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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힐링(Healing)과 쇼펜하우어. 현대인은 '쇼펜하우어'이거나 '키에르케고르'일 지 모른다

by 이우 posted Sep 07, 2018 Views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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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겔이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시절에 헤겔과 같은 강의 시간에 자신의 강의를 배정할 만큼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세를 보였던―수강생의 수에서는 심하게 밀렸지만―쇼펜하우어(Althur Schopenhauser, 1788~1860)는 헤겔과 정반대인 비관주의적 입장에서 맨 먼저 헤겔을 비판했다.

   헤겔 칸트를 계승했다고 표방한 것에 대해서는 당대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권위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을 뿐 불편한 심기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살을 찌뿌린 사람은 쇼펜하우어였다. 칸트는 비록 인간의 정신 속에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틀이 이미 들어 있다고 보았으나, 그렇다 해도 경험론의 전통을 버리지 못했으므로 인식의 근본이 외부의 사물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 입장이 피히테셸링을 거치면서 묘하게 주관성 속에 묻힌다 싶더니 급기야 헤겔은 절대정신이라는 희한한 개념을 만들어 모든 것을 그 안에 몰아넣지 않는가? 아무리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해소하려는 의도라고 해도 절대정신은 또 하나의 주체가 아닐까? 말로는 칸트의 선험적 주체를 반대한다 해놓고 헤겔은 실상 이름만 바꾼 선험적 주체를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더구나 그 주체가 스스로 외화시켜 객체를 만든다니 지나가는 개도 웃을 논리다.

  쇼펜하우어칸트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본체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너무 빨리 포기했다고 아쉬워한다. 학문적으로 자연과학에 대한 굴복이며, 상식적으로는 실용성에 대한 굴복이다. 우리는 본체의 세계를 알 수 있다! 그 근거는 공교롭게도 칸트가 외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본 논리와 똑같다. 우리의 정신은 외무 사물을 인식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조직되어 있듯이 본체 역시 알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고 자연과학의 피상적 영역을 넘어서서 연구하면 본체를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 자신은 본체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와 같은 존재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가 생각하는 본체의 세계란 바로 의지이기 때문이다. (...) 알다시피 도덕은 의지의 작용이 아닌가? 그렇다면 의지가 곧 본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논리에서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본체의 세계, 예지계에 속하고 의지를 실천하는 신체는 현상계에 속한다고 보았다. (...) 이제 칸트 식의 이원론은 불필요해졌다. 칸트는 물자체, 즉 본체를 알 수 없다며 포기했지만 본체는 곧 의지이므로 우리의 정신이 인식하지 못할 영역은 아니다. (...)

  의지는 인간, 혹은 최소한 생물체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기에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처음부터 오해의 소지가 컸고 실제로 숱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의지는 목표와 방향도 없고 의식적인 것도 아니며 심지어 인격과도 무관하다. 의지는 힘이고 에너지이며, 그렇게 때문에 운동과 변화를 낳는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 가는 운동, 나침반의 바늘이 북극을 가리키는 힘, 사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인력 등 이 모든 것들이 의지이다. 의지는 지성이나 이성보다 근원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지성이나 이성처럼 간사한 측면이 없고 그 자체로 순수하다. 왜? 맹목적이기 때문에!

  칸트와 마찬가지로 쇼펜하우어도 세계를 우리의 정신에 주어지는 관념이라고 본다. 그는 관념이라는 용어 대신 표상(Vorstellung)이라는 말을 쓰지만 뜻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칸트의 세계와 쇼펜하우어의 세계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표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의 주저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라는 제목을 취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말은 세계가 의지적인 부분과 표상적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는 의지인 동시에 표상이라는 뜻이다. (...)

  문제는 의지로서의 세계가 매우 어둡다는 것이다. 의지는 곧 힘과 에너지인데 왜 그럴까? 물론 세계에는 생명력이 흘러 넘치지만  그 힘은 안타깝게도 맹목적이다. 연어는 태어난 곳에서 알을 낳기 위해 회귀하다가 수도 없이 죽어가면서 맹목적으로 강을 거슬러 오른다. 매미는 땅 속에서 10년이 넘도록 애벌레로 살다가 한여름 짝짓기가 끝나면 허무하게 죽는다(사실 '애벌레'와 성충'이란 인간의 관념에서 붙인 이름일 뿐이고, 정작 매미는 땅 속에서 굼벵이로 평생을 살다가 죽기 전에 찍짓기만 하러 나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도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말한다. 그의 시대에는 유럽 세계에 포성이 멈추지 않았고 지금은 세계 많은 지역에서 테러와 반테러가 끊이지 않는다. 인터넷 포털에 뜨는 뉴스의 태반은 암울한 소식뿐이다. 맹목적인 삶은 공허하고 공허한 것은 비극이다. 더구나 그 비극은 자연적인 게 아니라 필연적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을 합리적 비관주의라고 부른다.

  우주에는 빛과 어둠이 있지만 모든 빛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다. 빛은 국지적일 뿐이고 우주의 근본은 어둠이다. 세계에는 고통과 행복이 공존하지만 행복은 잠시뿐이고 대부분은 고통이다. 어쩌면 행복은 고통을 잠깐 잊게 해주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는 쾌락이란 소극적 상태일 뿐이라면서 "만족은 쉽게 얻을 수 없고 오래 가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

  자살? 하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는 자살을 택했고 질풍노도 시대의 많은 베르테르들이 실제로 그 길을 따랐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낭만주의시대를 살았으되 낭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고 고희까지 넘기며 잘 살았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자살과 연관지은 것은 후대에 그의 시대와 그의 철학을 착각한 사람들의 발명품이다. 그는 자살 역시 의지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적인 의지의 발현이라고 보았으므로 자살을 해법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가 고통스런 삶을 치유하는 방책으로 제시한 것은 두 가지, 즉 예술과 종교다. (...)
  
  쇼펜하우어치유적 예술의 예로 드는 것은 음악이다. 단, 미술처럼 특정한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한 음악은 의지의 소산이라는 성격이 너무 강하므로 안 된다. 그러므로 교향곡과 베토벤처럼 열정적인 음악도 제외된다. 바흐처럼 수학적 형식미가 뚜렷한 음악이 바로 쇼팬하우어가 추천하는 예술이다(음표의 마운틴 구조로 작곡하는 현대의 포스트모던 음악이라면 물론 대환영일 것이다). 바로크 음악이 의외로 매우 관능적이라는 사실은 쇼펜하우어도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그가 의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회복하는 또 다른 방책으로 추천한 종교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인도 종교다. 특히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의지로부터 해탈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아니 쇼펜하우어는 2천 년만에 부활한 스토아 철학자일지도 모른다. "무(無)에 대한 어두운 인상을 버려야 한다. ... 아직도 의지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지가 완전히 소멸된 뒤 남는 것이 무일 거이며. 그 반대로 의지를 부정한 사람들에게는 세계가 모두 무에 지나지 않는다. ... 무의지, 무표상, 무세계, 우리 앞에 확실히 무만 있을 뿐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그리스도교의 성서에도 이런 구절이 있지만 쇼펜하우어는 서양 철할자들 중에서 무신론자임을 공공연히 표방한 거의 최초의 인물이며, 그리스도교보다는 힌두교와 불교에서,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신비주의금욕주의에서 대안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삶이 금욕적이지 않았던 것을 보면 역시 생활과 철학은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닐까? (...)

  쇼펜하우어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은 텐마크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다.

  변증법을 속되게 비판하는 방법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굴뚝청소부 두 사람이 굴뚝 청소를 했다. 한 사람은 얼굴이 깨끗하고 한 사람은 더럽다. 누가 세수를 할까? 답은 "둘 다"다. 더러운 사람은 더러우니까 세수하고, 깨뜻한 사람은 동료의 얼굴이 더러운 걸 보고 자기 얼굴도 더러운 줄 알고 세수한다. 하지만 답은 "둘 다 아니다"도 된다. 깨끗한 사람은 깨끗하니까 세수하지 않고, 더러운 사람은 동료의 얼굴이 깨끗한 걸 보고 자기도 깨끗한 줄 알고 세수하지 않는다. 케에르케고르는 바로 그렇게 변증법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듯 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했다. 말이 좋아 변증법이지 귀게 걸면 귀고리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

  케에르케고르는 철학자로 자처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반(反)철학자'라고 자칭했다. 정식 철학서라 할 만한 저서고 쓰지 않았다. 오로지 헤겔을 무너뜨리는 데 올인한 셈이다. 헤겔이 이와 거창한 체계를 정립했다면 차라리 자신이 장담한 대로 모든 걸 그 체계로 설명해야 옳다. 케에르케고르는 아무리 헤겔의 철학 체계가 방대하고 정교하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게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바로 실존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존재의 실존은 결코 사유의 대상의 될 수 없다. 그것은 헤겔의 체계에 미비한 점이 있어서라기보다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 그럴까? 설사 헤겔의 체계가 그 자체로 완벽하다 하더라도 실존을 사유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실존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

  케에르케고르는 '사유와 존재는 별개의 것'이라고 말한다. 헤겔의 체계로 거대한 형이상학을 상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구체적인 개별 인간의 실존을 설명하려는 것은 모기를 보고 칼을 뽑는 격이다. 예를 들어 "여강 이 씨 집안에 태어나 대학교에서 시간강사를 하다가 출판 사업에 뛰어든 남자"까지는 이성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 사람이 겉으로는 무골호인처럼 보여도 실은 남다른 감수성의 소유자라는 비합리적인 사실은 애초에 설명이 불가능하다.

  케에르케고르에게 중요한 진리는 헤겔이 말하는 주관과 객관이 모호할 변증법적 진리가 아니라 실존적이고 주관적인 진리다. 객관적 진리 같은 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설사 존재한다 해도 나의 실존과는 전혀 무관하다. 나의 모든 실천은 나 스스로 결단에 의해 이루어지며, 실천의 주체인 나조차도 언제나 일관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하지는 않는다. 나는 배가 고파도 굶기를 선택할 수 있고 행복한 생활 속에서도 자살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다. 이렇게 불확실하고 우연적이고 비합리적인 나의 실존을 절대정신과 변증법적 논리로 해명할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의 관심은 헤겔처럼 인식론과 존재론을 통합하려 하거나 새롭고 정교한 형이상학 체계를 정립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철저한 주관적 진리에 입각해 자신의 자유를 이해하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줄 아는 참된 인간존재가 되려는 것이 그의 의도다. 헤겔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소박해졌다.

  삶과 철학을 분리할 줄 알았던 '현명한'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키에르케고르는 짧은 생애 동안 그의 용어대로 '신념의 기사'로서 살았다. 그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덴마크 교회를 열렬히 비판하다가 과로한 나머지 건강을 잃고 병원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같은 시대 독일에는 삶과 철학을 완전히 일체화시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또 하나의 위대한 헤겔 비판자가 있었다. (...)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철학 』(남경태 · 들녘 · 2007년) p.358~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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