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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브리핑] 데 카프카 아 카프카, 그리고 카프카

by 이우 posted Jun 23, 2014 Views 2718 Replies 0
데 카프카 아 카프카, 그리고 카프카
-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모리스 블랑쇼. 그린비. 2013년. 원제 : De Kafka a Kafka) -
- <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동문선. 2001년. 원제 : Kafka) -



이우

IMG_5414_ss.jpg   카프카의 작품 <성(城)>은 이렇게 시작한다. ‘K는 밤 늦은 시각에 도착했다. 마을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안개와 어둠에 둘러싸여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았고, 커다란 성이 있음을 알려 주는 희미한 불빛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K는 국도에서 마을로 통하는 나무 다리 위에 서서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 속을 한참 쳐다 보았다.’ 그러나 K는 성을 찾아가지 못한다. ‘길은 길게 뻗어 있었다. 마을의 큰 길은 성이 있는 산으로 나 있지 않았다. 성이 있는 산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 하다가, 마치 일부러 그런 듯 구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K는 앞으로 걸어가지만, K는 성에서 멀어지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성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K는 ‘성’에 도착할 수 있을까? K는 카프카 자신, 혹은 ‘우리’다. 많은 비평가들이 카프카의 작품을 두고 ‘관료주의’와 ‘자본구조’, ‘법리주의’의 문제를 실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파악하듯, ‘성’은 ‘관료적 권력’, ‘경제적 권력’, ‘법적 권력’이 완료되는 지점. 그 지점을 향하여 K는, 카프카는, 우리는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러나 성이 있다고 믿어지는 언덕은 안개와 어둠에 쌓여 있고, 길은 산에 가까이 가는 듯하다 휘어지거나 구부러져 있다. K는, 카프카는, 우리는 ‘성’에서 멀어지지는 않지만 ‘성’에 가까워지지도 않는다. 카프카는 소설  <성>에서 K를 성에 도착시키지 않는다. 혹은, 도착시킬 수 없다. ‘성’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다. 그저 글을 쓰는 카프카나 그 글을 읽는 독자나 ‘성’이 있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카프카는 K를 ‘성’에서 떼어놓지 않는다. ‘프라다’가 마을을 떠나자고 말하지만 ‘K’는 그 길밖에 없다는 듯 떠나지 않고 마을에 머문다. 그렇다고 K가 꼭 ‘성’에 닿을려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 K는 ‘성’이나 성의 관리인과 같은 목표를 뻔히 눈앞에 두고도 여인과 관능을 즐기고 코냑을 마시거나 일과 잠에 취한다. 더욱이 ‘카프카’는 소설 ‘성’을 미완으로 남겨둔다. K는 ‘성’에 닿기 위해 길을 떠났는데, ‘성’에 닿을 수도 없으며, 그 스스로 닿을려고 하지 않는다. ‘성’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조차 말해지지 않으며, 그렇다고 ‘마을’을 떠나지도 않는다. 이럴 때 독자는 갑갑해진다. 카프카가 쓴 장편소설 세 편 <소송>(1925)>, <성>(1926), <아메리카>(1927) 모두 미완. 완결되지 않는다. 이럴 때 독자는 더 갑갑해진다.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모리스 블랑쇼. 그린비. 2013년. 원제 : De Kafka a Kaf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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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 블랑쇼는 <카프카에서 카프카로>(그린비. 2013년. 원제 : De Kafka a Kafka)에서 그래서 카프카의 문학이 좋다고 말한다. ‘성’에 닿아야 하는 세계가 ‘실재’하는 것이라면, 성에 닿지 못하거나 닿으려고 하지 않는 K는 사실상 ‘부재’한 상태다. 성에 닿지 못하거나 닿으려고 하지 않지만, 떠날 수도 없고 떠나지도 못하는 K는 여인과 관능을 즐기고 코냑을 마시거나 일과 잠에 취하며 ‘실존’한다. 

  K는 카프카의 소설 <성>에서 태어난다. K는 <성>에 도착해 토지를 측량하기 위해 태어났지만, <성>은 그 출입구를 열어주지 않는다. 반면 K도 <성>에 도착한다고 해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성>은 관료제이자 법리로 구성되는 세계이거나 혹은 끊임없이 일해야 하는 자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K는 성을 떠날 수는 없다. 그는 <성>에 도착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성을 떠나는 것도, 성에 도착하는 것도 불가능한 K는 그저 성의 언저리를 배회하면서 실존한다. K가 성에 도착하면, K는 실존할 수 없다. ‘부재’함으로써 ‘실존’할 수 있는 세계. 바로 이것을 카프카가 그려내고 있고, 바로 이것이 ‘문학’이라고 블랑쇼는 말한다. ‘실재’하는 것이 ‘삶의 상태’이라면 ‘부재’하는 것은 ‘죽음의 상태’. 그래서 블량쇼는 그의 책 제1장에서 ‘문학은 죽음에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 신을 보는 자는 죽는다. 말에 삶을 주는 것은 말 가운데 죽는다. 말은 이러한 죽음의 삶이고, "말은 죽음을 담고 있는 삶이며 죽음 가운데 유지된다". 놀라운 권능. 그러나 여기 무엇이 있었고, 지금은 더 이상 없다. 무엇이 사라졌다. 어떻게 그것을 되찾을 것인가. 나의 모든 능력이 그것을 가지고 이후에 존재하는 것을 만드는 데 있다면 어떻게 나를 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는가? 문학의 언어는 이러한 문학을 선행하는 순간에 대한 탐구이다. 일반적으로 문학은 그것을 실존이라 부른다. 문학은 원한다. 존재하는 그대로의 고양이를, 사물의 방침' 속에서의 조약돌을, 인간이 아니라 이 사람을, 이 사람 속에 인간이 그를 말하기 위하여 버린 것을, 말의 바탕이 되고 말이 말하기 위해 배제한 것을, 심연을, 무덤 속의 나사로를, 낮으로 돌아온 나사로가 아니라 이미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악으로서의 나사로를, 목숨을 구해 되살아난 나사로가 아니라 잃어버린 나사로를, 나는 말한다, 한 송이 꽃이라고! 그러나 내가 그 꽃을 끌어들이는 부재 속에서, 꽃이 나에게 주는 이미지를 내던지고 마는 망각을 통해, 그 자체가 마치 미지의 사물처럼 갑자기 나타난 이 무거운 말의 바닥에서, 나는 이 꽃의 어둠을, 나를 가로지르나 내가 들이키지 않는 이 향기를, 나를 적시나 내가 보지 못하는 이 먼지를, 나에게 길을 기리켜 주는 빛이 아닌 이 색채를 열정적으로 불러 모은다. 내가 밀쳐 내는 것에 이르려는 나의 희망은 그런데 어디에 머무는가? 언어의 물질성 가운데, 말 또한 사물이고 자연이며, 나에게 주어진 내가 이해하는 것 이상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 가운데 머문다.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말의 현실은 하나의 장애였다. 이제 그것은 나의 유일한 행운이다. 이름은 하나의 구체적인 덩어리, 실존의 한 덩어리가 되기 위해 비실존이라는 일시적 통로이기를 멈춘다. 언어는 언어가 기어코 되기를 바랐던 그 의미를 벗어나 흐트러진 의미가 되려고 한다. 물리적인 모든 것이 우선적 역활을 한다. 리듬, 부게, 부피, 형상, 그리고 그 위에 글을 쓰는 종이, 잉크의 흔적, 책. 그렇다. 다행히 언어는 하나의 사물이다. 그것은 씌여진 사물이고, 한 조각의 껍데기이고, 돌의 파편이며, 땅의 현실이 남아 있는 점토 한 조각이다. 말은 이상적 힘이 아니라 어두운 위협처럼, 사물을 강요하여 사물을 사물 바깥에 실제로 현전하게 하는 주술처럼 작용한다. 말은 하나의 요소이며, 지하 세계로부터 막 떨어져 나온 한 부분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보편적 익명의 순간이고, 날것 그대로의 긍정이며, 어둠움 속에서 마주칠 때의 놀라움이다. 여기서 언어는 언어를 구성한 인간 없이 자기 유희를 즐기기를 요구한다. 문학은 이제 작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모리스 블랑쇼. 그린비. 2013년) p.49~50


카프카01.jpg   ‘신을 보는 자는 죽는다.’ 맞다. ‘성에 닿는 자는 죽는다.’ 성은 관료세계이자, 법적 처벌의 세계이며, 가장 많은 돈을 획득한 자본의 세계다. 최고 관료가 된 자는 오로지 최고 관료가 되기 위해 살아왔던 자신의 가치가 죽는 곳이며. 법적 처벌이 행해지면 그는 죽는다. 가장 많은 부를 위해 살아 왔던 사람은 가장 많은 돈을 획득하면 의미를 잃는다. 그렇다면, 성에 닿아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성에 닿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그렇다면 성에 닿을 수 있는가? 그러나 성은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어쩌면 성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렇다면, 성을 떠날 것인가? 성을 떠난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떠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성의 언저리에서 맴돌 뿐이다. 성에 닿아야 하는 세계에서 성에 닿지 못하는 ‘나’는 ‘부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재해서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실존한다. 이것이 ‘삶’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바로 이 실존을 보여주는 것을 문학이라고 말한다. ‘문학은 원한다. 존재하는 그대로의 고양이를, 사물의 방침' 속에서의 조약돌을, 인간이 아니라 이 사람을.’ 그러나 작가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고양이’를 표현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 못하는’ ‘고양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고양이‘라고 말하는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고양이’는 죽는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고양이’를 죽이고 ‘고양이’라고 말해져야 독자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고양이’를 상상하거나 작가가 말하고 있는 그 고양이가 아니라 전혀 다른 고양이라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독자가 작가의 의도대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고양이’를 상상한다면, 즉 문학적으로 가장 잘 말해진 언어는 ‘최고의 권능’을 가질 수 있지만, ‘신을 보는 자가 죽듯이’ 말해진 ‘고양이’라는 언어 자체는 죽어야 한다. ‘말은 죽음을 담고 있는 삶이며 죽음 가운데 유지된다.’ 문학 언어는 죽어야 살 수 있는 것이다. 부재로서 실존한다. 실존은 존재의 밖에 있다.


  … 쓴다는 것은 끝나지 않는 것, 끊이지 않는 것이다. 카프카는 놀랍게도 홀린 듯이 기뻐하며 ‘나’를 ‘그’로 대체할 수 있었을 때 문학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로 인한 변화는 훨씬 심각하다. 작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누구에게도 건네지지 않는, 중심이 없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언어에 속해 있다……. 쓴다는 것, 그것은 말하기를 멈추지 못하는 것의 메아리가 되는 것이다. (중략) 끊이지 않는 이 말에 나는 나의 침묵의 결정과 권위로 다가선다. 나는 침묵하는 나를 통하여 중단되지 않는 긍정을, 거대한 웅얼거림을 느끼게 한다. 그 웅얼거림 위에 언어는 열리고 그리하여 공허라는 어둑한 충만이 된다. …
-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그린비. 2010년. 원제 : L'espace litteraire)중에서


  문학이 ‘부재’해야 ‘실존’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작가는 늘 ‘부재’의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작가다. 카프카는 늘 ‘부재’했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년~1924년)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부유한 유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폐결핵으로 41세의 생애를 마쳤다. 프라하의 유대계 독일인. 독일인이 될 수 없으며 독일인이 될 마음도 없었지만 독일어를 사용하고 독일인일 수밖에 없었다. 독일에서 부재했으며, 체코에서도 부재했다. 아버지의 강압에 못이겨 독일계 고등학교를 거쳐 프라하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해 1906년에 법학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1908년부터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1922년 7월까지 근무하면서 평범한 지방 보험국 직원으로 근무했지만 그가 닿고 싶어하는 ‘성’은 ‘문학’이었다. 그의 직장은 카프카의 유일한 욕망이자 직업인 문학에 모순되었지만 그는 보험국 직원을 그만둘 수 없다. 직장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세계에서 그는 부재했다. 그렇다고 문학은 카프카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카프카는 늘 자신이 문학에 재능이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카프카는 문학을 떠날 수는 없었다. 문학, 혹은 작가 세계에서도 그는 부재할 수밖에 없었다.


  … 저의 직장은 저로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직장은 유일한 욕망이자 유일한 직업인 문학에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학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고 문학 이외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 저와 결합을 한다면 제가 짐작할 수 있는 한 따님께서 불행해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외부 사정에서 뿐만 아니라, 저의 본래의 본성이 폐쇄적이고 말이 없고 사교성이 없는 불청객입니다. (...) 저는 가정에서 선량하고 친절한 가족들 사이에서도 남 이상으로 서먹서먹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결혼으로 제가 달라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의 직장이 저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 
- 카프카의 <일기>(1910년∼1923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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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부터 꿈꿔오던 작가로서의 삶은 그에게 쉽사리 허락되지 않았고, 그에게 드리워진 아버지의 그림자는 짙었다. 그러나 프란츠 카프카는 1912년 ‘펠리체 바우어’를 만나면서 연애를 시작하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펠리체 바우어를 알게 된 카프카는 그녀와의 무수한 편지 왕래 속에 창작 의욕을 부추기게 되었지만 동시에 결혼이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파혼한다. 결혼해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카프카에게는 행복한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작가로서의 삶을 방해받는 일이기도 했다. 소설 <성>에서 K가 ‘성’을 따나지 못하듯, 펠리체와 헤어진 카프카는 체코인 기혼 여성 밀레나와의 교류를 시작한다. 활달하고 개방적인 여성이었던 기혼녀 밀레나는 카프카에게 적극적이었지만 카프카는 밀레나에게서도 멀어져 간다. 1913년 카프카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외친다. ‘그녀 없이 난 살아 갈 수 없고, 그녀와 함께도 살아갈 수 없을 거야.’ 결혼과 가족이라는 일상에서도 카프카는 부재했으며, 그로서는 부재할 수밖에 없었다. 

  
  … 1913년 1월초 더 이상 상황이나 기분에 따른 변화가 아니라, 그 관계를 악화시키커녕 더욱 깊게 하면서 악화되어만 가는 변화가 카프카에게 시작된다. 3월 23일 베를린에서의 만남. 그러고나서 고백의 편지를 보낸다. ‘진정한 나의 두려움, 난 결코 너를 소유할 수 없을 거야.’ (...) 5월 11일 성신강림일축일 휴가 동안 베를린에서에서의 또 한 번의 만남. 이번 만남은 그에게 얼마간 희망을, 적어도 언젠가는 그가 “그녀와 그들의 장래에 관해 여러 가지 끔직한 일들을 끝까지 따져 보고서 점차 편안한 기분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덧붙인다. “베를린에서 짐을 꾸리면서, 나는 머릿속에 전혀 다른 글을 떠올렸다. 즉 ‘그녀 없이 난 살아 갈 수 없고, 그녀와 함께도 살아갈 수 없을 거야.” 진실에 관한 고뇌가 다가오고 아울러 6월 10일 시작하여 멈추었다가 용기를 내어 16일 마무리한 편지에서 적고 있다. “나의 여인이 되길 원하는지 생각해 보렴? 넌 그러길 원하나?” 여기서 1913년 7월 1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 다툼이 시작된다. “그래.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의 시련을 받아들일 수 있겠니, 펠리체여? 불가능한 것의 시련을?” … 
-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모리스 블랑쇼. 그린비. 2013년) p.279~280

  심지어 카프카는 자신만의 문학 안에서도 부재하려고 했다. 카프카는 죽기 전 유서를 통해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모든 작품을 출판하지 말고 소각해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했다. 만약 이때 브로트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카프카라는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몇몇 작품들은 그의 생전에 출판되기는 했지만 워낙 소량이 인쇄되었고 그나마 판매율이 저조했던 탓에 초판이 출판된 후에도 수년 동안 시중 서점에서 초판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서를 읽은 후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안하네, 카프카! 하지만 그 약속은 지킬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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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모리스 블량쇼가 발견한 카프카는 ‘부재’해야 ‘실존’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모리스 블량쇼가 발견한 카프카 문학은 ‘부재’함으로써 ‘실존’하는 문학이었다. 이로써 명확해지는 것은 카프카는 실존주의를 명확하게 표현해내고 있으며, 모리스 블량쇼는 이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프카 문학은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았고, 무엇보다도 인간 운명의 부조리성, 인간 존재의 불안과 무근저성을 날카롭게 통찰하면서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한 점에 있다고 말해지는 것이리라. 모리스 블량쇼는 명확하게 이 지점을 찾아냈다. 그러나 모리스 블량쇼는 카프카 문학을 해석하며 주석을 다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카프카를 카프카 자신에게로 돌려보낸다.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데 카프카, 아 카프타(De Kafka a Kafka)…. 


  … 문학은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며 세계도 아니다. 문학은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의 사물들의 현전이요, 세계가 사라지고 난 이후의 사물들의 투지이며, 모두가 지워지고도 남아 있는 것의 완강함이요, 아무 것도 없을 때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오는 얼떨떨함이다. (...) 문학은 나 없는 의식이요, 광물의 빛나는 수동성이며, 멍멍함 그 밑바닥으로부터의 명철함이다. 문학은 밤이 아니라 밤의 강박이다. 문학은 밤이 아니라 스스로 놀라기 위해 끊임없이 깨어 있는, 그러한 까닭에 계속해서 흩어지는 밤의 의식이다. 문학은 낮이 아니라, 낮의 빛이 되기 위해 버린 쪽의 낮이다. 그리고 문학은 죽음도 아니다. 왜냐하면 문학에서는 존재 없는 실존이, 실존 아래 남아 있는 불가능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문학은, 드러내는 데 무력해지면서, 드러냄이 파괴하는 것의 드러남이 되려고 한다. 비장한 노력이다. 문학은 말한다. 나는 더 이상 표상하지 않고 존재한다고. 나는 의미하지 않고 제시한다고. …
-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모리스 블랑쇼. 그린비. 2013년) p.50~51


<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동문선. 2001년. 원제 : Kafka) 

 책_카프카소수적인문학을위하여ss.jpg 그러나 실존주의가 그러하듯 모리브 블량쇼가 발견한 카프카는 참으로 난감하다. 카프카 문학이 부재로써 존재하고, ‘표상하지 않고 존재’하며 ‘의미하지 않고 제시’한다고 해서 카프카 문학이 읽혀지는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읽혀지지 않는다면, 부재로서 존재하지 못하며, 표상하지 않고도 존재하지 못하며, 의미하지 않고도 제시할 수 없다. 시지프스가 올림푸스 산정으로 돌을 밀어 올려야 존재할 수 있지만 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지프스가 돌을 밀어내는 행위를 중단할 수 없으며 그의 형벌은 계속된다. 돌을 밀어내며 지쳐 쓰러지는 시지프스. 어쩌면 시지프스의 죽음이야말로 시지프스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일지 모른다. 그러나 죽음이란 불가능하다. 시지프스가 행하는 것은 영원한 형벌. 그의 죽음을 허락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시지프스. 그 애매함 앞에서 형벌을 즐길 줄 아는 ‘초인’이 되라고 하는 것은 독자들로서는 난감한 일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발견한 카프카는 욕망하고 생성하며 ‘소수적’ 글쓰기로써 ‘도래할 민중’을 창조하는 ‘문학기계’였으며, 들뢰즈와 가타리가 발견한 카프카의 문학은 늘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소수적인 문학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수적이란 변화와 생성을 만들어내는 원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세계는 차이를 반복하며 무한하게 진행되면서 변화하고 생성하는 것이다. 다수적인 문학이 현재 지금의 세계 질서를 따라가고 동조하며 재현(Re-Presention)하는 것이라면, 소수적인 문학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세계 질서를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선언하며 표현(Presention)하면서 변화와 생성을 만들어내는 문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에서 카프카 문학을 통해 변화하고 생성하는 세계를 발견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적인 문학의 특징은 언어의 탈영토화,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직접성의 연결,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다.

   카프카 문학은 소수적인 언어를 사용해 새로운 언어를 생성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독일 제국의 변방인 체코에서 다시 또 변방인이었던 유태인으로서 자수성가해 프라하의 상류 사회에 막 편입된 사람답게 카프카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장남 프란츠를 잘 교육시켜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문학이나 예술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공용어였던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해 독일어 학교에 프란츠를 입학시킨다. 우리가 영어를 죽어라 배우는 것처럼 당시 프라하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제국의 지배어였던 독일어를 배워야만 했던 것이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유태인답게 자신이 고생스럽게 살아온 시절을 보상받고, 신분상승을 위해 아들을 자기 자신의 인생설계에 맞게 키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반드시 자신의 사업을 물려받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분상승을 위래 독일어 교육을 받아 관료사회에 자식을 진입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버지의 열망이 강한데 반해서 아들은 섬세하고, 내성적인 존재였던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였다. 어린 아들이 밤중에 물을 달라고 칭얼거리는 모습에, 아버지는 나무라다 못해 내복만 입은 카프카를 추운 발코니 밖으로 내쫓고, 문을 잠가 버리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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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체코의 유대인 카프카는 독일어로 글을 써야만 했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와 미국 사회의 하층민이 된 흑인이 영어를 써야 했던 것처럼 독일어로 글을 써야 했던 카프카. 위와 같은 경우 오직 두 가지 방식만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러한 독일어를 인위적으로 더욱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으로, 상징주의, 몽환주의, 신비주의, 은폐된 기표 등과 같은 모든 문학적 언어를 동원하는 것이다. 당시 프라하학파가 선택했던 방법인데, 구스타브 마이링크나 막스 브로트를 포함한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에 속했다. 카프카는 다른 방법을 발명한다. 프라하의 독일어를 있는 그대로, 심지어 그 빈곤한 그대로 선택하는 것이 그것이다. 간결하고 건조하게 사용하지만 강렬도 속에서 진동하게 만드는 것. 모든 상징적인 용법, 혹은 의미적 내지 단순한 기표적 용법에 대해서 언어의 순수하게 강도적(强度的)인 용법을 대립시키는 것. 비형식화된 완전한 표현, 강렬한 질료적 표현에 이르는 것. 그래서 마침내 카프카는 독일어에서 새로운 변화를 생성해 낸다. 미국사회의 흑인이 그들만의 ‘흑인 영어’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소수적인 문학의 두 번째 특징은 모든 것이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다수적인 문학이 가족이나 부부간의 갈등 등 개인적 문제에 전착하고 사회적인 질서 유지에 복무하는 반면, 소수적인 문학은 개개인의 문제가 직접 정치적인 것으로 연결되어 변화의 힘을 만들어 낸다. 앞서 말해진 바와 같이 카프카의 문학은 관료주의(<성>), 법리주의(<소송>), <경제주의(아메리카)>와 직접 연결되어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 세 번째 소수적인 문학의 특징은 모두 집합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소수문학에서 말해지는 각자의 말은 이미 하나의 공동된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며, 그가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이미 정치적인 것이 된다. 바로 그로 인해 문학이 집합적인 의미를 가지며 심지어 혁명적 기능을 떠맡기도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부재’의 상항 속에서도 적극적인 연대를 생산하는 것이다. 문학은 문학의 문제이기보다 민중의 문제이며, 사회 구성원의 문제가 된다.

  카프카는 작품 안에서 어떤 생성과 변화를 마련하고 있을까? 이 책에서 들뢰즈는 접속구(connecteur)라는 개념을 통해 작품 속 주인공들이 연쇄되고, 변화되고, 증식된다는 것을 설명해 낸다. 모리스 블량쇼가 발견한 카프카가 ‘부재’해야 ‘실존’할 수 있다는 절망적인 세계 인식을 드러냈다면, 들뢰즈는 접속구를 통해 계열에서 계열로 옮겨 가며 변화하고 생성하는 K의 모습을 드러낸다. 카프카 문학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접속구는 젊은 여인들이다. <성>에서 ‘프리다’는 비서와 관리의 선분에, ‘올가’는 하인의 선분에 결부되어 있지만 이 여인들은 K를 ‘성’과 잡촉하게 하고 연계되게 하고 인접하게 만든다. <변신>에서 ‘누이’는 가족에 속하지만 가족에서 탈주할 수 있는 의사를 가지고 있고, 하녀와 하급 고용인들은 관료적 계열의 맨 층에 있으면서 관료주의에서 탈주하려는 최대한의 의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K를 늘 다른 선분, 다른 영역, 다른 영토를 탈영토화시킨다. 카프카의 소설 <아메리카>에서는 하녀가 K를 범하면서 K는 아메리카라는 이국땅으로 탈영토화되며, ‘클라라’는 삼촌의 집에서 밖으로 탈영토화시키며, ‘테레즈’는 옥시텐털 호텔로, ‘브루넬다’는 K를 오클라호마 대극장으로 탈영토화시킨다.

카프카04.jpg   들뢰즈에 따르면, 문학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카프카 개인도 이 경계선 위에 있다. 그는 상해 보험 회사에서 그는 노동재해, 기계 유형에 따른 안전도, 노사갈등 및 그에 상응하는 문서를 담당하며 존재하지만  사회의 억압적인 구조 알아냈으며 억압없는 이상 사회를 꿈꿨다. 이 보험국은 사회보장법의 공포에 따라 설치된 반관반민의 기관으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험 업무를 진행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카프카가 주로 맡았던 임무는 기업의 이의제기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거나 노동자 재해 보험국의 일을 홍보하는 선전문을 작성하거나, 법률가로 법정에 출두하여 보험국을 변호하는 일, 라이헨베르크의 북부 공업지대의 공장들에 대한 감독 출장 등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 카프카가 이곳 보험국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근무한 까닭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을 한다는 보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프카가 사랑했던 여인들도 카프카에게는 하나의 접속구였다. ‘펠리체 바우어’를 만나고 연애를 시작하며 카프카는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처음 펠리체를 만난 카프카는 1917년까지 무려 500여통에 이르는 편지 왕래를 시작했다. 그는 펠리체를 만난 처음 3개월 동안에만 100통의 편지를 썼다. 그는 펠리체 바우어와의 만남을 통해 창작의 의욕을 북돋우게 되었는지 여러 편의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이 해 여름 카프카는 바이마르를 일주일간 방문하게 되는데 그는 이때 괴테와 실러같은 작가들의 흔적을 찾는데 주력했다. 한편 그의 친구 브로트는 로볼트 출판사를 방문하여 카프카의 단행본 출판에 대하여 협의했다. 브로트를 아끼던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는 브로트에게 언제 작품을 출판할 것인지 물었는데, 브로트는 자신의 작품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보다 굉장한 작가를 발견했다며 카프카를 추천했다는 일화가 있다. 어쨌든 카프카의 첫 작품집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로볼트 출판사에서 800권 한정판으로 간행되었으며 펠리체 바우어는 1913년에 <화부>, 1915년에 <변신>, 1916년에 <선고> 등을 펴내게 하는 접속구였다.


데 카프카, 아 카프타(De Kafka a Kafka), 그리고 카프카(Kafka)

  이처럼 모리스 블량쇼가 카프카 문학을 통해 ‘부재’를 발견했다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변화와 생성의 원인을 찾아낸다. 이 책에 따르면, 카프카는 ‘부재’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생성을 거듭하며 ‘실존’한다. ‘부재’가 ‘부정’과 ‘절망’,‘고독’과 ‘결핍’, ‘과거’를 키워드로 갖는다면 ‘변화와 생성’은 ‘긍정’과 ‘희망’과 ‘공존’, ‘충만’, ‘미래’를 키워드로 갖는다. 카프카의 문학을 두고 ‘부재’로 주석을 달든, 혹은 ‘변화와 생성’의 주석을 달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카프카의 문학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생성의 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모리스 블량쇼의 말은 유의미하다.


  … 우리의 독서 노력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다양한 해석의 공존이 아니라 각각의 주제가 부정적 의미로, 때로는 긍정적 의미로 나타나는 비밀스러운 가능성 때문이다. 이 세계는 희망의 세계이자 형벌의 세계이고, 영원히 닫힌 세계이자 무한한 세계이며, 부당함의 세계이자 과오의 세계이다. (...) 그의 작품에서는 모든 것이 장애이지만 모든 것이 단계가 될 수 있다. 이보다 더 어두운 글도 드물지만, 그 결말에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글조차 궁극의 가능성을, 미지의 승리를, 다가갈 수 없는 요구의 빛남을 표현하기 위해 글의 흐름을 뒤집을 준비가 되어 있다. 부정적인 것을 파고 들었기에 그는 거기에 긍정적인 것이 될 기회를, 단 한 번의 기회를, 실제로 끝내 실현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 반대되는 것이 끊임없이 드러나 보이는 그러한 기회를 부여한다. …
-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모리스 블랑쇼. 그린비. 2013년) p.81


  ‘부재’와 ‘부정’과 ‘절망’,‘고독’과 ‘결핍’, ‘과거’를 키 워드로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변화와 생성’, ‘긍정’과 ‘희망’과 ‘공존’, ‘충만’, ‘미래’를 키워드로 갖는 카프카 문학. 이것은 ‘나’의 상황, ‘우리’의 상황, 나아가 ‘세계’의 상황을 잘 보여주며, ‘나’가, ‘우리’가, ‘세계’가 존속하고 나아가야 할 이유를 선명하고 명확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부재’와 ‘부정’과 ‘절망’,‘고독’과 ‘결핍’, ‘과거’를 긍정하면서 ‘변화와 생성’, ‘긍정’과 ‘희망’과 ‘공존’, ‘충만’, ‘미래’로 나야가야 하는 것이 삶이기 때문에. 어쨌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봐, 로스만, 각오는 됐나?”
  “오, 물론이지!”
- <아메리카>(프란츠 카프카 원작. 레알 고부 그림. 이숲. 2014년) 표지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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