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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칸트의 비판 철학』 : 선험성과 보편성, 수동과 능동,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by 이우 posted Feb 03, 2019 Views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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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_칸트의비판철학.jpg


  (...) 선험성의 기준은 필연성과 보편성이다. 우리는 선험성을 경험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경험은 분명 우리에게 어떤 필연적인 것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언제나', '필연적으로' 혹은 '내일'이라는 말조차 경험 중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이 말들은 경험에 적용될지언정 경험으로부터 나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식할 땐 이 말들을 사용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즉 경험 가운데 주어진 것을 넘어선다. 흔히 사람들은 칸트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말한다. 확실히 흄은 이러한 넘어섬의 측면에서 인식을 정의한 최초의 인물이다. '나는 해가 뜨는 것을 천 번은 보았다'라고 사실을 확인했을 때가 아니라 '내일 해는 뜰 것이다', '물은 언제나 섭씨 100도에서 필연적으로 끓기 시작한다'라고 판단했을 때 비로소 나는 인식한 것이다.

  우선 칸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도대체 인식에서 사실이란 무엇인가?(사실의 문제, quid gacti) 그것은 우리가 선험적 표상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 선험적 표상들 덕분에 우리는 판단할 수 있다. 때로 이 표상들은 단적으로 '나타난 것들(presuntation))'이다. 공간과 시간, 직관선험적 형식들, 선험적 직관들 자체는 경험적 나타남 혹은 후험적 내용(예컨대 붉은색)과 구별된다. 또 때로는 엄밀히 말해 이것들은 '표상들(representation)'이다. 시레, 원인 등 선험적 개념은 경험적 개념(예컨대 사자의 개념)과 구별된다. 사실의 문제는 형이상학의 테마이다. 공간과 시간이 나타난 것 혹은 선험적 직관이라는 것은 칸트가 공간과 시간의 '형이상학적 해명'이라 부른 절의 주제이다. 또 지성은 선험적 개념들(범주)을 사용하며, 이 개념들이 판단 형식으로부터 연역된다는 것은 칸트가 개념들의 '형이상학적 연역'이라 부른 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경험 가운데 주어진 것을 넘어설 수 있다면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으로 주관적인 원리들 덕분이다. 주어진 것 자체는 우리가 주어진 것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해주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원리는 경험 가운데서 시행될 기회가 있어야 한다. 나는 '내일 해가 뜰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해가 실제로 뜨지 않고는 내일은 현재가 되지 않는다. 만약 경험 자체가 이를 확인해 주지 않는다면, 또 우리의 넘어섬(depassements)을 떠받쳐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즉시 우리의 원리가 시행될 기회를(터전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경험 가운데 결정하는 주관적 원리와 같은 종류의 원리에 종속되어야 한다. 만약 태양이 때로는 뜨고 때로는 뜨지 않는다면, 또 "만약 진사(辰砂)가 대로 붉어지고 때로 검어지며, 때로 가벼워지고 때로 무거워진다면, 그리고 인간이 이런저런 동물로 변한다면, 또 기나긴 낮에 당이 수확물로 혹은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다면 나의 경험적 상상력은 사유 속에서 무거운 진사와 붉은 색의 표현을 결합시킬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A 100~01 ; IV. 78) 이렇게 되면 "우리의 경험적 상상력은 그 능력에 합치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우리 자신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은 죽은 능력으로서 심성 깊숙이 묻혀 있을 것이다."(A 100 ; IV, 78)

  바로 이 지점에서 칸트와 흄은 갈라서게 된다. 흄은 인식이 주관적 원리를 함축하며 이 원리에 의해서 우리가 주어진 것을 넘어선다는 점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흄에게는 이 원리가 단지 인간 본성의 원리, 즉 우리가 가진 표상을 결합시키는 심리적인 원인처럼 보였다. 칸트는 문제를 변형시켰다. 자연을 형성하는 방식으로(자연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주어진)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표상들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는 원리와 동일한 종류의 원리, 아니 오히려 동일한 원리에 복종해야 한다. 이 동일한 원리는 우리에게서 진행되는 주관적 과정을 설명해야 하고, 또 주어진 것이 이 과정에 종속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한다. 다시 말해 원리의 주관성은 경험적 혹은 심리적 주관성이 아니라 '초월적 주관성'이다.

  이 때문에 사실의 문제에 뒤이어 그보다 상위 문제인 권리의 문제(quid juris)가 나온다. 사실 우리가 선험적 표상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표상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경험에 필연적으로 적용되는지 설명해야만 한다. 이 표상들이 경험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왜, 또 어떻게 경험 안에 나타나는 주어진 것이 필연적으로 우리의 선험적 표상을 결정하는 원리들과 동일한 원리들에 종속되는가? 이렇게 종속됨으로써 해서 우리의 선험적 표상 자체에 종속되는가? 이것이 바로 권리의 문제이다. '선험적'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표상들을 일컫는다. '초월적'은 경험을 필연적으로 우리의 선험적 표상들에 종속시키는 원리를 일컫는다. 이 때문에 공간과 시간의 형이상학적 해명에 뒤이어 초월적 해명이 나오며 범주들의 형이상학적 영역에 뒤이어 초월적 연역이 나오는 것이다. '초월적'은 경험 가운데 주어진 것을 필연적으로 우리의 선험적 표상에 종속시키며, 또 이와 상관적으로 선험적 표상을 경험에 필연적으로 적용하는 원리를 규정한다.

  독단적 이성론에서 인식론은 주체와 대상의 대응, 관념의 질서와 사물의 질서의 일치라는 이념 위에 세워졌다. 이 일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일치는 그 자체 합목적성을 함축하며 또 이 조화와 합목적성의 원천과 보증으로서 신학적 원리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와 완전히 다른 관점에 서 있는 흄의 경험론이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자연의 원리가 인간 본성의 원리와 일치함을 설명하기 위해 흄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예정조화*를 내세운다.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 부른 것의 근본 이념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조화의 이념(합목적적 일치)을 포기하고 주체에 대한 대상의 필연적 종속의 원리를 내세운데 있다. 본질적인 발견은 인식 능력이 입법적이라는 것, 보다 정확하게는 인식 능력 속에 어떤 입법자가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욕구 능력 속에도 어떤 입법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성적 존재는 자기에게 새로운 권한이 있음을 발견한다.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첫 번째 것은 바로 우리가 명령하는 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고대의 지혜 개념이 전도된다. 지자(知者)는 자연에 대한 그 자신의 복종, 또 그 자신의 자연과의 합목적적 일치로 정의되어 왔다. 칸트는 이런 지혜에 반대하여 우리가 자연의 입법자라는 비판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칸트 철학과 거리가 아주 먼 것처럼 보이는 한 철학자가 순종함을 명령함으로 대체한다는 선언을 했을 때,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빚을 칸트에게 지고 있는 것이다.**

  대상의 종속 문제는 주관적 관념론의 관점에서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칸트로부터 벗어나서는 어떤 해결도 찾을 수 없다. 경험적 실재론은 비판 철학의 불변하는 특성이다. 현상은 가상이 아니며 우리 활동의 소산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주체인 한에서 현상은 우리를 촉발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상을 산출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현상이 우리에게 종속된단 말인가? 또 어떻게 수동적 주체는 다른 한편으로는 활동적 능력(수동적 주체가 체험하는 촉발이 필연적으로 이 능력에 종속되는 그런 활동적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그러므로 칸트에게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 문제는 내재화되는 방향으로 나간다. 다시 말해, 본성상 다른 주관적 능력들(수용적 감성과 활동적 지성) 사이의 관계 문제가 된다. (....)


  註)...................

  * 바로 다음 구절이 그렇다. "자연의 과정과 우리의 관념의 연합 사이에는 일종의 예정조화가 있다. 자연을 지배하는 힘이 우리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시유와 개념이 여전히 자연의 대상들과 동일한 과정 위에 있음을 발견한다."(D. Hume,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Oxford : Clarendon Press, 1975, 54쪽)

  ** 니체를 염두해 두고 하는 말로 생각된다. 이 책의 영역본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니체와 철학』을 참조할 것을 권하고 있다. 『니체와 철학』에서 들뢰즈는 세스토프(Chestov)의 글("La seconde dimension de la pensee, " N. R. F., September, 1932)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체에게서 철학자-입법자'는 미래의 철학자로 나타난다. ...... 철학자인 한에서 철학자는 복종하기를 그만둔다. 오래된 지혜를 명령으로 대체한다. ...... 이런 의미에서 철학자의 모든 학문은 입법적이다. ..... 근세에서 이런 철학자의 이념은 칸트와 그의 비판을 통해 다시 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순종함 대신에 명령함―이것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본질이며. 비판이 오래된 지혜에 대립하는 방식 아닌가?(G. Del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aris: PUF, 1962, 104~05쪽)


 - 『칸트의 비판 철학』(질 들뢰즈·민음사·2006·원제 : La philosophie critique de Kant, 1963) <제1장 순수 이성 비판에서의 능력들의 관계> p.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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