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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알랭 드 보통의 '불안'

by 이우 posted Dec 07, 2013 Views 3720 Replies 4

 


알랭 드 보통,

근대적 주체와 ‘구성되는 주체’ 사이에서 길을 잃다
- <불안>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 은행나무 | 2011년 | 원제 : Status Anxiety(2004년) -

 


 

이우

 

책_알랭드 보통_불안_s.jpg    이런저런 이유로, ‘알랭 드 보통’(이하 ‘보통’)이 쓴 책 <불안>을 읽었다. ‘알랭 드 보통’은 삶을 ‘불안을 떨쳐내고, 새로운 불안을 맞아들이고, 또 다시 그것을 떨쳐내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정의하고,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겪는 다양한 종류의 불안 중 '지위(地位, status)*'와 관련된 ‘불안’을 탐구한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 생기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사랑 결핍’, ‘속물 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 그리고 마침내! 어떻게 이 ‘불안’을 해소할 것인지에 대해 해법을 제시한다.

 


‘보통’,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사람에게 지위를 확보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다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들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불안>(RIDI북스 전자책 p.468))

 

  그가 제시하는 첫번째 해법은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저런 지위를 확보하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산업가’나 ‘보헤미안’이나 혹은 ‘가족’들에게 ‘지위’를 인정받으려 하거나 인정 받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이 ‘산업가’나 ‘보헤미안’이나 ‘가족’ 중 그 ‘누구에게 지위를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은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고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했지만,  해결책은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의 원인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알랭 드 보통’이다. 

 

  ‘알랭 드 보통’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계는 단선적이지 않다. ‘산업가’, ‘보헤미안’, ‘가족’, ‘철학자’ 등 존재하는 것들이 각각 다른 계열선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관계를 주고 받으며 얽혀 있다. 그래서 ‘그 중 어느 하나’에서 ‘지위’를 인정받았다고 해서 우리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산업가’에게 인정 받았다 하더라도 ‘가족’에게 외면 당하면 불안하고, ‘가족’에게 지위를 인정받더라도 ‘보헤미안’에게 외면 당하면 역시 불안하다.

 

  ‘알랭 드 보통’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계는 고정되지 않았다. 어제 ‘산업가’에게 그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오늘 그 지위를 인정 받을 지는 알 수 없고, 오늘 지위를 인정 받고 있지만, 내일도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이 말하는 그 ‘불안’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움직이는 관계와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를 두고 우리는 '우발성'이라 부른다. 세계는 질서정연하게 구성되어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 있다 하더라도 ‘불안’을 해결하지 못하며, 설령 어느 한 곳에서 지위를 인정 받았다 하더라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가 말하는 해법은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불안을 느끼는 사람에게 지위를 확보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처럼 우매하다. 우리는 지위를 ‘확보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 ‘지위를 확보하라’는 그의 해결책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불안>을 느끼는 것은 타자가 아닌 바로 ‘나’다. ‘나’는 이런저저런 세계 속에서 지위를 확보하지 못해, 혹은 확보하고 싶은데 확보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한 것이다. 이런 우리가 그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명확하다. 자신이 이런저런 지위에 대한 욕심을 버리거나, 혹은 ’내‘가 지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세계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지위에 대한 욕심을 버릴 용기가 없으며,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없다. 그저 자신의 불안을 ‘산업가’나 ‘가족’, '보헤미안', '철학자' 등 타자에게 의지해 해결하라고 한다. ‘보통’의 두번째 해법도 마찬가지다. 그의 두번째 해결책은 "만약 그 어느 곳에도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면 불안해 하지 말고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 등에 기대어 위로받아라'는 것이다.

 


보통’,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면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에게 기대어 위로 받아라’고 말하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 지를 재규정하려고 했다. /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불안>(RIDI북스 전자책 p.469~470))

 

  그의 이 두번째 해결책도 오류투성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정치와 기독교가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중세로부터 근대까지 서구 사상의 중심에는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과 ‘야곱의 사다리’와 같은 개념이 있었다. 이는 우주가 무생물인 돌로부터 시작해서 일차원적 순서에 따라 정렬되었다는 존재론과 인식론적 개념이다. 이 개념 속에서는 식물, 동물, 사람, 천사, 신이 위계를 이룬다. 또, 물고기 위에 양서류, 그 위에 파충류, 그 위에 원숭이, 그 위에 사람을 줄세운다. 이 아래에서의 모든 개별자는 계층화될 수 밖에 없고, 계층화되는 세계에서는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인간은 지위를 열망하고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필요성에 의해 성립되어 존재자(개별자, individuals)를 계층화시키고, 식민지 쟁탈을 합리화하는데 유효한 근거를 제공했던 이 개념은 세계대전을 겪으며 많이 약화되었다. 혹자는 이 개념이 지금 세계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개념은 사회 질서 및 제도 유지에 효용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정치와 기독교가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는 '보통'의 이야기는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중세형 인간일 수밖에 없다. 

 

 

 

존재의 대사슬_야곱의 사다리.jpg

 ↑ 위계적 계층 구조로 세계를 인식하는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과 ‘야곱의 사다리’.

이 개념은 우주가 무생물인 돌로부터 시작해서 일차원적 순서에 따라 정렬되었다는 견해로

세계는 위계적인 계층을 이루고 있다고 인식하는 방식이다.

물고기 위에 양서류, 그 위에 파충류, 그 위에 원숭이, 그 위에 사람을 줄세우며,

식물 위에 동물, 그 위에 사람, 그 위에 천사, 최종적으로 신이 있다는 위계를 세운다.

이 개념은 종교적 필요성에 의해 성립되어 존재자(개별자, individuals)를 계층화시키고,

식민지 쟁탈을 합리화하는데 유효한 근거를 제공했다.

세계대전을 겪으며 많이 약화되었으나 이 개념은 지금 세계에도 유효하다.

보편자(universals)를 인정해야 사회 질서 및 제도 유지에 효용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아래에서의 모든 존재는 계층화될 수 밖에 없고,

'알랭 드보통'의 말처럼 아래에 있는 계층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그나마 우리를 안심하게 하는 것은 철학과 예술 부문이 이 개념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현대철학은 근대철학이 세워 놓은 이성적인 위계 질서를 해체하면서 태동되었으며. 현대 예술 또한 위계에 사로잡힌 질서 정연한 예술 체계를 전복하면서 탄생했다. ‘장자크 루소’가 그러했으며, ‘베르그 손’이 그러했으며, ‘가타리’와 ‘들뢰즈’가 그러했다. 현대예술은 기존 질서 위계를 전복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그러하다. 현대예술과 현대철학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난지 오래다. 그런데 아직 ‘보통’은 중세의 <존재의 대사슬>, 근대의 이분법 속에 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읽혀지는 그의 코드(code)는 ‘지위 상승’과 ‘성공’이다. ‘보통’에게 있어 사람이란 ‘지위’와 ‘성공’을 향해 달리는 존재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지위을 인정받고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보통’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불안’에 떨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보통’은 지위를 얻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한다면,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 항목에 기대어 위로를 받거나 확신을 얻어라’고 한다. 마치 지금 우리 사회가 이른바 ‘휠링 열풍’에 쌓인 것처럼…. 이런저런 구조 속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휠링'을 받고 위로를 받지만 다시 그 구조로 돌아오는 순간 상처는 재발하기 마련이다. 위로 받는다고, 타자에 기대어 확신을 갖는다고 '불안'이 해소될 것인가.

 


 ‘보통’, 이성 중심의 근대적 주체와 ‘구성되는 주체’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다

 

  ‘보통’의 이 두 번째 해법 역시 ‘내가 아니라 내 밖의 무언인가에 의지하는 방식이다. 왜 그는 스스로가 ‘산업가가 되고, 철학자, 예술가, 보헤미안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지 않고, ‘산업가나, 철학, 예술, 정치나 기독교에 기대어 불안을 위로받아라’고 말하는 것일까? '보통'의 사유에 ‘사람이란 지위 상승과 성공을 향해 달리는 존재’라는 근대적인 존재론과 ‘인간이란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가 구성하는대로 존재하는 수동적인 주체에 불과하다’는 미완성의 존재?인식론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지위 상승과 성공을 향해 달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위 상승과 성공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내'가 세계를 바꾸지 못하니 지위 상승을 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한 자는 그저 위로나 받으라는 것이다. '보통'은 환경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impuissance)고 인식하며 인간 행위의 유효성(efficacite)을 믿지 않는다. 인간 행위에 부정은 염세주의를 낳는다.  

 

  '보통'이 생각하는 이런 염세주의적인 존재?인식론은 이미 오래 전에 무너졌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데카르트’식 이성 중심의 근대적 주체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거치면서 맥없이 무너졌고, 초기 구조주의에 이르러 ‘나는 세계에 의해 구성되는 주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닿은 현대 사유의 결론은 인간은 ‘구성되는 주체’가 아니라 ‘구성하는 주체’가 되어야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현대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가 ‘위계 질서’를  의미하는 ‘수목형 사유 구조’를 거부하고, 저마다의 개별자들이 새로운 의미와 차이를 생성하라는 ‘리좀(Rhizome, 넝쿨)형 사유’를 강조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우리는 이 철학사의 흐름을 두고 <주체의 설정> → <주체의 해체> → <주체의 복원>이라고 요약한다.

 

 

  “나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우리는 더 이상 나무들, 뿌리들, 곁뿌리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래 참았다. 생물학에서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무 형태의 문화는 그것들 위에 기초하고 있다. 땅밑줄기와 공기뿌리와 헛뿌리와 리좀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않다. (중략) 커다란 광기와 상업적인 전쟁 기계와 관계 맺으며 연결·접속되어 있다. (중략)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나무가 심겨져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p.35)


 

  지위와 성공에 집착하는 ‘알랭 드 보통’의 사유는 아직 이 지점에 이르지 못하고 이성 중심의 근대적 주체와 ‘구성되는 주체’ 사이, 즉 <주체의 설정> → <주체의 해체> 사이에 멈춰 있다. 아니, 멈춰 있다기 보다 이성 중심의 근대적 주체와 ‘구성되는 주체’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지위와 성공, 위계에 집착하는 그의 사유는 ‘이성 중심의 근대적 주체’이며, 자신의 불안을 외부로 위탁해 위로받으려는 사유는 ‘구성되는 주체’다. 그는 이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길을 잃었다.   ‘보통’의 이 책 <불안> 역시 서구 중세의 사유, 혹은 근대적 존재론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이성 중심의 근대 사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나무가 심겨져 있다. 정확하게 말해, 그의 사유와 이 책은 기껏해야 1700년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에 머물러 있다. <도덕감정론>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이 책 <불안>이 <도덕감정론>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에든버러, 1759)에서 이렇게 말했다. / 이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을 하고 부산을 떠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생활필수품을 얻으려는 것인가? 그것이라면 노동자의 최저 임금으로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의 조건 개선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 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불안>(RIDI북스 전자책 p.19))


 

‘보통’, ‘인간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존재’라고 말하다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 존재인가? 또, 삶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을 받고, 다른 사람들이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 체를 해주는 것’인가?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예외적인 사람(소크라테스나 예수)은 다르지만, 사람은 세상이 자신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면 스스로도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불안>(RIDI북스 전자책 p.9))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나’는 소크라테스이거나 예수인 것인가? ‘보통’은 모르고 있다. 이 세계에는 ‘세상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애덤 스미스’나 ‘보통’이 인지하듯 인간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존재가 아니다. 이런 사유 체계는 근대적 사유의 큰 특징이었다. 그러나 현대적 사유에 따르면, 인간은 저마다 ‘차이를 생성하는 개별자’이며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저마다 ‘차이를 생성하는 개별자’이며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보통’의 말처럼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본질이나 속성이 아니라, ‘내’가 ‘내 밖의 관계’ 속에 포획될 때, 즉 탐욕과 야망과 부를 추구하는 구조 속에서 ‘구성하는 주체’가 아니라 ‘구성되는 주체’로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구성되는 주체로 있어라’는 ‘보통’의 불안 해소법을 따른다면, 불안이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커지기만 할 것이다. 

 

  장자크 루소(Jacques Rousseau, 1712년~1778년)에 따르면, 인간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 존재가 아니라 '원래 선했지만 인간의 손 안에서 타락(<에밀>)'하는 존재다. ‘인간이 자연상태에서는 본래적으로 선한 존재이지만 문명화된 사회 안에서 악에 물들었다’는 기본적인 전제 위에서 루소는 자연상태와 같은 갓 태어난 어린이의 타락하지 않은 상태를 어떻게 잘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로 고민했고, 그래서 ‘인간에의 의존’이 아니라 ‘사물에의 의존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존 상태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물에의 의존인데, 이것은 자연에 기인하고 있다. 또 하나는 인간에의 의존인데 이것은 사회에 기인하고 있다. 사물에의 의존은 하등의 교육성을 지니고 있지 않아서 자유를 방해하지 않고 악을 낳는 일은 없었다. 인간에의 의존은 무질서한 것이어서 모든 악을 탄생시켜 지배자와 노예가 서로 상대방을 타락하게 만든다.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악에 대하여 저항하는 어떤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 대신의 자리에 법을 놓고 일반 의지에다 현실적인 힘을 부여하여 그것을 개별 의지로 행하는 모든 일에 놓는 일일 것이다.”(루소, <에밀>중에서)

 

  루소의 이런 생각은 그의 책 <인간불평등 기원론>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루소는 이 책에서 로크의 <통치에 대한 두 가지 논고>를 반박하며, 로크와 말하는 ‘소유’ 개념을 부정하고 ‘사유 재산은 인간을 악하게 만들 뿐이기 때문에 사유 재산 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비록 대지와 모든 피조물은 만인의 공유물이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 관해서는 그 사람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 신체의 노동과 손의 작업은 당연히 그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인간이 자연 안에 놓여 있는 것에 자신의 노동을 섞어 자신의 것을 보탠다면, 자연의 대상물은 결국 노동한 자의 소유가 된다."

- 로크의 <통치에 대한 두 가지 논고> 중에서

 

   "조그만 땅에 울타리를 치면서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기에 충분히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최초의 인간이 시민사회의 진정한 기초였다. 말뚝을 잡아 뽑거나 도랑을 채우면서 자신의 동료에게 “이 사기꾼(로크)의 이야기에 속고 있다는 것에 주의하라. 만일 땅의 결실들이 모든 사람에게 속하며 땅 그 자체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 번이라도 잊는다면 당신은 타락한 것이다”라고 외쳐야 한다. 이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범죄, 전쟁, 살인으로부터 그리고 수많은 공포와 불운으로부터 인류를 구제해 주었을까."

-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 중에서

 

 

 

 

책_인간불평등기원론.jpg  

 

↑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

루소는 이 책을 통해 '소유'라는 개념을 확립한 존 로크의 <통치론>을 비판하면서,

‘소유’와 이에 따라 발생한 사유 재산 제도가 인간 불평등의 기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루소의 사유를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보통’, 철학을 제멋대로 해석하며 왜곡시키다

 

  그런데 ‘보통’은 로크와 루소 모두를 긍정하는 이상한 태도를 취하면서 루소의 사유를 제멋대로 해석해 ‘소유가 인간 불평등을 만든다’는 루소의 사유를 ‘소유하라’는 명제로 비틀어 놓기까지 한다. ‘보통’은 <인간불평등 기원론>을 읽어 보기나 한 것일까?

 

  “그(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1754)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 가운데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하고 물었다. /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불안>(RIDI북스 전자책 p.98~99))

 

  이 책 <불안>에서 ‘보통’은 루소의 사유를 왜곡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홉스·존 로크·애덤 스미스·데이비드 흄 등의 철학자, 바이마르·미셀 프루스트·윌트 휘트먼 등의 문학가, 잭슨 앤드 그레이엄 등의 예술가, 리처드 닉슨·흐루시초프와 같은 정치가 등 많은 유명 인사를 책에 등장시키지만 자기식으로 해석하면서 비튼다.

 

  심지어, 그가 쓰는 문장마저 온전한 것이 없다.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있다(p.11)’며 현대 사유를 흉내내다가 돌연듯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느낌. 이것이야 말로 불안의 원천이다(p.13)’이라며 근대적 사유로 돌아가고, ‘사랑이란 존중이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p.16)’이며 ‘우리의 존재에 주목하고,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우리 의견에 귀 기울여주고, 약점이 있으면 관대하게 받아주고, 요구가 있으면 들어주는 사랑이 있으면 번창한다(p.15)’는 절대적 관념론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년~1831년)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다가 돌연 ‘높은 지위가 주는 유익은 물질적 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돈만큼이나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존경을 추구한다(p.18)’는 고대나 중세의 인식론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탐미주의자나 쾌락주의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존엄은 모두 갈망한다(p.18)’,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p.23)’는 등 일반화의 오류(faulty generalization)를 범하기도 한다. 그의 문장은 전자책 480페이지 중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덜거덕거거리면서 계층적으로 세계가 구성되었다는 중세의 사유, 이성 중심과 동일성이라는 근대적 사유 사이를 방황한다.

 


  ‘보통’, 그는 페시미스트(pessimist)인가, 스키조(schizophrenia)인가, 라이어(liar)인가, 아니면 앵자이어티(Anxiety Disorders)인가

 

알랭드보통.jpg   대체 그는 누구인가? 현대적 사유를 지향하는 척하면서 근대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근대적 사유인가 하면 중세철학 속에 포획되어 있는 그는 누구인가? 철학자들의 사유를 이상하게 비틀면서, 함께 할 수 없는 사유를 모두 긍정하면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알랭 드 보통’은 대체 누구인가?  그는 스키조(schizophrenia)인가? 그는 왜 '스스로 산업가가 되고, 철학자, 예술가, 보헤미안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대신 ‘산업가나, 철학, 예술, 정치나 기독교에 기대어 불안을 위로받거나 확신받아라’고 말하는 것일까? 왜 그는 인간을 그저 세계가 구성하는대로 존재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인식하며  인간 행위의 유효성(efficacite)을 믿지 않는가? 그는 페시미스트(pessimist)인가? 주의 깊게 읽지 않거나, 혹은 책에 인용되는 철학자나 예술가, 문학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면 속을 수밖에 없는 ‘알랭 드 보통’의 책 <불안>은 또 무엇인가? 그는  라이어(liar)인가? 

 

  그는 ‘모든 인간이 지위와 성공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지위 상승 욕구와 성공 욕구를 위로받고 싶어하는  페시미스트(pessimist)일지 모른다. 이를 위해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 정치가를 난도질하고 그들의 사유를 비틀면서 독자를 속이는 ‘라이어(liar)’일지도 모르며, 혹은 자신을 세우지 못해 세계가 구성 되는대로 자신을 재단하는 ‘동일자(同一者)’일 수도 있다. 혹은! '알랭 드 보통' 자신이 극심한 ‘불안장애(Anxiety Disorders)’를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여러분, 사기꾼 존 로크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이 우리 모두의 것이며 땅이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님을 망각하면, 당신들은 파멸이오"라고 외쳤다.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여러분, 사기꾼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믿지 마시오. 만일 우리가 지위를 차지해야 행복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파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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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위(地位, status) :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지위(status)'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 '지위(status)는 신분이라는 뜻의 statum('서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stare의 과거분사)에서 파생되었다. 좁은 의미에서 이 말은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을 가리킨다(기혼자, 중위 등). 그러나 넒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가리키며, 이 책에서는 이 의미가 중요하다(<불안>(RIDI북스 전자책 p.7))."

 

    그러나 지위(地位, status)의 개념을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라는 좁은 의미로 해석하든,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이라는 넓은 의미로 해석하든 이 리뷰의 논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좁은 의미든, 넓은 의미든 '지위(地位, status)'는 위계적 질서, 혹은 계층 구조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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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정현 2013.12.16 00:02
    '보통'을 만나야 하는데, 심히 불안하네요. ㅎ 실제 툭 툭 튀어 나오는 분열증을 앓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치는 요즘... 숨 돌리고 왈책모임 준비해야겠습니다. ...
  • profile
    이우 2013.12.16 20:39

      '보통'이 이 시대 읽혀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가 말씀하신대로 '분열증'을 앓다보니 시쳇말로 '힐링'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힐링'하고나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보면 또 상처 받듯이, '보통'의 불안 해결책도 다시 자리로 돌아오면 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네요. 큰 일입니다. 이 시대의 분열증.

  • ?
    감사 2016.10.26 18:49
    정말 잘읽었습니다
  • profile
    이우 2016.10.26 20:15
    다행입니다. 좋은 삶,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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