주체는 기표와 기표 사이, 의미작용 사슬의 텅 빈 구멍에 존재한다.

 

  따라서 주체는 기표와 기표의 관계, 기표와 기의의 관계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전자는 환유적 주체, 후자는 은유적 주체로 해석된다. 환유는 낱말과 낱말의 관계, 혹은 연결에 토대를 둔다. 은유 역시 단순한 유사성 관계가 아니라 두 기표의 결합으로 정의된다. 그는 초현실주의 시를 보면서 시가 보여주는 창조점 섬광은 동일하게 작용하는 두 기표의 현존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그의 은유 공식은 ‘낱말(기표)은 다른 낱말(기표)을 위해 존재한다’이고, 시인은 이런 지속적인 흐름을 생산하고, 이런 흐름이 쾌락을 생산하고, 이런 흐름이 은유들의 황홀한 조직을 형성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기의는 언제나 결핍이다.

 

  환유적 주체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기표와 기표 사이에 침묵으로, 부재로 존재하는 주체다. 기표는 기의, 곧 주체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 기표는 주체의 창조에 저항한다는 것. 그러므로 이런 기표는 다른 기표로 끊임없이 치환함으로써, 혹은 기표는 항상 다른 기표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욕망과 관계된다. 고로 욕망은 환유이다. 환유는 의미화 사슬에서 한 기표와 다른 기표 사이의 통시적 관계이며, 환유는 단 하나의 의미화 사슬에서 기표들이 연결/결합되는 방식(수평적 관계)과 관련되고, 은유는 하나의 의미화 사슬에 있는 기표로 다른 의미화 사슬에 있는 기표를 치환할 수 있는 방식(수직적 관계)과 관련된다.

 

  이처럼 라캉의 무의식은 표현되는 방식이나 조직되는 방식이 언어적인 구조와 동일하다. 그래서 그 자신도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언어를 사용하려면 언어의 독자적인 의미망과 질서 속에 편입될 수 밖에 없다.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면 무의식 또한 언어의 의미망이나 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언어의 의미망이나 질서는 주체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 밖에 있는 사회적인 의미망과 질서 체계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Autre)의 담론’이라고 한다. 결국 무의식이란 ‘타자의 담론’이라고 요약되는 주체 외부의 질서 체계가 개개인에게 내면화된 것을 의미하며, 개개인이 이 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캉의 무의식② : 타자의 욕망

 

  라캉은 욕망(Desire)을 욕구(Need)와 요구(Demand)와 구별하는 데, 욕구(Need)는 식욕이나 성욕처럼 가장 일차적인 충동으로 만족을 추구하며 이를 충족시켜줄 대상을 찾는 충동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Demand)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요구는 사회적 질서와 언어적 질서 속에서 용인될 수 있는 것으로만 표현될 수밖에 없다.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욕구가 그대로 요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욕구는 요구를 통해서 표현되고 충족되어야 하는데 욕구가 늘 충족되지 못하기 마련이다. 욕구와 요구의 차이로 발생되는 것이 욕망(Desire)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욕망은 결핍이라고 한다.  라캉은 여기서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Desire)이라고 했다. 무의식이란, 타자를 통해 인정을 받고 싶어 하거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이란 것이다. 각자는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갖고자 하면서 동시에 타자의 욕망 대상이 되기도 한다.

 


□ <포우의 도둑 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1966)

 

책_자크라캉 세미나.jpg   라캉은 그의 논문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1966)에서 ‘무의식이 주체를 구성한다’는 명제를 예시하기 위해 포우의 단편소설 <도둑맞은 편지>를 사용했다. 이 소설은 궁정에서 시작한다. 비밀스런 편지를 받은 왕비가 혼자 편지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왕이 들어왔다. 왕비는 편지를 숨기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편지를 펼쳐진 채로 탁자 위에 놓는다. 그 때 장관이 들어오고 그는 왕비가 주소를 위로 하여 뒤집어 놓은 편지의 필적을 보고 왕비의 비밀을 알아차린다. 장관은 왕비가 보는 앞에서 그 편지를 자신의 것으로 바꾸고 편지를 들고 나간다. 그걸 알고도 왕비는 장관이 편지를 들고 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장관은 이 편지를 이용해 왕비를 협박한다. 왕비는 결국 탐정 뒤팽에게 편지를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뒤팽은 트릭을 이용해서 장관 모르게 편지를 다시 바꾼다.

 

  여기서 편지(letter)는 언어적으로 짜여진 무의식을 상징한다. 이 편지를 통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결정된다. 편지의 이동에 따라 인물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즉, 인물이 편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가 인물들을 결정한다. 왕비가 편지를 도난 당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편지의 부재를 왕으로부터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며, 장관이 그 편지를 왕비가 보는 상태에서 도둑질한 것은 왕비가 욕망하는 것(편지)를 자신이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다. 이것은 나는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갖고 싶어 하며, 나 또한 타자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주체는 에고가 아니라 무의식적 주체이고, 무의식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 된다. 요컨대 편지, 문자, 언어, 시니피앙이 인간적 주체와 관계없이 이동하고 움직이고 전환하고 치환하는 것은 무의식, 억압된 무의식 탓이고, 이 무의식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거울 단계 이론

 

  1931년 프랑스 심리학자 앙리 왈롱에 의해 처음으로 기술된 용어로 생후 6개월 된 아이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고 그것을 자신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단계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라캉은 이를 상상계의 예시적 전형이라 설명했다.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은 1936년 마리앙바드에서의 회의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비록 이 이론이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이론의 재구성이기는 하였으나 주체의 상태에 대한 철학적 반영에 대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라캉에 따르면 자아는 이상적 단일성, 완결성을 표하면서 자아 자신은 아닌, 이미지와의 동일시에 의한 결과이다. 거울이란 유사와 동일시(모방)가 가능한 모든 지표들의 총칭을 의미한다. 주체는 자신의 이미지(타자)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며 환희(나르시시즘)를 느낀다. 거울단계는 “주체의 사태는 소외다”라는 라캉의 말처럼 의식의 본질이 자기 소외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아가 타자에 대한 동일시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인간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으로 구조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라캉은 인간의 주체성 형성이 상상적 동일시에 의한 자기정체성의 획득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라캉에게 있어 주체성은 타자성을 구조적으로 함축한 것이다.

 

  라캉은 '거울 단계 이론'을 통해 자아의 자율성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밝히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거울 단계란 어린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신체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외적 세계를 구성하는 단계이다. 대략 생후 6~18개월 정도의 아이는 처음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외부 대상과 구별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카오스처럼 하나로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는 자신의 이미지를 알아보게 되고 자신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그것을 붙잡으려 하고 떠날 줄을 모른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거울 이미지는 이후 모든 심리 발달 단계에서 원형으로 작용한다.

 

  거울 단계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인식의 기준이 되는 자명한 자의식이나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자아는 어느 순간 나의 이미지를 다른 대상 이미지로부터 분리하고 그것에 고착됨으로써 형성된다. 거울 단계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이미지에 열광하는 이유는 이미지가 처음으로 자신의 가시화된 신체를 보여주면서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외부로 가시화된 이미지는 내 것이기도 하지만 실은 주체의 나르시시즘이 투사된 타자적 대상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단지 신체가 가시적 공간에 반영된 것으로 나와 마주해 나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그림자이며, 나의 내면을 보여주지 못 하는 대상일 뿐이기에 주체에 대해 언제나 타자로만 머물며 이상화되기 쉽다. 결국 거울 단계는 매우 행복한 단계이지만, 허구적 구축이 이루어지는 단계이고 타자를 통해 자아가 구성되는 단계이기 때문에 자기 소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은 "주체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제일 먼저 느끼는 곳은 타자 속에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타자는 실제 타자를 의미할 수도 있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주체가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은 주체의 타자다. 인간은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때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조적으로 인간의 욕망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과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을 향하게 된다. 욕망은 순수하게 나의 내면적 의지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타자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상상계?상징계?현실계

 

책_자크 라캉.jpg   라캉에 의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객관적 존재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언어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언어의 출연으로 인해 상징적 언어의 구조에 지배를 받게 되고 그로 인해 그 이전에 있었던 상상적 경험들은 상징적 구조에 의해 억압되어 무의식의 영역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결국 언어활동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은 완전한 세상 즉 모순이 없는 상상적 세계에서 모순과 억압이 가득찬 일상적 사회생활의 상징적 세계로의 나아감을 의미하게 된다. 라캉은 이러한 인간의 삶은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그리고 실재적인 것의 지배를 받게 되는 데 이를 각각 상상계?상징계?실재계라고 표현한다.


  ① 상상계(imaginaire, 거울단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인식하기 시작하는데, 아이는 자신의 신체를 파편화되어 통합되지 않은 부분들로 느끼는 반면 이미지는 아이에게 통합된 전체로서의 감각을 제공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아이가 이 거울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그것과 자기를 혼동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소외적이다. 통합된 자기에 대한 감각은 자신이 타자가 되는 대가를 치르며 획득 된다. 자아는 이미지들의 효과이다. 요약하면 그것은 상상계의 기능이다. 자아란 통일성과 숙달된 느낌을 주는 환영적 이미지에 근거한 것이며 이러한 연속성과 통솔감에 대한 착각을 유지시키는 것이 자아의 기능이다. 즉 자아의 기능은 오인의 하나이다.

 

  통일된 이미지가 파편화된 경험과 대치되는 순간부터 주체는 자신의 경쟁자가 된다. 아이가 가지는 자기에 대한 파편화된 느낌과 자아를 탄생시킨 상상계적 자율성 사이에서 갈등이 초래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의 보증인으로서의 타자에게 의존하는 동시에 그 동일한 타자와 격렬하게 경쟁한다. 거울단계를 통하여 아이는 자신의 신체에 대하여 통솔력을 획득했다고 상상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소외란 정확히 이러한 ‘존재의 결여’이며 이를 통한 아이의 인식은 타자적 장소에서 진행된다.

 

 ② 상징계

 

  상징적 동일시. 외디푸스 말기 단계에서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하는 시기다. 상징계는 언어와 문화로 이루어진 보편적 질서의 세계다. 자아 이상(ego-ideal)이 형성될 수 없었던 상상계와는 달리 상징계에서는 자아 이상(ego-ideal)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그러나 이러한 상징계로의 진입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 상징계로 진입한 어린이는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으면서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아버지의 법으로 전치하면서 타자가 지정한 자리를 내 자리로 받아들이고, 사회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책_라캉, 주체개념의 형성.jpg  외부 사회의 무엇을 받아들일 때는 우리는 그 사물의 이미지를 그 사물의 이름으로 전치하게 된다. 즉, ‘우유’라는 외부 물질을 이미지로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 '우유'라는 언어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어린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인 것입니다. 강압적으로 그 이미지를 "우유"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이는 억압을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무의식이 생기게 된다. 또, 동일시하던 어머니와 분리되면서 무의식적으로 상실에 대한 끊임없는 그리움과 욕망을 가지게 된다.

 

  라캉은 1961년부터는 상징적 동일화를 시니피앙에 대한 동일화로 설명했다. “우리는 보는 눈을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보여지는 내가 바로 주체가 자리를 잡는 공간이다. 나의 존재는 항상 당연한 듯 사유의 전제가 되지만 보고 있는 상속에 내가 형상적으로 자리를 잡게 될 때 (거울단계의 경험) 모든 인식들이 가능해진다. 내가 어떤 사유를 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유 속에 나의 위치가 먼저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인식은 없고 상징계의 매개에 의해서만 사유도 가능해진다.”

 

  라캉에게 무의식은 의미작용의 구성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무의식은 우리의 통제 너머에 있는 의미작용의 과정이다. 우리가 언어를 말한다기보다는 언어가 우리를 통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라캉은 무의식을 타자의 담론이라고 정의한다. 대타자는 언어, 즉 상징계이다. 이 타자는 결코 주체에 완전히 동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근본적인 타자성이다.

 

  자아는 일차적으로 주체와 그들 자신의 신체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는 ‘상상적 기능’이다. 반면 주체는 상징계 내에서 주조되며 언어에 의해 결정된다.(무의식의 주체) 라캉에 의하면 진술 주체와 언표 주체 사이에는 항상 균열이 있다. 전환사로서의 ‘나’는 결코 언어 속의 어떠한 안정적인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나’라는 것은 다수의 서로 다른 현상들에 의해 점유될 수 있다. ‘빈 말(공허한 말)’이라고 부른 것에서 ‘나’는 자아에 상응할 것이고, ‘찬 말(충만한 말)’에서는 주체에 상응할 것이며, 반면 또 다른 경우에는 주체나 자아 어느 것에도 대응되지 않는다. 즉, ‘나는 타자다’


 ③ 실재계

 

  실재 존재하는 세계. 실재계란 라캉에 의하면 상징계에서 배제되면서도 상징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핵적인 부분이다. 실재는 불가능성이다. 이 불가능성은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상징화된 접근 방법으로는 실재 자체에 다가갈 수 없는 게 실재의 모습이기 때문에 불가능성이라고 지칭된다.

 


라캉의 주체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사유와 존재의 일치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나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이 사유의 특징은 개인은 완벽한 자기투명성을 가지게 되어 주체에 대한 완벽한 통제성과 자율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데카르트의 명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전을 받게 되고 그 중 하나가 정신분석이었다.

 

  라캉 인식 체계에서의 주체는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생각을 당하는’ 주체로 사실상의 주체성을 부정한다. 라캉의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는 이 명제가 의미 하듯 주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그 무엇’이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무엇’이란 프로이트의 'id(무의식)', 라캉의 ‘ca(그것)'다. 라캉에게 있어 ‘ca'는 인간이란 생물학적인 존재가 사회적 존재의 인간으로 변환하는 내면화된 메카니즘’이다. 이 ‘ca’의 작동에 의해서 주체는 ‘자아의 이상(ego-ideal)’을 획득한다. 그리고 그 자아의 이상이 자신의 본래 모습이라고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 과정(상상계)을 거침으로써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타자가 지정한 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라캉은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명제를 비틀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체는 타자라는 구조 효과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