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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브리핑] 폭력이란 무엇인가(2/2)

by 이우 posted Dec 29, 2011 Views 5256 Replies 4

 

 

 

이전 게시물 <[북브리핑] 폭력이란 무엇인가(1/2)>에서 이어집니다.

 

 

 

 

 

04. 관용(寬容)이라는 ‘텅 빈 제스처’

 

 

  제4장 <관용적 이성의 이율배반>에서 지젝은 ‘관용(寬容)'9)이라는 ’텅 빈 제스쳐‘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관용이라는 것을 저마다 다른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이라고 한다면, 차이로 인하여 생기는 폭력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관용의 문제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래, 네가 갖고 있는 차이를 인정하겠다’는 관용의 논리에는 ‘그러니 너도 내가 갖는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 암묵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0) 만약, A가 B가 가진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는데, B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A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A가 분노하며 폭력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차이에서 생기는 폭력이 눈에 모이는 주관적 폭력이라면, 관용의 태도는 주관적 폭력을 만드는 <객관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관용’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달고 말입니다. 여기서 지젝이 말하는 ‘차이’에 대한 견해는 맞수 ‘들뢰즈’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차이를 부정하는 동일자의 사유, 동일성의 철학은 자신이 가진, 대개는 문명이나 진리라는 좋은 이름으로 불리는 척도에 맞추어 자신과 다른 것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척도에 맞추어 동일화하려고 합니다. 동물들의 탈을 쓰고 동물 소리를 내며 춤을 추는 흑인들의 행동을 ‘미개한 것’ 혹은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문명’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모습대로 동일화하려는 서구인들의 오랜 시도들이 바로 그런 태도를 가장 극단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들, 다양한 자질들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성적’이라는 하나의 척도에 비추어 동일화하려는 교육체제에서도 ‘동일자의 사유’, 혹은 ‘동일성의 철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차이란 고무되고 긍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것이 되고 있지요. ... (중략) ... 차이의 철학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차이를 만드는 것, 자신을 스스로 차이화하는 것입니다. (중략)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 다른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거나 그것을 보존하는 게 아니라, 일차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 ‘차이를 만드는 것(make difference)'이고, 나 자신이 다른 것으로 변이하는 것이며, 이런 이유에서 나와 다른 것이 만나서 나 자신이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겁니다. 나와 다른 것을 통해 내 자신이 다른 무언가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나와 다른 것을 반갑게 긍정할 수 있을 겁니다. 나와 다른 것은 내가 변이하여 또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뜻하니 말입니다. 이것이 차이에 대한 진정한 긍정입니다. ... (중략) ...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는,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내야 하는 무엇이며,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현재와 다른 모습으로 변이함으로써 생성되는 무엇입니다.” 11)

 

 

 

중동분쟁.jpg

 

▲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 석유 자원을 둘러싼 강대국의 개입, 쿠르드족 문제,

이슬람교 내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등으로 인해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중동분쟁.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그렇고, 이슬람 문화와 기독교 문화가 그렇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분단 상황은 어떨까요? 남과 북이 서로 용인하고 인정한다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관용하자고 외친다’는 것과 실재로 관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관용하자’고 외치기 전에 이미 받아들였을 것이고, 관용을 외친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자‘, 혹은 ’사랑하자‘고 그럴 듯하게 외치지만 문제의 근원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지젝은 이 장에서 관용의 태도가 아니라, 차라리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 ‘급진적인 행동’으로 <객관적인 폭력>을 없애자고 제안합니다. 지젝이 보기에 종교는 너나없이 ‘사랑하라’고 관용을 외치지만 폭력을 만드는 커다란 구조입니다. ‘수백 명의 무고한 이들을 날려버리는 일조차도 신의 의지를 행사하는 도구’(194p)가 되고, ‘신과 연결되어 있다면 인간이 만든 여러 제약 사항(윤리, 법, 질서 등)을 위반해도 깨끗하게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194p)입니다. 그래서, 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정당화하는 폭력(신적인 폭력, 이슬람과 기독교 등)이 생깁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윤리적인 것에 대해서는 종교가 판단하지 않는다는 근본주의적 신조를 제안한 바 있다. 아우구수투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대가 좋을 대로 행동하라“고 썼다. 이는 ’사랑하라, 그리고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라‘는 뜻이 된다. ... (중략) ... 물론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당신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바를 당신도 원하게 되리라는 함정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당신을 기쁘게 할 것이고, 하나님을 거스리는 일은 당신을 불행하게 할 것이라는 얘기다. ... (중략) ...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근거 삼아 가장 끔찍한 행위까지 정당화할 수 있다는 위험이 언제나 숨어 있는 것이다.”(195p~196p)

 

   지젝은 이런 폭력 구조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서로 관용하고 받아들인다고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관용의 이성이 아니라 무신론일지 모른다‘(190p)고 말합니다.

 

  "종교를 위해 군중이 살인과 약탈과 방화를 저지른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정말로 그런 교훈(관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소리가 있다. 종교가 없다면 우리는 제몫을 위해 싸우는 한낱 이기주의적인 동물에 불과하며, 우리가 가진 도덕성이란 것도 한 무리의 늑대가 가진 도덕성과 다를 바 없고 오직 종교 덕분에 우리가 더 높은 정신세계를 가진 존재가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 (중략) ... 유일하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무신론의 가치를 복권해야 한다면, 그때는 지금이 아닐까?"(190p)

 

  또 나아가 지젝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또한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유일하기도 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모두 알고 있으면서 ‘관용’이라는 명목으로 오랫동안 분쟁을 지속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방안은 이스라엘 국민이 팔레스타인인을 받아들이든지, 혹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 국민을 받아들여 한 국가를 수립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모두가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고 ‘일시적으로 중립적인 국제기구가 통제하는, 초국가적인 종교적 숭배의 장소로 변모시키는 것’이며,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쪽 모두 실질적으로 잃을 것이 없다’(182p)고 요약합니다. 정말! 가능할까요?

 

 

 


05. ‘정치의 문화화‘가 폭력의 구조를 숨긴다

 

 

   제5장에서 지젝은 ‘정치의 문화화‘가 <객관적 폭력>을 만드는 구조가 되기 때문에 ’정치를 문화화하는 것에서 문화를 정치화는 것으로 그 초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200p)고 주장합니다. 정치가 문화화하는 좋은 사례가 앞서 이야기한 관용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생기는 불평등이나 착취 등의 많은 문제들이 비관용의 문제로 인식되고 그 해결책으로 관용을 해야 한다고 제안’(199p)되지만, 실제로는 관용을 만든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이주민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의견이나 주장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의견이나 주장은 이주민 노동자의 문제가 마치 우리가 문화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이주 노동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 관용의 문제 때문에 생겼다는 ’텅 빈 제스처‘만을 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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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0월 개봉한 영화 <완득이>(감독 : 이한 | 출연 : 김윤석, 유아인).

포스터의 왼쪽 맨 앞에 주인공 완득이를 낳은 베트남 출신의 어머니’로 출연했던 이자스민이 앉아 있다.

그녀는 실제로 베트남 출신으로 우리나라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2011년 10월 개봉한 영화 <완득이>(감독 : 이한, 출연 : 김윤석, 유아인)에서 ‘주인공 완득이를 낳은 베트남 출신의 어머니’로 출연했던 이자스민(34세, 실제로 베트남 출신으로 우리나라에서 17년째 살고 있다)은 최근 공중파 방송에 나와 ‘문화다양성을 받아들이자는 현재보다 17년 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따뜻했다’고 말합니다. 17년 전에는 식당에 가면 외국인이 왔다면서 신기하게 바라보았고, 한국 음식이 입에 맞겠냐며 주문하지도 않은 이런저런 음식을 내놓으며 먹어보라고 권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이주 노동자 문제는 문화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이주 노동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 불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가 낳은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의견이나 주장은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문화 다양성, 즉 관용의 문제로 보면서 마치 문화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면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의견이나 주장 또한 ’텅 빈 제스처‘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화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주장은 이주 노동자에 대한 정책의 실패를 가리기만 할 뿐 실제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의견이나 주장을 용인하면, 이주 노동자에 대한 경제정책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문화의 문제라고 오해하게 하고 도리어 문제를 해결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 오늘날에는 그토록 많은 문제들이 불평등이나 착취나 불의의 문제가 아니라 불관용의 문제로 인식되는 것일까? 왜 해방이나 정치적 투쟁도 아니고, 하다못해 무장투쟁도 아니라 관용이라는 게 해결책으로 제안되는 것일까? 즉각 떠오르는 답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속에 내재된 이데올로기, 즉 ‘정치가 문화화’ 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가 문화화되면서 정치적인 차이(정치적 불평등이나 경제적 착취로 인해 발생하는 차이들)는 본래의 정치적 의미가 중화되어 ‘문화적 차이’, 즉 ‘생활방식’의 차이로 변한다. 그리고 이런 문화적 차이나 생활 방식의 차이는 이미 정해진 것, 극복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저 ‘관용’의 태도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바와 같이 ‘정치를 문화화하는 것에서 문화를 정치화하는 것으로’ 그 초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정치가 문화화되는 퇴행적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 (중략) ...직접적인 해결책을 통해 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던 기획들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관용은 바로 그 정치적 실패가 낳은 탈정치적인 대용품인 것이다.”(199p~200p)

 

   지젝은 이러한 관용이 자유주의라는 근대서구문화에서 생긴다고 합니다. 근대서구문화가 특정 문화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관용할 수 없게 만들어 서로 “싸우게”하고 이런 폭력을 은폐하기 위하여 ‘관용’이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범주들(자율성, 공적 활동, 경쟁)은 남성에게 부여하고, 여성에게는 가족적 유대라는 사적인 영역을 부여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또, 서구 근대문화는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합니다. 여성 할례, 조혼, 일부다처제, 근친상간 등에는 절대로 관용의 태도를 가지지 않지만, 여성들로 하여금 성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해 성형수술, 미용을 위한 치아 임플란트, 보톡스 주입 등은 관용합니다. 그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택의 자유는 단지 우리가 억압과 착취에 동의했다는 형식적 제스처로 기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인권을 외치지만, 서구 자본주의에서의 보편적 인권이란 사실상 재산을 가진 백인 남성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교환 활동을 하고 노동자와 여성을 착취하며 정치적 지배권까지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권리입니다. 또, 우리는 자유주의 국가에서 각자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모두 조국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자유로운 의지나 선택을 앞세우지만 결국 그것은 의무이며, 선택이란 것이 있지도 않은데 마치 있는 것처럼 외양을 유지하는 ‘텅 빈 상징적 제스처’라는 것입니다.

 

 


06. 신적 폭력

 

 

  우리는 흔히 ‘정의(正義)’라는 것을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정의가 없어졌다’고 한탄 하기 일쑤고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의‘는 ’신적 폭력‘에 닿습니다. ’신적 폭력‘이란 신(神)이 자신의 중립적 위치를 버리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지상에 강림해 난폭하게 개입하는 폭력을 말합니다. 이 폭력은 ’사람‘과 ’생명‘, 그리고 법 위에 군림합니다.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는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하며, 알카에다를 세계적인 테러집단으로 규정하며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한 미국도 신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2011년 11월 1일, 미국의 특수부대가 조직 알카에다의 최고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밤 “빈라덴의 사살은 (지난 10년간 미국이 벌여온) 테러와의 전쟁에서 가장 중대한 성과 가운데 하나”라며 “이제 신의 정의가 실현됐다”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신(神‘)은 인간과 생명, 그리고 법 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초도덕적‘ 입니다. 신의 이름으로라면 어떤 전쟁과 살인, 폭력도 정당화됩니다. 이 신의 자리에 ’정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의‘ 역시 인간과 생명, 그리고 법 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외치는 사회는 피의 냄새가 배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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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폭력들. 십자군 전쟁과 911테러. 그리고,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오사마 빈라덴 사살

 

 

  신적인 폭력은 ‘정의’라는 타이틀 외에 ‘사랑’이란 타이틀도 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 ’생명‘ 그리고 ’법‘의 제한을 벗어나 군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0년 개봉된 영화 <아저씨>(감독 : 이정범 출연원 : 원빈, 김새론)의 아저씨 ’차태식(원빈 역)‘이 옆집 소녀 ’소미‘를 구하기 위해 폭력을 행합니다. 우리는 이 폭력을 승인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고, 또 ’정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인류 역사상의 전쟁은 모두 ’정의‘와 ’사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정의‘와 ’사랑‘이 ’폭력‘을 행하는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려는 것이 우습게 보인다면 진정한 혁명가는 위대한 사랑의 감정에 이끌린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속성이 없는  혁명가를 상상하는 건 불가능하다.12) (280p)"

 

  신적 폭력은 ‘그 목적을 행사하는 자가 멋대로 살인을 하더라도 천사와 같은 순결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화된 사회 공간 속에서 맹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즉각적인 정의/복수를 요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277p)을 말합니다. 신적 폭력 또한 사회나 혹은 주체(나)의 질서 속에 있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에필로그(epilogue)

 

 

  지젝은 지금까지 폭력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는 위선을 폭로’(283p)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젝은 폭력을 좋아할까요, 혹은 싫어할까요, 나아가 지젝은 폭력을 옹호할까요, 아니면 거부할까요? 어쩌면 이러한 물음은 우문일지 모릅니다. 폭력의 주체가 질서 속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면 좋아하든, 싫어하든, 혹은 옹호하든, 아니든 우리가 폭력을 만들어내는 구조 속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눈에 보인다면, 만들어내지 않으면 되고 대항하면 됩니다. 지젝은 이런 ‘주관적 폭력’의 저층인 ‘객관적 폭력’를 보여주면서 그 구조에서 벗어날 것을 말하고 있으며 ‘객관적 폭력’에 대항하라고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하나의 탁월한 이데올로기 조작이자, 사회적 폭력이 가진 근본 형식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신비화라는 점이다. 다른 형식의 폭력적 학대에 대해서는 그토록 예민한 서양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잔혹한 형식의 폭력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만드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동시에 동원해올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대단히 징후적인 일이다."(284p)

 

  이처럼 지젝은 ‘폭력’ 그 자체를 옹호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객관적 폭력’에 대하여 대항하는 ‘대항 폭력’을 승인합니다. 그러나 대항폭력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객관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사회의 일상 질서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젝은, ‘때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297p)이라고도 말합니다. 지젝이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거나 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급진적인 행동을 통해 조직해야 할 상황도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때도 있어서 실용적으로 잘 접근해야 한다. 모든 것은 상황에 달려 있다’(297p)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이 책을 우리 사회의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행동을 얻기 위하여 읽었다면 실망했을 것입니다.

 

 

 

시위_반윌가 시위.jpg

 

▲ 뉴욕을 비롯해 세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반(反) 월가(街) 시위

 

 

 

  최근 미국 뉴욕을 비롯해 세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반(反) 월가(街) 시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탐욕을 비난하며 시작된 월가 점령 시위는 증권가 봉쇄에서 시작하여 특정 인물을 지탄하는 방법으로 시위 범위를 좁히고 있습니다. 2011년 11월 11일(현지시각) 시위대는 자신들의 베이스 캠프였던 월가를 처음으로 벗어나 뉴욕 부자 동네인 어퍼이스트사이드까지 행진했습니다. 이곳에 사는 제이미 다이먼 JP 모건 회장, 헤지펀드의 대가로 알려진 존 폴슨, 미디어 재벌인 루퍼트 머독 등을 지목하며 “국민 희생으로 부를 축적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시위대는 부자 동네에 자리한 카페를 지나치며 “우리는 99%다”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정부와 일반 금융기관들이 특정 계층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일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시위는 어떨까요? ’시위’니 분명 ’폭력‘의 형태입니다. 그러나 지젝은 ’객관적 폭력‘에 대한 ’대항적 폭력‘을 승인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위를 옹호할 가능성이 큽니다.

 

  미첼 푸코는 ‘정상과 비정상, 동일자와 타자, 내부와 외부 사이에 만들어진 경계를 유지하려는 힘’을 '권력‘이라 정의하고, 권력의 행사는 항상 정당화의 형태를 수반하는데, 푸코는 이 정당화의 형태로 ’지식권력‘, ’생체권력‘, ’생산적 권력‘이라고 말했습니다. 푸코 식으로 이야기하면 지젝의 이 책은 ’권력의 정당화 형태는 객관적 폭력으로 나타난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통해 동일자에 의해 배제된 타자, 그리하여 강요된 침묵 속에 갇혀버린 타자의 목소리를 끄집어내는 것,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동일자 자신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의문에 부침으로써 양자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들려고 했다면, 지젝은 이 책 <폭력은 무엇인가>를 통해 동일자가 만들어내는 폭력 구조를 폭로하면서 ’권력을 강화하는 텅 빈 제스처에 불과한 객관적 폭력에 참가하지 말라‘, 혹은 '동일자가 만들어내는  폭력을 없애고 싶다면 텅 빈 제스처만 취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젝은 푸코와 닮았습니다. 결국 지젝은 "폭력은 정상과 비정상, 동일자와 타자, 내부와 외부 사이에 만들어진 경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나’는 ‘주관적 폭력’을 만드는 저층의 구조 '객관적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주) ..............................

 

9) 책에 번역의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의 ‘관용’이 너그럽게 용서하거나 받아들인다는 뜻을 지닌 ‘관용(寬容)’을 뜻하는 것인지, 혹은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관용(慣用)’인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관용(慣用)으로 사용했다면, 다양한 계열화의 가능성을 제한하여 어느 하나로 계열화하게 만드는 양식이나 상식, 즉, 봉상스(bon sens)를 의미한다. 한편으로, 나와 다른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여(관용, 寬容) 관습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후자의 관용(慣用)이 된다고 생각하면 이런 구분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너그럽게 용서하거나 받아들인다는 뜻을 지닌 ‘관용(寬容)’으로 사용한다.

 

10)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가타리와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 참조.

 

11)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그린비, 2009) 중에서.

 

12) <체게바라의 혁명적 인간>(플래닛, 20110) p636에서 인용.

 

 

 

 

 

이 원고는,  인문학서원 에피쿠로스 세미나 그룹 <호케포스> 북브리핑용으로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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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에피 2012.01.01 11:14

    우후~ 역시 이우님이십니다.^^

    서문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지젝을 제대로 만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북브리핑을 좋은 길잡이 삼아 길을 떠나면 되겠네요.

    '한 걸음 물러나서 보게 되면, 폭력과 싸우거나 관용을 장려하는 우리의 노력을 지탱하는 폭력을 식별할 수 있다.'  관계와의 거리를 두는 일, 만만치 않은 일이죠. 한 걸음 물러나서 보기 위해서는 현재 서 있는 나의 자리에서 벗어나 사방을 둘러봐야 하니까요.

    자~ 이제 지젝이 기다리니 가봐야 겠네요. 아직까지는 그가 꽤 맘에 듭니다.^.~

  • profile
    이우 2012.01.02 01:33

    맞는 말씀입니다. 거리를 둔다는 것,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젝은 ' 기다려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더군요. 그는, 강박을 싫어하나 봅니다. 음... 저도 긴박감이나 강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급할 때에는 도리어 돌아가려고 하지요. 그게, 때로는 큰 단점이 되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 profile
    써니 2012.03.08 09:34

    관용이라는 부분에도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었어요

    관용이라는 텅빈제스처부분을 읽고선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는 내 차이도 인정하라는 부분이 있을수 있다니 ! 

    들뢰즈 차이의 철학을 들어 설명해주신 차이라는 것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보았어요~

    내 자신을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오히려 차이를 받아드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라는
    나만의 틀속에서 벗어난 다른 사람을 보면 항상 불편 했던것 같아요 정해진 틀밖의 사람을 보고 그 속에서
    나와 다른 점을 받아드리는 날에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아닌 변화하는 내가 올 수 있다는것 ~ 실천해봐야겠어요 ^^

  • profile
    묵와 2013.04.29 11:06
    사진들이 현장감이 넘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1. 31
    Mar 2016
    03:17

    [리뷰]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소유하고 싶은 주체(Subject)가 소유 당하지 않는 대상(Object)을 이해할 수 없어 니힐(Nihil)에 빠지는『여자 없는 남자들』 <여자 없는 남자들>(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 2014년 · 원제 : 女のいない男た, 2014년) 이우 무라카미 하루키는 2005년부...
    Category리뷰 By이우 Reply0 Views2733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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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7
    Mar 2016
    16:51

    [리뷰] 허먼 멜빌의 『모비 딕(Moby Dick)』

    사흘동안 이슈메일(추방자)의 안내를 받아 대서양을 건너고, 희망봉을 너머, 보르네오를 지나, 태평양 페닝섬에 다녀왔다. 모로 누웠다가, 등으로 누웠다가, 배로 바꾸고, 등을 곧추세우거나, 새우처럼 구부러졌다가, 피쿼드호(미국 인디언 부족이름) 돛대처...
    Category리뷰 By이우 Reply0 Views299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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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
    Nov 2015
    14:38

    [강의 후기] 동물원 밖에서, 한바탕 춤과 노래를!

    인문학공동체 에피쿠로스 정현 ? ? 올 해 가을은 예천 초입의 풍년휴게소에서 맞이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어린 강아지였던 백구가 네 살을 더 먹어 성견이 되었는데도, 일 년이 훌쩍 지나 나타난 우리를 여전히 기쁘게 반겨 줍니다. ‘생강나무 노란 싹이 ...
    Category강의후기 By정현 Reply0 Views2948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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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15
    Nov 2015
    01:43

    [강의 후기] 접시꽃 핀 마당 옆, 물든 느티나무 아래

    인문학공동체 에피쿠로스 이우 서울에서 예천까지 편도 250Km, 왕복 500Km. 2012년부터 4년 동안 매년 열 번 넘게 길 위에 머무렀으니 지금까지 5만Km 이상을 달렸습니다. 적도를 따라서 잰 지구의 둘레가 4만 76.6km이니 그 동안 적도를 따라 지구를 한바...
    Category강의후기 By이우 Reply1 Views2999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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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2
    May 2015
    22:23

    [영화 리뷰] 붉은 수수밭 : 온 몸으로 밀고 나아가라

    ? 2012년 노벨문학상은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중국작가 '모옌’이 수상했다. 그가 궁금했다. 중국의 ‘한 가정 한 자녀’ 정책인 계획생육을 정면으로 다룬 최근작 <개구리>를 읽었다. ‘모옌’을 만나면서 1988년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한 영화 <붉은 수수...
    Category기타 By정현 Reply0 Views3602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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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3
    Jun 2014
    01:55

    [북 브리핑] 데 카프카 아 카프카, 그리고 카프카

    데 카프카 아 카프카, 그리고 카프카 -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모리스 블랑쇼. 그린비. 2013년. 원제 : De Kafka a Kafka) - - <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동문선. 2001년. 원제 : Kafka) - 이우 카프카의 작품 <성(城)>은...
    Category북 브리핑 By이우 Reply0 Views4032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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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07
    Dec 2013
    00:58

    [리뷰] 알랭 드 보통의 '불안'

    알랭 드 보통, 근대적 주체와 ‘구성되는 주체’ 사이에서 길을 잃다 - <불안>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 은행나무 | 2011년 | 원제 : Status Anxiety(2004년) - 이우 이런저런 이유로, ‘알랭 드 보통’(이하 ‘보통’)이 쓴 책 <불안...
    Category리뷰 By이우 Reply4 Views5728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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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8
    Feb 2012
    13:47

    [리뷰] 의식혁명_ 페이커(faker), 데이비드 호킨스

    - <의식 혁명>(데이비드 호킨스 저 | 한문화 ) - ‘데이비드 호킨스’가 지은 <의식혁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호킨스는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 “진실과 거짓까지 구분할 수 있는 능...
    Category리뷰 By이우 Reply6 Views10799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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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9
    Dec 2011
    18:03

    [북브리핑] 폭력이란 무엇인가(2/1)

    ▲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 난장이 ) 프롤로그(prologue) 2008년에 베트남전쟁1)을 배경으로 한 영화 <님은 먼 곳에>(제작 : 타이거픽쳐스 감독 : 이준익 출연 : 수애, 정진영)가 개봉되었...
    Category북 브리핑 By이우 Reply11 Views7625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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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9
    Dec 2011
    17:58

    [북브리핑] 폭력이란 무엇인가(2/2)

    이전 게시물 <[북브리핑] 폭력이란 무엇인가(1/2)>에서 이어집니다. 04. 관용(寬容)이라는 ‘텅 빈 제스처’ 제4장 <관용적 이성의 이율배반>에서 지젝은 ‘관용(寬容)'9)이라는 ’텅 빈 제스쳐‘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관용이...
    Category북 브리핑 By이우 Reply4 Views5256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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