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의 프랑스 추리소설 작가였던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 1868∼1927)가 쓴 <오페라의 유령>에서 ‘에릭’은 사랑을 위해 가면을 쓰고, 사랑을 위해 가면을 벗어던집니다. 원래 에릭에게 있어 가면은 자신의 흉측한 외모를 가리기 위한 위장용이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가 오페라를 보기 위해 2층 5번 박스석에 앉을 때, 지상의 정상적인 사람과 만날 가능성이 있을 때 가면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이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흉측하지만 가면을 쓰지 않고서도 에릭은 오페락 극장의 지하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수치심이란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다 벗고 있더라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습니다만, 다른 사람의 시선이 닿을 때에 비로소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하 세계에 있을 때 에릭은 가면이 필요 없습니다. 유령이 아니라 정상인으로 존재합니다.
▲ 프랑스 추리 소설 <오페라의 유령>(가스통 르루 저, 성귀수 역, 문학세계사, 2001)
그러나 에릭이 아름다운 오페라 가수 ‘크리스틴’을 사랑하는 순간, 절망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여자를 사랑하면서 세상은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늪이 되어 버립니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위험한 것입니다!(대부분의 경우 남자들은 생산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랑이 시작될 때, 능력이 있는 남자이든, 약한 남자이든 남자들은 생산욕을 극대화하고 자원을 축적하기 시작합니다.^^) 에릭은 ‘음악의 천사’입니다. 그의 지하 생활에서 음악은 그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존립 근거였습니다. 그가 세상에 올라오는 날은 오페라가 있는 날이고 음악은 그를 이 세상에 존재케 합니다. 그 정도면 ‘해피’했을 텐데 그 음악이 크리스틴을 만나게 하니 음악이 그를 살게도 죽게도 합니다. 영화 <배트맨>의 ‘펭귄’은 흉측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복수를 꿈꾸지만, 에릭은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가면을 벗은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 주기만을 원합니다.
<오페라의 유령>에 ‘음악의 천사’ 에릭이 있다면, 우리 시대에는 ‘팝의 천재’ 마이클 잭슨이 있습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던 마이클 잭슨이 꿈꾸었던 것은 ‘음악’이었습니다. 흑인이라는 차별은 그로 하여금 세상에 나오기보다는 차별이 없는 음악을 선택하게 했을 것이며 잭슨은 음악에 차별 없는 음악에 심취했을 것입니다. ‘빌리 진’, ‘비트 잇’ 등 잭슨의 팝은 세상을 열광시켰습니다. 음악이 차별적인 시선을 거두어가자 잭슨은 숨겨 놓았던 아픔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 되고 싶다는 숨겨진 열망! 그는 마침내 생물학적인 가면을 착용합니다.
이것을 ‘타자의 내면화’라고 합니다.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흑인인 그가 남들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백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하고 과감하게 실천하게 하는 것. 그것이 타자의 내면화입니다. 에릭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에릭은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해 가면을 쓰고 지하로 숨어듭니다.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울마저 모두 없애버립니다. 스스로도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입니다. 이 내면화의 결과는 비참합니다. 잭슨은 쉰이라는 나이에 죽었고 에릭은 유령이 되어 살아갑니다. 이처럼 시선이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간파한 미셀 푸코는 ‘시선은 권력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 가면은 시선과 시선의 마주침이 없다. 그래서 편안해진다(퓨전밴드 '훌'의 '세상울림 콘서트' /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남이섬)
‘아름다운’ 크리스틴은 ‘흉측한’ 에릭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시선이란 권력적이어서 이를 벗어나려고 하면 ‘초인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향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크리스틴이 가면을 벗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흉측한’ 자신에게 키스해 주었을 때, 즉 크리스틴에게 ‘있는 그대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게 되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름다운’ 크리스틴을 떠나보냅니다. 에릭이 시선 앞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크리스틴이 그 시선에서 자유로워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크리스틴의 고통이 되리라는 것을 에릭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여줄 준비가 된 ‘아름다운’ 크리스틴을 떠나보냅니다. 이처럼 ‘나’의 시선이 자신의 것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간편하고 편한 차림새를 좋아하는 ‘나’는 오늘도 날이 더운데도 불구하고 와이셔츠를 입고 긴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고 거기에 윗도리까지 입고 출근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늘 그것이 ‘예의’이며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조선시대에 살고 있다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루마리를 입었을 것이고, 아프리카 열대지방에 살고 있었다면 간신히 몸만 가리거나 아예 입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나’는 없고 타자의 시선이 존재할 뿐입니다. 추워서 입는 옷이 아니라면 ‘옷’도 가면의 한 형태입니다. 에릭의 망토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에릭이 썼던 가면을 의류라는 형태로 변형해 착용하는 것입니다.
▲ 나무 인형. 팔을 들고 있거나 피리를 불거나 하트를 그리더라도, 저 포즈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자의 의지다.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남이섬)
시선이 고착화된 형태로 나타날 때 그 시선은 또 하나의 권력입니다. 그래서 미셀 푸코는 ‘시선은 권력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구조 안에서 ‘나’는 나’라고 외칠 때 그 '나'는 에릭이 되어버립니다. 무엇이 그 시선을 만드는 것일까요? 영화 <복면 달호>에서 왜 ‘달호’가 가면을 써야 했을까요? 이 문제는 나와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 둡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시선을 보내고 계십니까? ‘저 사람은 가난하구나’, ‘저 사람은 명품 가방을 들고 있네’, ‘왜 저렇게 입고 다닐까’ 이렇게…. 아니면, ‘이렇게 하고 나가면 남이 어떻게 볼까’, ‘부끄러워서 못 나가겠어’, 또 ‘남들은 저렇게 좋은 집에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권력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고 ‘나’의 삶이 아니라 ‘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에릭처럼 늘 가면을 써야 하거나 반대로 에릭을 오페라 극장 지하에 가두게 될 것입니다.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영화 <복면 달호>의 결말처럼, 가면을 벗고 세상에 우뚝 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