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은 유한한 존재의 진정한 한계인가, 아니면 유한한 존재의 신(神)과의 관계인가? 시간은 유한성과 반대로 무한성을, 결핍에 반대하여 자족성을 존재자에게 보장해 줄 수 없는 관계, 하지만 만족과 불만을 넘어서 덤으로서의 사회성을 뜻하는 관계이다. 시간에 관해서 어떻게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 있는 문제로 보인다. 『시간과 타자』 는 시간을 존재자의 존재(l'etr de l'etre)라는 존재론적 지평이 아니라 존재 저편(l'au dela de l'etre)의 방식으로,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사유의 관계로 예감한다. 시간은, 예컨대 에로티시즘, 아버지의 존재, 이웃에 대한 책임과 같은, 타인의 얼굴 앞에서의 사회성의 여러 형식들을 통해서 경험해 볼 수 있는 관계요, 전적으로 다른 이, 초월자, 무한자와 가질 수 있는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앎, 즉 지향성으로 구조화되지 않은 관계 또는 종교(re-lation ou religion)이다. 지향성은 표상, 즉 다시 현재화하는 행위(re-presentation)를 내포하기에 타자를 현존으로, 현존에 함께 귀속한 자로 환원시키고 만다. 하지만 시간은 이와는 정반대로 그 통시성(通時性, dia-chronie) 가운데서 타자의 타자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오히려 사유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도록 보장해 준다.
유한한 존재자의 존재 양태로서의 시간은 결국 존재자의 존재를 각 순간으로 분산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순간은 다른 순간을 배제하고, 더구나 불안정하거나 또는 자신에게 불충실한 것으로서 다른 순간들을 과거로, 즉 그것의 진정한 현존 밖으로 하나씩 밀어내어 버린다. 그렇지만 동시에 의미와 무의미, 삶과 죽음을 암시하는 그러한 현존에 대한 번쩍이는 이념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지성이 지속을 체험해 보지 못하고서는 영원성에 대한 이념을, 즉 존재방식―이 안에서 다(多)는 일(一)이 되고 현재에 완전한 의미가 부여된다―에 대한 이념을 미리부터 소유하고 있다고 자처한 결과, 영원성은, 시간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에 빠진 채, 어느 한 순간의 불꽃임을, 반쪽 사실에 불과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항상 회집(會集)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꿈꾸고 있다는 협의를 받아오지 않았는가? 이러한 영원성과 지성적 신(神)은 결국에는 추상적이고 불안정한, 시간적 분산의 반쪽 순간으로 자인 것으로서 추상적 영원성이요, 죽은 신이 아닐까?
이와는 반대로 『시간과 타자』 에서 소략하게나마 제시하고자 했던 주장은, 시간을 사유하되 그것을 영원성의 타락(박탈)로 사유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동화(同化)할 수 없는 것, 절대로 다른 것, 경험에 의해서 동화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 또는 그 자체 무한한 것, 개념적 이해에 스스로 내맡기지 않는 것과의 관계로서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무한자' 또는 '타자'는 마치 손가락으로 하나의 단순한 객체를 가리키듯이 그렇게 지시대명사 '이'로 가리키거나 또는 구체적인 모습을 갖도록 하기 위해 정관사나 부정관사를 붙일 수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 또는 비가시성과의 관계는 절대 타자의 무한성에 대해서 인간 인식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식 그 자체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부적합성으로 인해서, 일치의 사건과 같은 그러한 사건이 여기서 가질 수 있는 부조리로 인해서 생긴 것이다. 일치의 불가능성, 부적합성, 이것은 단순히 부정적 개념이 아니라 시간의 통시성 안에 주어진 불일치의 현상 가운데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다. 시간은 이 불일치가 언제나 있음을 뜻하고 또한 갈증과 기다림의 관계가 언제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관념적인 실(絲)보다 더 가느다란 실, 통시성에 의해 끊어지지 않는 실이다. 통시성은 이 실을 관계의 역설 가운데서 보존한다. 그런데 이 관계는 최종적 공동체로서 그 관계항에 최소한 공시성을 제공하는 우리의 논리학과 심리학의 관계와는 전려 다른 개념이다. 관계항이 없는 관계, 기대되는 것이 없는 기대, 해결할 수 없는 갈증이 여기에 있다. 거리가 있으면서 동시에 가까움, 하지만 어떤 실패한 연합이나 일치가 아니라 앞에서도 말했듯이 전적으로 덤으로 주어진 것 또는 전적으로 근원적 사회성의 선(善)을 뜻하는 것, 공시성보다는 더한 통시성, 주어진 사실보다 더 값진 가까움, 자기 의식보다 더 좋은, 동등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충성, 이것이 바로 종교의 난점이며 동시에 숭고함이 아닌가? <거리-가까움>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하나의 근사치나 또는 은유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시간의 통시성은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요,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을 <전적 타자>의 무한한 것에 대한 초월로 이해할 때 시간의 <운동>은 직선적 방식으로 시간화되지 않으며 곧게 뻗어가는 지향적 광선을 닮지 않는다. 시간의 의미화 방식은 죽음의 신비라는 그 특징을 통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윤리적 모험 안에 들어옴으로써 하나의 우회로를 만든다. (중략)
주체성에 관해서는 자아는 존재의 익명적 있음(il y a)을 지배하는 것, 자기(Soi)는 자아(Moi)로 곧장 되돌아 오는 것, 자아는 자기 자신에 의해 방해받는다는 것, 그리하여 유물론자의 물질성과 내재의 고독에 사로잡힌다는 것, 노동과 아픔과 고통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짐을 짊어진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어서 세계에 관해서는 먹거리(양식)와 인식을 통한 초월, 향유 가운데서의 경험, 자기 지식과 자기로의; 복귀, 전 타자를 자신 안으로 흡수하는 인식의 빛 안에서의 고독, 본질적으로 하나(一)인 이성의 고독에 관해서 말하였다. 그 다음, 죽음에 관해서 말한 것은 죽음이란 단순한 무(無)가 아니라 소유할 수 없는 신비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내재의 동일자(le Meme) 속을 침투하며, 고독화된 순간의 단조로움과 똑딱거리는 시계소리를 깨뜨릴 수 있는 사건의 발생 가능성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다른 것, 미래, 시간의 시간성의 발생 가능성이다. 여기서 통시성은 바로 절대적으로, 타인, 여성적인 것, 아이에 관한 관계에 관해서, 자아의 생산성(fecondite), 통시성의 구체적 존재 양태, 시간 초월의 분절과 불가피한 탈선에 관해서는, 동일자가 타자 속에 흡수되는 무아경(無我境)이나 타자를 동일자로 귀속시키는 지식이 아니라 관계 없는 관계, 채울 수 없는 욕망 또는 무한자의 가까움을 말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훗날 모두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시 논의된 것은 아니었다. (중략)
초월적 타자성, 즉 시간을 열어주는 타자성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내용의 타자성(altenite-contenu), 즉 여성성을 출발점으로 해서 추구되었다. 여성성은 다른 모든 차이와 구별되는 차이(diference)로, 단지 다른 모든 성질과 구별되는 하나의 성질로서 뿐만 아니라 차이, 이 자체의 성질로 인한 차이로 우리에게 나타났다. 이러한 이념은 단순히 수적으로 둘이라는 사실과 구별되는 것으로의 한 쌍(couple)의 개념을, 예외적인 얼굴(추상적이고 순수한 벌거벗음)의 현현에 아마도 필수적인 '둘만의 사회성'의 개념을 가능케 해주었다. 얼굴은 성의 차이를 벗어나 있지만 에로티시즘에는 본질적인 요소이며, 여기서 타자성은, 단지 논리적 구별로서가 아니라 성질로서, 얼굴의 침묵 자체가 말하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통해서 지탱된다. 에로티시즘과 리비도는 윤리적으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에로티시즘과 리비도는 인류에게 '둘만의 사회성'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현대의 범(汎)에로티시즘이 보여주는 지나친 단순화를 적어도 문제삼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준다.
끝으로 우리는 『시간과 타자』 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서 살펴본 초월의 구조를 강조해 두고자 한다. 아들에게 주어진 가능성은 아버지가 소유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 자리에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그의 것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바로 부모로서 그렇다. 그의 것―또는 차이가 없지 않은 것(non-indifference)―타자를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아들을 통해서 가능한 것 너머의 가능성이 열린다!), 차이가 없지 않음, 이것을 통해서 자아는 가능한 것 너머로 넘어갈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비생물학적인 개념인 자아의 생산성에서 출발할 때, 지향적 행위의 중심이요, 원천으로서의 초월적 주체성으로 구체화된 할수 있음(pouvoir)의 이념 자체를 문제 삼는다.
- 『시간과 타자』(에마누엘 레비나스 · 문예출판사 · 1996년 · 원제 : Le Temps et L`Autre, 1947년) p.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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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문은 1948년 발간 이후 30년만인 1979년에 다시 출판하면서 레바니스가 쓴 서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