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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40] 루이 알튀세르

by 이우 posted Apr 0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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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jpg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루이 피에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년 10월 16일 ~ 1990년 10월 23일)는 알제리 출신으로, 파리의 고등사범학교(?cole Normale Sup?rieure)에서 수학하였으며, 그 곳에서 철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을 선도하는 이론가였으며 그의 주된 논쟁들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근거에 대한 여러 위협들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 위협에는 마르크스주의 사회학과 경제학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경험주의와 유럽의 공산당들을 분열시키기 시작한 휴머니즘 사회주의 및 민주-사회주의가 포함된다. 그는 반인간주의, 반경제주의, 반경험주의와 반주체주의를 주장하였다. 프랑스 구조주의의 다른 부류와 결코 간단히 얽히는 우호적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알튀세르는 흔히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린다.

 

  알튀세르는 그가 기존의 맑스주의가 갖고 있던 역사주의, 경제주의, 환원주의, 주의주의(主意主義), 인간주의에 반대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다. <반(反)목적론의 맑스주의>로 요약되는 알튀세르의 사상은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있는 목적을 상정할 수 없는 투쟁의 역사라는 관점 속에서 기존의 맑스주의가 갖고 있던 위기를 돌파하려고 했다. 역사를 바라보며 어떤 '목적'을 배제하면 그 목적을 상정하는 '주체'와 그 주체가 가진 '의지'를 탈각하게 되고, 보다 넓은 객관적 시야에서 사회 각 영역들의 구조와 각각의 자율성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아직 스탈린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소련 중심의 '정통 맑스-레닌주의'를 비판하는 한편, 여기에 대한 반발로 서구에서 일어난 이른바 '인간주의적 맑스주의' 또한 거부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조주의'에 반대하는 동시에 교조주의에 대한 '우익적 비판'에도 반대"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의 모든 문제를 '토대'인 경제로 환원해서 설명하려는 '경제주의'와, 인간의 자유 의지나 의도 따위를 강조함으로써 그 경제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주의'를 "맑스주의 내에 존재하는 상호보완적인 한 쌍의 잘못된 경향"으로 보고, 이 두 가지 모두를 극복하려 했다.

 

  2차 대전 이후 이러한 맑스주의의 사상적 혼란은 이론의 자율성을 훼손시키고 맑스주의 이론을 왜곡하고 빈곤하게 만든 스탈린주의에서 기인한다. 여기서 알튀세르에게 중요했던 것은 맑스주의가 스스로 스탈린 시대의 오류를 해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위기의 시대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 시대의 문제점을 스탈린 개인의 잘못이나 개인숭배 탓으로 돌리는 것"이나, '인간과 소외와 해방'에 관한 들뜬 철학적 담론들은 맑스주의 이론과 관계없는 비과학적인 비판이었고, 정세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할 수 없는 서구 맑스주의의 무기력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잉여가치론을 통해 노동가치설과 자본증식을 함께 설명할 수 있었던 맑스의 작업처럼, "맑스의 저작을 제대로 해석하여 맑스주의의 과학성을 확립하고 뒷받침"하는 일이었다.

 

책_알튀세르 효과.jpg    그 작업에 착수한 알튀세르는 청년기 맑스의 저작에 대해서 "'주체가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면을 역시 그 주체의 힘으로 극복해 나간다'는 근대의 전형적인 주체 중심적 사고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런 점에서 헤겔의 소외론을 변형시킨 청년 맑스의 소박한 휴머니즘적 입장으로만 맑스주의를 설명하는 기존의 입장은 알튀세르에게 모두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러한 청년 맑스는 진정한 맑스의 얼굴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포이에르바하와 "헤겔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난 맑스, 반(反)목적론적 역사 과학을 정초한 맑스, 그러나 이 과학을 철학적으로 제대로 개념화하지 못 한 맑스를 상정"했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헤겔주의가 가진 목적론적ㆍ전체론적 사유를 집요하게 비판하며 "맑스의 사상과 헤겔 철학이 사실상 무관하다는 점을 자신의 스승인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이란 개념을 빌려와 밝히"려 했고, "헤겔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맑스의 과학(변증법적 유물론)과 철학(맑스가 독자적으로 전개한 역사 유물론)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려 했다.

 

  맑스주의의 과학성을 재건하려는 이러한 알튀세르의 분투 과정은 서구 진보 진영에 큰 영향을 끼치며 맑스주의의 다양한 논쟁 지점들을 생산했지만, 때로는 맑스와 맑스주의에 대한 부정확하고 왜곡된 주장을 포함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는 이론적 완결성을 지속하지 못하고 말년에 이르러 스스로 맑스의 과학성에 대한 입장을 수정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사상에 대한 다른 평가들도 그가 서구 진보 진영에 준 영향처럼 논쟁적이고 다양한데 "흔히 따라붙는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라는 딱지 말고도, '과학주의', '반(反)경험주의', '엘리트주의', '마오(모택동)주의'," 심지어 "'신(新)스탈린주의'와 '반(反)스탈린주의'의 같이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투쟁은 맑스주의를 보다 생산적이고 현대사회에 적합한 것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고 사회와 역사를 좀 더 세련되게 분석하는데 참고할 지점들을 제공했다.

 

 

사유

 

  “ 사유는 초월적 주체의 능력도 아니고 또한 물질로서의 현실세계와 마주 대하는 절대의식의 능력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유는, 비록 개별 인간이 그 담당자이기는 하지만, 심리적 주체의 능력인 것도 아니다. 사유는 자연적 및 사회적 현실에 기초하면서 그것에 접합되어 있는 사유 기구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체계인 것이다. ... 사유는 지식의 결정적 생산양식으로 하는 현실적 제조건의 체계에 의하여 규정된다. ...  사유는 인간 정신활동의 최고 형태이며, 사유의 본질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대상 및 과정들 속에 들어 있는 보편적인 것, 합법칙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반영하는 데 있다. 사유는 인간의 사회적인 노동과정에서 싹텄다. (중략) 이러한 것으로서 이 사유는 그것이 노동하는 대상(원료)의 유형과, 가용적인 이론적 생산수단(이론, 방법 및 기술, 실험 또는 기타)과, 그 내부에서 생산하는(동시에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사회적이기도 한) 역사적 제관계를 결합하는 구조에 의하여 구성된다.”

 

-루이 알튀세르?에티엔 발리바르의 <자본론을 읽는다(Lire Le Capital> 중에서


 

주체와 이데올로기

 

책_맑스를 위하여.jpg  초기의 알튀세르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거부하고, 역사는 주체의 의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그치지 않고, 아예 주체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있어서는 특정한 '계급'도 변혁의 주체가 아니라, 주어진 구조와 상황 속에서 '생산'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도 역사는 계급투쟁에 의해 발전한다는 생각을 버리진 않지만, 그 과정은 어떤 각성된 주체가 아닌 계급투쟁을 통해 구성되는 계급에 의한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역사란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으로서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투쟁"이었다.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내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재해석하여 근대 세계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를 가능케 했다. 고전적 맑스주의에서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알튀세르는 목적론에 대한 거부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실재 존재양식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그 어떤 사회에서나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무의식은 영원하다'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그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아닌 물질적 존재를 통해 실현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불리는 학교, 교회, 공장, 가족 등에서 이데올로기는 '부름'과 그에 대한 '응답'의 과정으로 개인을 주체로서 호명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주체를 생산해낸다.

 

 

  “나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呼名, interpellation)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중략) 우리는 경찰의 일상적인 호명과 같은 유형 속에서 그것을 표상할 수 있다. '헤이, 거기 당신!' 이렇게 호명된다면 호명된 개체는 뒤돌아볼 것이다. 이 단순한 180도 물리적 선회에 의하여 그는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호명이 바로 ‘그’에게 행해졌으며, ‘호명된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 알 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중에서


  “이데올로기적 발상의 특징은 지식이라는 유일한 필연성과는 무관한 ‘이해’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이다.”

-루이 알튀세르?에티엔 발리바르의 <자본론을 읽는다(Lire Le Capital> 중에서


 

  그러나 말년에 알튀세르는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이라는 제목을 단 창문의 논문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바꾼다. 주체는 자신이 선택하는 온전한 내 삶을 시작하기 위해 기존의 의미 체계와는 다른 의미 체계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과거의 의미 체계에 의해 규정된 주체 형식을 벗어나 새로운 주체 형식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주체 자신의 순수한 결단이 아니라 주체가 마주친 타자의 타자성이다. 기존의 의미를 뒤흔드는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서만 주체는 의미를 새롭게 생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주체는 자신의 존재를 집요하게 유지하려는 ‘코나투스(conatus)’,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있으며, 자신들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 앞을 비워두려는 힘과 의지를 타고난 개인들이 서로 마주치면서 새로운 의미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속한 구조가 슬픔을 준다면 인간이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라도 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생산

 

책_자본론을 읽는다.jpg   알튀세르는 한 사회가 일정한 도달점을 향해 나아간다는 목적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경제주의같은 환원론을 벗어나기 위해 "서로 자립성을 갖는 여러 영역들의 복합체"로서 사회를 조망하려고 했다. 기계나 상품을 제조하듯이 사회와 역사를 하나의 메커니즘 속에서 '생산하고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짜맞춰진 이 기계와 같은 구도를 분쇄하려고 했다.

 

  알튀세르는 그 '생산'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개념을 반(反)목적론적인 것으로 변형하고 사회의 각 영역에 도입해 각 부문이 상대적인 자립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은 어떤 주체에 의해 추진되거나 지배되는 근대적인 의미의 생산이 아니라, 주어진 생산 수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보다 객관적인 생산 형식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의 철학을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경계에 선 역사철학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과학, 이데올로기 영역 등도 생산의 구조를 가진다고 하고 "경제 영역이 다른 영역을 일방적으로 규정하거나 '결정'하거나, 모든 것을 경제 문제로 '환원'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알튀세르에게 있어 때로는 정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 한 사회 속에서 다양한 실천 영역을 심급이라고 부르더라도 전체의 방향을 규정하는 것은 '최종 심급에서의 경제의 결정'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구조 내의 인과성을 '중층결정'이라는 말로 설명하려 했다. 결국 그는 사회를 자립적인 영역들이 '구조적 인과성' 속에 얽혀 있는 거대한 '복합적 전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학문 영역의 과학이나 이론적 활동도 하나의 '생산' 활동으로, 곧 '이론적 실천'으로 취급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정치나 문화의 영역도 경제 영역과 마찬가지로 '생산'이나 '실천'이라는 구조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하면, 일방적인 환원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튀세르에게 있어 '과학'은 "어떤 외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기준은 과학 자체 내에 있는 것이며, 과학의 특성은 그 차원에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내는 데 있다." 이것을 알튀세르의 '반(反)경험주의 과학관'이라고 한다.


  "과학이 생산한 지식이 실재의 대상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참된 지식이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이러한 "지식과 실재 대상 사이의 관계를 <전유(專有;appropriation)>라는 말로 설명한다." ‘지식이 실재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실재의 대상은 지식 생산과정에 대하여 '절대적인 준거점'으로 남아서 지식 생산의 영역은 실재 대상 영역에 대한 지식을 산출해 낸다. 그래서 우리가 실재의 대상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지식은 이렇게 생산된 지식뿐이다. "이 지식을 넘어서서 실재 대상과 이 지식 사이의 실제적인 관계를 조망하려는 것은 헛된 욕심이다." 결국 '전유'라는 것은 지식이 경험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지식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과 사회적 조건들은 가변자본과 잉여가치 생산의 직접적인 관계에 의해 표현된다. 잉여가치가 측정 가능한 현실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며, 기존의 사회적 생산구조의 개념이며, 우리가 곧 정의하게 될 의미에 있어서, 즉 그 ‘제효과’에 있어서만 가시적이고 측정 가능한 하나의 실존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역사의 ‘시기구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의 개념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 즉 생산양식의 개념은...이들 상이한 요소들-노동력, 직접적 노동자, 직접적 노동자가 아닌 감독자, 생산의 대상, 생산수단 등-을 결합하거나 상호관련시킴으로써 우리는 인간역사에서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 있는 상이한 생산양식들을 정의할 수 있다.”

 

  “ 생산관계들의 구조가, 생산의 담당자들이 이 기능의 ‘담지자’인 한에서, 이들 장소의 점유자인 생산의 담당자들이 차지하고 수행하는 장소와 기능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따라서 진실된 ‘주체’는 이러한 점유자나 기능자가 아니며, 모든 외관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인류학이 갖는 ‘주어진 것’의 ‘명증성’ 즉 ‘구체적인 개인들’ 또는 ‘진실된 인간’도 아니며, 이들 장소와 기능에 대한 정의와 분배인 것이다. 진실된 ‘주체’는 이들 정의자 및 분배자, 즉 생산관계들 그리고 정치적 및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들인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에티엔 발리바르의 <자본론을 읽는다(Lire Le Capital> 중에서


 

 

반(反)목적론적 맑스주의

 

책_철학적 맑스주의.jpg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안에 있는 목적론적이고 결정론적인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구조주의적 문제틀을 도입함으로써 '과학적' 맑스주의를 새롭게 확립해 보려 한 철학자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는 애당초 이질적인 것을 결합하려는 무리를 안고 있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알튀세르의 말처럼 목적론적인 색채를 가진 것이라 할지라도, 과연 "이 모순의 설정을 떠나서 맑스주의가 맑스주의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도는 맑스주의의 "한계와 맞닿은 극한적이었던 것"이며 그의 작업은 19세기 사람인 맑스를 20세기의 탈근대적 공간에 치열하게 투영시키려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개념 또는 하나의 간단한 명칭에 의한 이 지시의 양식이 어떠하건, 우리는 역사일반을 결코 인지할 수 없으며, 오직 어떤 것의 역사만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 우리가 가장 경미한 것이라 하더라도 경제적 대상에 대한 고전적인 견해로의 부주의한 역행을 피하려고 한다면, 그리고 만약 경제적 대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견해가 하나의 비경제적인 구조에 의해 외부에서 결정된다고 말하지 않으려면,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점이다. 구조는 그 현상의 외견(aspect)과 형태 및 관계들을 수정하는 경제적 현상들의 외부에 있는 본질이 아니며, 또한 그것이 현상 외부에 있기 때문에 부재한 하나의 원인으로서 현상들에 대해 효과를 미치는 경제적 현상들의 외부에 있는 본질도 아니다. 구조의 '환유적 인과성' 속에서 그 효과들에 대한 원인의 부재는 경제적 현상들과 관련하여 구조가 갖는 외재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조가 하나의 구조로서 그 효과들 속에서 갖는 내재성의 형태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효과들이 구조의 외부에 있지 않으며, 구조에 의하여 특징을 각인받는 하나의 미리 존재하는 대상, 요소 또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구조가 그 효과들 속에 내재하고, 스피노자적인 의미를 따르자면 효과들 속에 내재하는 하나의 원인이라는 것이며, 구조의 전체적 실존(existence)은 그 효과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 고유한 요소들의 독자적인 결합에 불과한 구조는 결코 그 효과들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루이 알튀세르?에티엔 발리바르의 <자본론을 읽는다(Lire Le Capital> 중에서


 

 

알튀세르가 남긴 것들

 

  루이 알튀세르의 작업은 맑스주의 내부에서 맑스주의 이론을 개조하고 쇄신하려는 시도들였다. 그는 "맑스주의의 전화(轉化)라는 정치적 문제 의식 속에서 사유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우리시대의 사상가였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많은 철학적 논제들과 비판의 무기가 될 개념들을 지적 유산으로 남겼다. 그런데 현실을 정치하게 분석해 낼 수 있는 '맑스주의의 과학성과 비(非)교조성'을 강조했던 알퉤세르의 작업은 어쩌면 그 이론 자체보다 그것으로 인한 알튀세르적인 효과와 영향이라는 면에서 오늘날 더욱 논쟁적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치열했던 이론적 투쟁은 완수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고, "그가 남긴 유산은 그의 후세대에 의해 비판적으로 전유(傳諭)되고 계승되고 있다."

 

  알튀세르가 추구하던 비결정론적이며 비환원론적인 이론적 경향과 이단적이고 개방적인 지적 태도로 인해 그의 사상은 "비판적 대결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해되거나 수용될 수 없는 사상, 새롭게 변용되고 굴절됨으로써만 계승되고 재개될 수 있는 사상"으로 이해된다.

 


  ①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 1942년~)

 

발리바르01.jpg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 1942년~)에게 맑스 혹은 맑스주의는 "우회할 수 없는 지점으로서 그에게 근본적인 사유의 지평을 제공"했다. 그는 맑스주의가 자신의 역사 속에서 드러낸 한계들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의 극복을 여전히 맑스주의의 지평 속에서 사유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스승인 알튀세르의 작업을 가장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도달한 지점, 즉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가진 난점에서부터 그의 독자적인 사유를 개진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이라는 테제가 가진 난점에 대한 답변이다. 즉, 알튀세르가 취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론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기본적으로 경제적 생산관계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위한 장치이자 물질적 도구라는 측면에서, 이데올로기는 구조를 작동시키는 요소로서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하고 그 재생산의 메커니즘을 설명하지만, 그 전화는 설명할 수 없는 기능주의적인 이론이라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과학'에 대립되는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과, 그가 강조한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양립가능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는데, 발리바르는 이 난점을 '초개인성(transindividuality)'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박기순 교수는 발리바르가 말하는 주체화가 집단적인 과정임을 강조하면서,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은 어떤 관계들과 공동체성의 효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인의 개체성은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거나 변형"된다는 것이다.

 

  또한 발리바르는 맑스와 알튀세르가 공유하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여,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자들의 체험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 또는 승인과 저항 또는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 피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이데올로기가 "정의, 자유와 평등, 노동, 행복 같은 근대적인 이념들에서 보이는 보편성의 형식을 드러내며, 피지배자들의 이 가상적 보편성의 경험은, 단순한 가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 보편성의 이념 때문에, 기존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물질적 토대가 될 수 있다".

 

  발리바르는 "'보편성의 정치', '인권의 정치'라는 개념을 주권 개념에 근거한 근대정치의 전화로 설정"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인권은 인간의 어떤 자연적인 고유한 성질로부터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획득되고, 상실되고, 재규정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권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태에 국한되지 않는 초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권' 개념이 끊임없는 시험을 통해 재정식화를 요구하는 유동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시민권' 개념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인권은 어떤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재해석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 그 자체이다." 이처럼 인권은 그 내용상 미결정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정치공동체에서 법적 합의를 통해 시민권의 형태로 규정될 수밖에 없지만, 그 본성상 늘 시민권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하는 '권리에 대한 권리'라는 것이다. 오늘날 인권 개념의 난점은 그것이 시민권과 전면적으로 결합할 수도 결별할 수도 없다는 것에서 연유한다.

 

  발리바르의 이러한 인권 개념은 데리다가 정의(justice)에 관해 말한 것처럼 어떤 '무한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권은 민주주의와 동의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 인권 개념 속에서 "민주주의에 특징적인 본질적 무한성"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권이 무한성으로서 이해되는 한, 그것에 기초해 있는 민주주의 또한 무한성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민주주의 원리이자 정치의 원리로서의 이 인권을 '평등한 자유' 또는 새로운 조어로서 '평등-자유(?galibert?)'라는 개념을 통해 표현했다. 이 개념을 따른다면 평등과 자유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함축하여 서로의 요구를 제한하지 않는 요구의 절대성을 표현한다. 또, 평등-자유는 보편성을 함축하여 모든 인간에게로 확장되는 인권, 즉 권리의 보편화를 함축하며, 평등-자유는 정치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권리,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의미한다."

 

  결국 발리바르에 있어 "인권, 민주주의, 정치는 모두 동의어"가 된다. 그에게 인권은 근대 사회계약론 모델에서 초역사적이며 초월적인 개념으로만 설명되던 '전(前)-정치적' 단계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갖는 권리가 아니라, "시민상태에 내재하고 있는 '정치적 계기'로서, 즉 '정치의 장소'로서 재규정"되는 권리이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년~)

 

바디우.jpg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년~)는 발리바르에 비해 1960년대에 알튀세르가 개진했던 이론적 편향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에는 알튀세르의 유산을 자신의 철학적 체계 속으로 전유하여 새로운 의미를 가진 철학적 개념들을 생산한다. 바디우의 전유와 계승이 무엇보다도 잘 드러나는 지점이 ‘주체(sujet) 혹은 주체성의 문제이다. 알튀세르는 정치를 "어떤 특정한 원리나 조건에 의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귀결이 아니라",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구조주의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진영 선택'을 통해 이루어지는 어떤 "주체성의 표현"으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바디우는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으로 설명되는 이러한 입장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의 '존재와 사건'이라는 독자적인 개념을 형성했다.

 

  바디우에게 있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하나의 대상'으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적인 전체를 거부하는 '다양체(le multiple)'로 있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주체'는 어떤 원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름을 붙이면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는 어떤 정치적 '사건'의 효과와 귀결을 탐색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치'에 관한 문제에 있어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주체를 상정하지 않으면서도 '주체적인 것'의 사유 가능성을 정초하는 것이었다.

 

  특정하게 주어진 어떤 체계의 원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치적 '사건'이 발생한다면, 이 사건은 어떤 해석의 대상도 아니며 오직 명명의 대상일 뿐이다. 바디우에게 '정치'란 이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승인으로서의 이름을 부여하는 이 명명 행위로부터 시작되어, 이 명명된 사건의 귀결들에 대한 탐색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명의 귀결들과 효과들로서 사후에 구성되어지는 것이 바로 정치적 행위를 통해 생산될 수 있는 것이 '진리(v?rit?)'이며, 이 과정을 '진리절차'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이 사건에 의존해 있는 요소들을 구별하여 구성하는 이 모든 절차를 그는 '충실성(fid?lit?)'이라고 개념화 하며, 이 진리절차를 구성하는 국지적 지점들을 '주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디우에게 정치를 통해 구현되는 "진리는 이렇게 전투적 주체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물론 프랑스혁명에서 보듯이 그 사건이 경과되면 정치적 급진성의 의미가 축소되고 왜곡되며 그것의 영향력도 안정화에 접어든다.

 

  현대철학에서 거의 폐기된 '진리' 개념을 새롭게 비틀어서 바디우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건'을 통해서만 생산되어 잠시 드러나는 그 '진리'는 지식을 통하여 사후에 표상될 뿐이다. 그리고 진리를 생산해 내는 과정 속에서 각각의 절차는 스스로의 작업이 진리인지 말할 수 없으며, 그저 진리에 무관심하게 고유한 활동에 전념하여 그 사건을 통해 진리의 명명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철학적 작업이 된다. 그런 면에서 바디우에게 '철학'이란 정치를 사유하는 장소나 정치이론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들의 조건 속에 존재하는 자기발생적 사유 활동, 행위" 그 자체가 된다.

 

  바디우의 '주체 없는 주체성' 개념을 맑스주의와의 연관 속에서 설명하자면, 주어진 상황인 사건들의 연관 속에서 선택과 결정을 내리고 프롤레타리아트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요구된다. 곧 입장의 정당화를 위한 방식이 아니라 해당 사건의 의미를 밝히는 '선언'과 그에 뒤따르는 '행위'들로 대변되는 '전사적인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디우는 "맑스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과감하게 선언했다. 그에게 있어 맑스주의는 "비정합적인 전체에 붙여진 하나의 비어 있는 이름이며,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의 이름들은 독특한 정치적 사유들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맑스주의자들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정합적 이론 체계를 가진 맑스주의의 한 경우로서 그들을 볼 것이 아니라, 알튀세르의 지적 투쟁 또한 "정치에 대한 하나의 고유하고 독특한 사유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③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re, 1940년~)

 

랑시에르.jpg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re, 1940년~)는 오늘 다루는 세 명의 철학자들 중 알튀세르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며,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한 거부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전개했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알튀세르 입장의 문제점은 정치적 행위자들이 실천하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은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진리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엘리트주의'라는 것이었다. 정치적 행위자들로서 대중들의 능력을 불신하고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입장은 '사유하는 지식인 집단'과 '사유하지 못하고 생산하는 대중 집단'의 선 긋기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적인 것과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의 구분, 말할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리, 교육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분리에 대한 저항에서 랑시에르는 '출발'한 것이다.

 

  이러한 '분할의 논리'와 부르주아 기득권 세력이 늘 사용하는 '지배를 위한 언어'에 대한 비판을 통해 랑시에르가 가진 문제의식의 핵심은 '대중은 스스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랑시에르는 정치적 계몽주의, 정치적 주체에 의한 정치적 해방이라는 인식을 애초부터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근원적 평등'은 정치적 목표의 도달점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인 것'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정치적 분할에 관한 조건을 제거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정치적인 입장인 것이다.

 

  알튀세르와의 결별 이후 랑시에르가 오랜 시간 동안의 은둔 작업 끝에 내어 놓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밤>이라는 저작을 통해 19세기 중반의 노동자들은 자본이 규정한 그들의 생활양식을 스스로 부정하고 가장 정치적인 행위를 보장하는 자율성을 획득했음을 주장했다. 낮-노동과 밤-휴식의 반복이라는 '시간'의 분할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통제하고 존재양식을 규정하려 했던 자본의 규율에 저항하여,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고, 토론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생산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 자기 자신과 싸우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힘과 가치에 대해 자각했다. 이 자각은 정치적 무대에 오르기 전에 각성과 훈련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대 위에서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힘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한 시대의 획을 그었던 맑스주의의 전통은 (현실 맑스주의 체제의 붕괴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가속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이제 실패로서 체험되고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맑스주의의 실패는 한 사상적 조류의 패배를 넘어서 "역사의 진보와 혁명에 대한 믿음의 붕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이 붕괴로부터 상반되는 두 가지 현상,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보았다. 그것은 먼저 "정치에로의 회귀"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의 종말"이다.

 

  즉, 경제적인 힘(생산력)과 사회적인 힘(계급 실천), 그것의 결합에 의한 혁명이라는 맑스주의의 정식화된 "믿음의 붕괴는 자연스럽게 고유하게 정치적인 것, 사회 및 경제적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치의 고유성으로의 회귀를 추동"했지만, 실상 이러한 흐름은 현실 속에서 정치의 고유한 공간을 "공장이나 거리가 아니라 의회, 정부기관, 사법기관"으로 한정해버렸다는 것이다. 즉, "정치는 사회를 구성하는 상이한 이익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전문가들의 업무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탈정치화에 맞서 랑시에르는 정치를 재사유하려고 한다. 그 재사유의 출발점은 젊은 시절의 지독한 스승이었던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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