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15]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Fichte)

by 이우 posted Feb 1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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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_Gottlieb_Fichte.jpg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Johann Gottlieb Fichte 1762년 5월 19일 - 1814년 1월 27일)는 독일 철학자이다. 헤겔, 프리드리히 셸링과 더불어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철학사적으로는 지식학(Die Wissenschaftslehre)을 주로 하였으며 칸트의 비판철학의 계승자 또는 칸트로부터 헤겔에로의 다리 역할을 한 철학자로 인정되고 있다.

 

  피히테는 가난한 삼베직인의 아들로 태어나 예나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 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전학하였고, 졸업 후 가정교사 시절에 저술한 <종교와 이신론(理神論)에 관한 아포리즘>(1790)은 B.스피노자의 결정론의 영향을 받았으나, 1791년에 칸트 철학을 알게 됨에 따라, 특히 그 실천이성의 자율과 자유 사상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 후 쾨니히스베르크로 임마누엘 칸트를 찾아 그의 주선으로 <모든 계시의 비판 시도>(1792)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는데, 사람들은 처음에 칸트의 저서로 알고 있었으나, 칸트 자신의 정정과 천거에 의해 피히테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1792년에 예나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1793년 한(Johaanna Hahn)과 결혼하고 1797년에 <지식학>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논고를 발표하였다. 1798년 철학잡지에 포르베르크의 논문에 서문으로 발표한 <신의 세계지배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 근거에 관하여>라는 논문이 무신론이라는 의혹을 받아, 유명한 무신론 논쟁을 야기시켰으며, 결국 1799년 예나대학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 베를린에서 슐레겔 형제를 비롯하여 낭만파 사람들과 교유하였고, 사상적으로는 신비적·종교적 색채를 더해 갔으나, 동시에 시국 정치문제에도 활발한 발언을 시도하였고, 특히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한 프로이센의 위기에 처하여 행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 1807년 ∼ 1808년)>이란 강연은 너무나 유명하다. 종군간호사가 된 부인에게서 옮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었다.

 

  피히테(1762~1814)는 칸트주의자를 자처했고 “실체로부터 출발해 개별적 인간에 도달하고자 하는 교조주의자” 스피노자를 비판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물자체와 현상계의 분리, 오성과 이성의 구분 등에서 칸트에 동의하지 않았다. 피히테는 인식의 가능 조건과 인식 능력 자체를 구분하는 칸트의 입장을 비판했고, 칸트 특유의 ‘관점이원론’을 “활동하는 이성” 속에 해소하고 단일화하고자 했다. 그는 칸트가 자유와 필연의 이율배반을 해결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또 다른 수준에서 반복했을 뿐이라고 봤다.

 

  피히테는 칸트에게서는 단지 소극적으로 ‘우발성’으로서 처리될 뿐인 오성의 활동을 칸트로부터 물려받은 ‘선험철학’에 근거해 해명하고자 했다. 그 결과 “자아는 스스로를 정립한다” “자아는 자아가 아닌 것에 자신을 대립시킨다” “자아는 자아가 아닌 것의 부분에 자신의 부분을 대립시킨다”는 세 가지 근본원칙을 끌어낸다. 피히테에게서 자아와 비아의 관계는 칸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인식의 가능조건으로서 파악되고, 이는 사유에 전제되어 있는 사회관계적 지평이 이제 사유의 대상 자체로 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피히테는 분명히 칸트로부터 헤겔로의 길을 열고 있다.

 

  철학적 업적만을 근거로 평가한다면, 피히테는 칸트와 헤겔의 중간 지점 이상의 독자적인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치사상가 또는 저술가로서 그는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근대의 태생적 문제인 보편적 시민사회와 특수한 민족공동체의 균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독일민족에게 하는 연설>에서 피히테는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쓴 나폴레옹과 집정관에 머무르며 공화정체를 형식적으로나마 유지시켰던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를 대비시킨다. 피히테는 독일 민족은 스스로 근대 국가를 수립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외부로부터의 모든 종류의 개입에 반대한다. 이를 위해 시급히 교육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할 것을 촉구한다. 이와 같은 배타주의는 자아와 비아의 구분, ‘독일’과 ‘외국’의 구분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그는 라이프니츠, 루터, 칸트 등 독일 태생의 사상가와 스피노자와 같은 “외국 철학”을 대비하고 후자를 “경솔함”과 “깊이 없음”으로 특징짓는다. 피히테의 구별이 철저히 태생에만 근거한 것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피히테의 정치사상에서 보편적 개인, 권리, 자율성 등에 기초하는 근대 정치철학의 민족주의적, 특수주의적 도착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홉스로부터 칸트까지의 전통으로부터 피히테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자연법의 기초>에서 그는 근대적 사회계약론의 보편주의적, 이성주의적 전통을 따른다. 그러나 사회계약을 통해 구성될 국가는 생산자, 상인, 공장주, 관료로 이루어진 <폐쇄적 상업국가>, 국가적 계획에 의한 복지국가, 배타적인 자주경제로 나타난다. 그래서 피히테의 정치철학은 정당화 대상과 정당화 담론의 균열을 보여 주는데, 아마도 근대 국가가 이념적으로는 보편적 개인주의에 근거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특수한 민족정체성에 기초해 수립됐다는 점에 닿아 있을 것이다.

 

  피히테가 주목하는 지점은 칸트철학의 인식론적 문제다. 그것은 ‘사물 자체’와 ‘선험적 주체’라는 칸트의 개념에 관련된 것이었다. 피히테는 ‘사물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본다. 칸트에 따르면 사물 자체는 ‘있기는 있으되 인식되지 않은 무엇’이다. 그러나 사물 자체가 인식되지 않는 무엇이라면 사물 자체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고 피히테는 반문한다. 무언가 있는데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은, ‘맛이 있긴 있는데 맛을 알 수는 없어’라는 말처럼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즉 인식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말을 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칸트 체계의 부정합성이 나타난다. 체계를 만들어 가는 논리는 서로 배타적인 것을 설명할 수 없는 법인데 칸트의 경우에는 사물 자체와 현상이라는 서로 배타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부정합성과 모순이 나타난다. 선험적 주체의 개념 역시 근본적이지 못하며 불철저하다. 왜냐하면 선험적 주체에 대해 무언가 말할 수 있다는 건, 선험적 주체에 대하여 인식하고 판단하며 말하는 또 다른 주체가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피히테의 자아.jpg

 

 

  그렇다면 피히테로서는 두 가지 문제를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사물 자체와 현상, 대상과 주체를 어떻게 하면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선험적 주체보다 더 근본적인 것, 다시 말해 경험적인 조건에 전혀 제약 되지 않기에 설명될 수 없는 ‘자아’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피히테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자아와 비아를, 주체와 대상을 연관지우고 통일시키는 원리를 ‘자아’로서 정립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론 경험되지도 않고 인식되지도 않으나 주체와 대상을 연관지워 주는 활동, 그리고 그 활동의 결과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이 원리를 피히테는 ‘자아’라고 했다. 이때 ‘자아’는 비아와 짝을 함께 짝을 이루는 자아와 다르다.

 

  피히테의 철학 전체를 특정 짓는 세 가지 테제가 있다. 이는 변증법을 요약할 때 등장하는 테제, 안티 테제, 진테제란 성격을 갖고 있다. 이 세 개의 테제를 통해 피히테는 지식학을 구성하려고 한다.

 

  ① 테제(These) : 경험 등 모든 사실의 설명에 근거가 되는 이 자아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자신 안에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자아의 정립’이라고 요약된다. 피히테에게 자아는 모든 정신적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대적인 근거다. 경험이나 인식의 절대적인 출발점이자 근거를 이룬다는 점에서 절대적 자아다. 이러한 절대적 자아가 정립되지 않으면 어떤 인식도 경험도 불가능하다. 마치 인식하는 내가 없이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듯…. 이 자아를 존재하게 하는 다른 근거(예를 들면 ‘나는 생각한다’와 같은)는 필요 없다. A가 A인 것에 다른 이유가 필요 없듯이 말입니다. 단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② 안티 테제(Antithese) : 자아는 비아를 반정립한다. 나아가 자아는 비아를 자기 안에서 반정립한다. 자아는 비아를 자기에 대립되는 것으로 세운다(定立)는 말이다. 이는 흔히 ‘자아의 부정-비아의 정립’이라고 요약된다.

 

  ③ 진테제(Synthese)자아는 자아 안에서 가분적(可分的) 자아에 대해 가분적 자아를 반정립한다. 애초에 자아는 스스로 정립되었다. 그리고 자아는 활동하기 때문에 비아를 자기 안에 정립한다. 그래서 이제 절대적 자아는 자아와 비아로 나뉘게 된다. 애초의 자아는 자아만으로 있었는데, 이제는 자아와 비아로 나뉘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셋째 테제는 이처럼 나뉠 수 있는 자아(가분적 자아)와 니뉠 수 있는 비아가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을 말한다. 말하는 자아와 말상대인 비아가 서로 마주 서게 되는 것이다. 경험하는 의식을 얘기할 수 있는 건 바로 여기서부터다. 경험이란 경험하는 자아와 그 대상이 있어야 하니까. 이 세 번째 테제는 마주 서 있는 자아와 비아의 종합(Synthese)을 표현한다.

 

피히테의 변증법.jpg

 

 

  피히테가 출발점이라 생각한 절대적 자아란, 활동을 통해 바아와 비아를 동시에 정립하는 ‘자아’다. 이런 뜻에서 피히테는 자와와 비아의 종합만이 절대적이라고 한다. 이 자아는 자기 안에서 자아를 정립하고 또한 비아를 정립한다. 피히테에게 인식의 대상이란 비아일 뿐입니다. 자아 외부에 있는 어떤 것도 그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철학적 관점에서 피히테는 자아의 무제한적 자유를 강조한다. ‘자아는 무한을 향한 행동자’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극도로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도덕적 질서는 완전성을 추구하는 자아의 노력에 있으며, 이 도덕적인 질서야말로 신적인 질서라고 한다. 칸트가 신적인 질서를 도덕적 질서로 환원했다면, 피히테는 도덕적 질서를 다시 자아의 노력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바로 자유주의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즉 무한한 자아들이 서로 부딪히고 상충하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국가주의적인, 혹은 사회주의적인 견해를 제출한다. 요컨대 자아들의 상충과 충돌을 방치하는 게 아니라, 전체가 조화로울 수 있도록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심지어 ‘개체의 소멸’까지 주장한다.

 

  결국 피히테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나(자아)’를 절대화하여 절대자의 자리를 부여한다. 예전에 신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이젠 ‘자아’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모든 대상은 자아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 내부에 있다. 이 ‘자아’를 벗어나 있는 사물 자체는 따로 없다. 나아가 주체와 대상 모두가 자아 안에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의 일치를 어떻게 보증하느냐의 문제는 아예 생겨나지 않는다. 그건 항상 이미 ‘자아’ 안에서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 안에서 자아와 비아가 민들어진다고 하는 것이, 그 비아를 자아가 올바로 인식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인이 똥을 쨈으로 ‘자기 안에 정립하고’ 먹는다고 해서 그게 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걸 똥이란 대상으로 정립하는 자아와 쨈이란 대상으로 정림하는 자아가 있다면, 이 두 자아가 모두 옳은 것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생긴다.

 

    피히테에 따르면 그렇다, 인정될 수 있다고 해야 한다. 하나는 그걸 똥이란 대상으로 반정립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걸 쨈이란 대상으로 반정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많은 자아들이 모두 자기의 대상을 반정립하고 그걸 진리라고 부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누구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하고, 누구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하는데 모두 다 진리가 될 수 있는 ‘혁명적’ 방법이다. 이는 진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근대철학의 딜레마가 다른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피히테의 자아02.jpg

피히테의 국가주의.jpg

 

 

 * 독일국민에게 고함


  1806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패하고 1807년 독일 연방의 한 축인 프로이센이 굴욕적 강화조약을 맺었다. 프랑스의 속국처럼 바뀐 절망적 상황에서 피히테는 독일 국민의 각성을 요구하는 명연설을 남겼다. 1807년 12월 13일부터 1808년 3월까지 적에게 점령된 베를린학사원 강당에서 매주 일요일 저녁, 총14회 강연하면서 프랑스문화에 대한 독일인·독일문화의 우수성을 설명하고 독일의 민족독립과 문화재건을 역설한다.

 

  이를 위하여 국민정신을 함양하고 교육이 당시 독일을 재건하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한다. 그는 단지 독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독일 민족의 선조들이 쌓아올린 귀중한 문화를 이방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독일 패배의 근본적 원인이란 이기심이며, 그것은 새로운 국민 교육에 의해 타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민족의식이 깨어나야 독일 국민은 독립을 되찾고 세계사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참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교육받은 문화적 엘리트가 담당해야 할 몫을 특히 강조했다. 이것이 유명한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다.

 

  그는 그의 주장에 들어 있는 민주주의적·공화주의적 요소 때문에 이 강연 내용을 담은 책이 오랫동안 재판(再版)이 금지되지만, 예나의 패전에 이은 틸지트(지금의 소베츠크)의 굴욕적인 강화조약으로 나폴레옹의 지배하에 놓였던 당시의 프로이센 및 독일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국민정신을 드높여 반격을 준비하는 데 정신적으로 커다란 힘이 된다.


  ...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감각의 세계가 참다운 실재(實在) 세계로서 여겨지고, 그것이 우선 교육의 객체로서 학생들에게 제시되어 왔다. 학생들은 우선 감각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사유(思惟)로 이끌렸다. 새로운 교육에 있어서는 사유에 의해서 파악된 세계만이 참다운 실재이다. 새로운 교육은 모든 사람들 속에서 정신만을 살리어 그것을 지도하도록 해야 한다. 나는 먼저 견실한 정신만이 질서 정연한 국가의 유일한 기반이 된다고 했는데, 참으로 그 정신을 모든 사람들 속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로써 생겨나는 정신만이 고매한 조국애를 나 자신 속에 심어 준다. 그래서 그 사람으로부터 용감한 조국의 수호자로서 충실하게 법을 지키는 공민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중략)

 

   젊은 세대에 호소한다. 여러분은 젊다. 젊은 만큼 빛나는 예지와 비상한 능력을 갖고 순수하고 뛰어난 감성을 갖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것은 여러분의 그 고귀한 젊음이 순진성과 자연적인 감정에서 멀어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중략) 명석한 사유로 여러분은 만년 청년이 될 수도 있다. 육체가 늙고 무릎이 휘청거리더라도 여러분의 정신은 끊임없는 신선함을 가지고 되살아나고, 여러분의 개성은 확고 부동하여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에게 기회가 닥쳐오면 즉각 단단히 붙잡아라. 여러분이 반성해야 될 점을 과제에서 똑똑히 가려내라. 이것이 명백해지면 다른 모든 점도 역시 저절로 밝혀질 것이다. (중략)

 

  "여러분은 말기(末期)이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시조(始祖)이기를 원하는가."


  그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말기란 여러분이 존경을 못받을 뿐 아니라 후세로부터 부당하게 멸시를 당하는 세대의 최후자임을 말한다. 또 그 세대의 역사에 있어서 이제부터 시작하는 야만시대가 있다고 하면 여러분의 자손은 여러분이 말기가 되는 것을 기뻐하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 운명을 찬양할 것이다. 시조란 여러분의 모든 관념을 초월하는 빛나는 시대의 새로운 전개점(展開點)이고 또 자손이 이제부터 그 축복의 연대를 헤어보는 세대이다. (중략)

 

  여러분이 선택해야 하는 여러 조건들을 마음속에 떠올려 봐라. 여러분이 계속 침체되고 버림받은 상태에 있는다면, 노예 상태에서 생겨나는 모든 불행, 즉 결핍과 굴욕, 그리고 정복자의 우롱과 오만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여러분은 어디에서나 잘못 되었고 방해가 되기 때문에 궁지에 몰리고 약탈당할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그 국민성과 국어를 희생시켰을 뿐, 얻은 것이라고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자리에 불과하고, 그런 식으로 해서 하나의 민족으로서 차츰 사라져 갈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만일 여러분이 분발해서 씩씩하게 행동한다면, 꽤 괜찮고 명예로운 상태에 살게 될 것이며, 여러분 중에서 그리고 여러분 주위에서 여러분과 독일인들의 이름을 아주 빛나게 해 줄 것을 약속하는 한 세대가 자라나는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 세대에 의해 독일의 이름이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영광스럽게 부상하는 것을 머리 속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러분은 우리 민족이 세계를 부흥시키고 재창조하는 것을 볼 것이다.

 

  여러분이 맨 꼴찌가 되어, 존경받을 가치도 없고 또 분명 후손들로부터 부당하게 멸시당할 세대의 마지막 주자가 될지 어떨지는 여러분에게 달렸다. (중략) 여러분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영광스러운 새 시대의 첫 주자가 되어, 그 후손들이 여러분의 세대부터 구원의 연대를 헤아리게 될 수도 있다. 여러분은 이 중대한 선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최후의 세대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라. ...

 

-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