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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 '여성'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by 이우 posted Jun 07, 2018 Views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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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_나의우파니샤드서울_900.jpg


  自序
 
  시는 아마 길로 뭉쳐진 내 몸을 찬찬히 풀어,
  다시 그대에게 길 내어주는,
  그런 언술의 길인가보다.
  나는 다시 내 엉킨 몸을 풀어
  그대 발 아래 삼겹 사겹의 길을……
 
  그 누구도 아닌 그대들에게,
  이 도시 미궁에
  또 길 하나 보태느라 분주한 그대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너 이 놈, 나 죽었다는 말 못 들었니?
  나쁜 놈, 내 장례식에도 오지 않고.
 
  1994년 5월
  김혜순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서문



  新派로 가는 길 5
  김혜순


  걸어서 저 하늘까지
  저 하늘의 구름城까지 걸어가요
  저 구름城의 모습, 바로 내 모습이에요
  나는 걸어서 저 하늘의 내 안으로 들어가요
  구름城 문이 소리없이 닫히고
  城안에 나는 한없이 갇혀요
  뭉실뭉싯 살이 찌기도 해요 배가 부풀어오르고
  어느 날 살찐 아기가 튀어나오기도 해요 장딴지가
  파르테논 신전 기둥만해졌어요
  차암, 낯뜨거운 날 창문 열고
  나 한번 쳐다본 적 있으셨겠지요
  거 구름 한번 좋다 하셨겠지요?
  그러나 햇빛 양의 치맛자락 아래 그냥 그대 뜨거우시라
  놔두면서 나 혼자 마구 젖었던 거
  구름 기둥 같은 두 다리 싸안고 이리저리 뒹글었던 거
  보신 적 없다 말하진 않으시겠지요?
  내리지 않는 비로 누워서
  혼자 소용돌이치다 혼자 온몸 다 젖었던 거
  빗소리 어디서 아마득히 들리는데
  빨랫줄의 그대 속옷 하나 안 젖는 날
  있었던 거 생각나셨겠지요?
  큰 소리 마른 번개로 눈물 없이 울던 거
  말하려면 할수록 활자와 단어들이
  후드득 후드륵 뚱뚱한 내 뱃속으로 떨어지던 거
  입 안에 침만 고이던 거
  어느 날인가는 파랗게 눈 닦고
  그대 양철 지붕만 망연히 어루만지던 거
  차마 알아채지 못했다고는 안 하시겠지요?
  날마다 슬픔의 몸 바꾸며 소리쳐도
  내 몸 밖으로 물길 열리지 않던 거, 보셨겠지요?
  내 길 열어 그대 머릿결 따라 길을 내고
  그대 뺨 위로 길을 내고 싶어 눈 껌벅이던 거,
  이제 몇십번째의 이승길 걸은 듯하고
  저 높은 산 저 깊은 계속 저 神話의 굽이굽이
  다 지난 듯하여 水面 위에 내 말의 꽃 끝내 못 피우고
  그대 지붕 위에 물꽃 소리 못 피우던 거
  내 몸 혼자 뒤채고 부풀리던 거
  정녕 모르신다곤 않겠지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30~31



  아직도 서 있는 죽은 나무
  김혜순


  초승달의 눈썹이 깜빡깜빡
  열렸다 닫히면서
  애무에 젖는다
  보이지 않는 구름의 손이
  보이지 않는 달의 몸을 만지듯
  달은 칠흑의 허랑방천으로
  천천히 밀리면서
  낌빡깜빡 죽었다 깨어난다

  은은히 숲 속의 나무들이
  달의 발가락처럼 흔들리는 가운데
  어두운 밤의 난간에 기댄
  죽은 나무가 아직도 눕지 않고 서서
  문틈으로 깜빡거리는
  눈썹을 보며
  밤새도록 흐르는 달의
  살을 훔친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46



  어쩌면 좋아, 이 무서운 아버지를
  김혜순


  얘야
  천년 묵은 여우는 백 사람을 잡아먹고
  여자가 되고, 여자 시인인 나는
  백 명의 아버지를 잡아먹고
  그만 아버지가 되었구나
  (망측해라, 이제 얼굴에 수염까지 돋게 생겼구나)
  백 명의 아버지를 잡아먹고
  그 허구의 이빨로 갈아놓은
  문장의 칼을 높이 치켜들고
  나 두리번거릴 때
  거기서 문장의 사이로
  나귀를 타고 걸어 들어오는 너의 모습
  엘리엘리

  너 심겨진 밭에 약을 치고 돌아오는 아버지
  네 팔을 잘라 나뭇단을 만드는 아버지
  네 밑동을 잘라 제재소에 보내는 아버지
  양손이 사나운 칼날인 아버지
  큰 구두를 신어 디뎌야 할 땅도 많은 아버지
  나하고 놀아요, 아버지
  하면 깜짝 놀라는 아버지
  나 아버지가 되기 싫어 크 소리로 말해도
  이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살해했으므로 그만
  아버지가 되어버린 아버지
  경찰 커튼 아버지 겈정 잉크 아버지 기계 심장 아버지
  칼날같이 갈아진 양손을 모두어야
  비로소 제 가슴이 찔러지는 그런 아버지
  얘야, 나는 그런 망측한 아버지가 되었구나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49~50


  사월 초파일
  김혜순


  저 아카시아 흐드러지게 터진 골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노고단
  지붕마다 사람들이 위태롭게
  올라서서 수만 깃발처럼 펄럭거리네


  엄숙하고 경건한 장례 행력 거대한 영정 뒤로 상복을 입은 가족을 실은 검은 승용차 얘야 얘야 못 간다 에미 에비 뇌두고 네 맘대로 못 간다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라 이놈아 이 불효 막심한 놈아 수천 개의 휘날리는 만장들 뒤를 이어 대오를 지은 수만 명의 조문객들 검은 리본을 단 연도의 시민들 이곳을 주검이 통과할 수는 없습니다 시나리오대로 길을 막는 방석모 방패 삼십 분 안에 행렬을 돌리지 않으면 최류탄을 발사하겠습니다 걔는 안 죽었어 이놈들아 한정 없이 살 거야


  땡볕 아래 한없는 대치 아스팔트에 앉거나 눕는 행렬 장기전이 될 거야 그 사이로 김밥장수 커피장수 마스크를 파는 사람 사는 사람 시루떡을 팔러 온 할머니의 양은 다라이 죽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처녀 아울러 김밥과 콜라를 먹는 조문객들 저녁 시간이야 흐르러지는 대오 그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껌을 파는 아이들 신문을 파는 청년들 그 신문으로 모자를 접는 여학생들 두둑해진 전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담배장수 시장보다 김밥 값이 두 배야 바가지야 여기가 해수욕장이냐 그 사이로 성스런 초파일의 연등 행렬 등장 낭랑한 반야심경 합장 어스름 해지는 것과 때를 맞추어 최류탄 발사


  흐트러지는 대오 뛰는 아가씨의 벗겨지는 하이힐 우는 아이 탱탱 드럼통처럼 구르며 뜨거운 커피를 아스팔트 위에 쏟는 보온 물통 그걸 잡으려 뛰는 커피장수 밟히는 콜라 깡통 터진 김밥을 밟는 구두 골목으로 잠입하는 대오 두건을 쓴 사람들의 백 미터 이백 미터 달리기 어디서 물 쏟아지는 소리 깨어지는 떡시루 장삼을 펄럭이며 혹은 연등을 들고 혹은 연등을 버리고 뛰는 중들 연등 위로 넘어지는 옥색 한복 뜯기는 자주 옷고름 노랑 저고리에 붙는 불을 탁탁 손으로 치며 우는 여고생 연등을 밟는 검은 버선 전속력으로 우회하는 검은 지프


  큰일이 나긴 난 모양이야 저 연기
  바람 따라 퍼질 때마다
  눈발이 땅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네
  설악 대폭설 때처럼 저 나방Ep
  흩어지는 너 나방떼
  먹으로 달려드는 저 새떼 먹으러
  하늘 검게 칠하며 돌처럼 달려드는
  저 자동차떼
  막혔다 터져 흐르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72~74



  서울
  김혜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또 유리문이 나온다, 유리문 안쪽엔 출구라고 씌어 있고, 바깥쪽엔 입구라고 씌어 있지만 그러나 나가든 들어가든 언제나 너는 어떤 몸의 내부에 속해 있다. 마치, 난자를 만난 정자가 그녀의 집에 영원히 체포되듯 너는 거기에 속해 있다. 내부의 사람이면 누구나 유리문을 밀고 나가 또 하나의 유리문을 향해 걸어가야 하며, 그곳을 나와서도 또 하나의 유리문을 열어야 한다. 밤이 오면 어떤 유리문들은 네온 사인을 달고 여기가 정말 출구예요 말하는 듯하지만 그러나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어떤 유리문을 열면 길 잃은 파리가 윙윙거리는 방안에 허벅지를 드러낸 여자들이 뒤엉켜 누워 있고, 어떤 방문을 열면 네 시신 위로 구더기들이 한없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유리문은 빗속을 맹렬히 달려 너는 잦은 머리칼을 흔들며 죽어라 그 문을 향해 뛰기도 해야 하고, 어떤 유리문은 지하 깊숙이 미로를 개설하기도 한다. 지하 미로의 매달린 문들의 이름을 믿지 마라. 어떤 문엔 친절하게도 오류역이라 적혀 있기도 하고, 혹은 어떤 문엔 십리를 더 가라고 적혀 있기도 하지만, 그 말을 믿지 마라. 이곳의 사람은 아무도 출구를 모른다. 설탕병에 빠진 개미처럼. 알생의 시간을 다 플어내어 만든 실뭉치 속에 숨어든 파리처럼. 이곳 가슴의 미궁은 그리 넓지 않아 새벽 네시경, 두 시간이면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주파할 수 있지만 몸 밖으로 출구를 찾은 사람은 아직 없다. 가슴속 투명한 미궁의 주인은 오늘 또 세간살이를 몽땅 싣고 정읍에서 올라온 다섯 식구를 접수한다. 그들도 이제 들어왔으므로 출구를 모르리라. 미궁의 유리문들이 점점 늘어난다. 길 위에 길이 세워지고, 물길 아래 물길이 세워진다. 너는 늘 떠나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 벙어리 네 그림자는 말하리라. 땅바닥에 누워 네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서 말하리라. 이 길로 가서는 안 돼요. 그림자 언제나 길은 틀렸어요 말한다. 날마다 복선이 증가한다. 유리벽에 뭘 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너는 유리벽에 매달려 뭔가 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너는 유리벽에 매달려 뭔가 새기려 하고 있구나. 꿈속에 있으면서 꿈속에 전령을 보내려고, 헛되이 허공중에 고운 얼굴을 새기고 있구나. 미로는 날마다 골목 끝에 유리문을 세운다. 이 몸을 깨뜨리고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내 몸 밖에서 누가 나를 아직도 부르고 있는데……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92~93



  新派로 가는 길 1
  김혜순


  종점 옆의 아파트에선 안 봐도 알지요. 이부을 덮고 그 위에다 잠을 덮고 있어도 다 알지요. 첫차가 시동을 거는 소리. 아직 잠이 들깬 조수가 내 귓속에서 하품을 아! 하는 소리. 그리고 내 속에서 w마들었던 당신이 외양간 문을 열고 나를 끌고 나오는 모습. 버스 위로 고무 호스 속의 물이 쏴아쏴아 쏟아지고 물걸레가 내 귓속을 쓰윽쓰윽 닦는 소리. 다시 물이 유리창을 타고 내리면서 어젯밤 내내 달라붙어 있던 내 눈길을 닦아내는 소리. 그리고 당신이 커다란 솔로 내 가슴을 쓱쓱 쓰어주는 것. 아직도 어둠을 질질 흘리고 있는 버스를 다시 주유소 앞으로 끌고 가 덜컹 기름통 여는 소리. 이빠이 넣어 하는 소리 안 들려도 나는 다 듣지요. 그리고 당신이 나를 끌고 논둑길을 걸어가는 것. 나를 잠시 버드나무에 매어두고 샘물에서 물 한 바가지 떠 벌컥벌컥 마시는 것. 당신이 내 숨을 꼴깍꼴깍 넘어오는 소리. 당신 바짓가랑이를 점점이 적시는 물. 돈통을 든 남자가 슬피러를 지이익 끌며 버스로 가다말고 네 귓속으로 침을 칙 뱉는 소리, 그리고 당신이 당신 가슴을 쓸며 눈을 들어 머얼리 마을 앞 행길을 바라보는 것. 아 당신의 눈동자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행길. 다시 그 눈으로 망초꽃밭 한번 쳐다보는 것. 버스가 아무도 서 있지 않은 첫 정류장을 지나 귀 밖을 나서는 소리. 버스 꽁무니에서 솟아나는 어둠이 잠시 행길을 가리는 것 나는 다 보지요. 누워서도 다 보지요. 그리고 당신이 다시 나를 끌고 개울을 거너는 것. 윗옷 밑으로 빠져나온 희디흰 러닝셔츠. 나는 누워서 다 보지요. 당신이 지나온 망초꽃밭의 꽃들이 제각각 진저리를 치며 어둠을 털어내고 애타게 당신을 바라보는 것 나는 다 보지요. 시발점이라 하지 않고 종점이라 하는 종점 옆의 아피트에 누워선 안 봐도 다 알지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99~100



  新派로 가는 길 4
  김혜순


  하얀 눈. 하얀 토끼. 밤새 하얀 눈 내려 하얀 밤. 하얀 토끼가 하얀 철창 바라보네. 하얀 가운. 하얀 시트. 하얀 팔뚝. 하얀 모자. 하얀 스커트. 돌아서는 하얀 종아리. 하얀 샌들. 하얀 눈 내려 난 하얀 아기를 낳았네. 하얀 우산을 쓰고 먹는 하얀 밥. 하얀 피 만드는 하얀 약., 나는 먹었네. 하얀 눈 속의 하얀 하나님, 창문만큼 높아지고. 라얀 눈 속의 하얀 비밀 있어요. 하얀 이불. 하얀 땀. 하얀 코. 하얀 우유 속에 우얀 쥐 너무 많아요. 하얀 숨 막혀요. 하얀 눈 자꾸 내려 길 없어요. 하얀 악마, 하얀 지옥. 너무 멀어요. 하얀 하품. 하얀 잠. 하얀 붕대를 풀어주세요. 하얀 종이 위의 하얀 글씨, 내 하얀 시를 지워야지. 하얀 하나님 무심한 순결, 내 피의 길을 밖으로 열어요.


  참 용하지
  매일 아침마다 하얀 눈꺼풀 열고 하얀 치약을 짜 하얀 이빨에 들이대면서
  하얀 장막을 찢고 대문을 나서는 거


  하얀 눈 속의 하얀 삽. 하얀 집 한 채. 하얀 창문. 하얀 커튼 속의 하얀 등. 하얀 할아버지 드세요. 하얀 맛나. 하얀 나비. 나비. 나비. 나비. 엄마 하얀 나비 좀 보세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이제 며칠째야. 하얀 엄마. 하얀 기침. 하얀 한숨. 하얀 젖가슴. 하얀 귀 뒤를 타고 내리는 하얀 눈가루. 책상 위에 소복소복. 하얀 눈 내리네. 하얀 처녀의 하얀 웃음. 차곡차곡 내려 쌓이는 하얀 새. 그 새들의 감은 눈. 하얀 새가 내리눌러요. 무거워요. 이불 좀 치워 주세요. 바닷속에 해파리들이 늘어나요. 묵처럼 단단해지는 바다. 하얀 바다. 하얀 가루처럼 부서지는 바다. 하얀 모래 위의 하얀 토끼. 하얀 팔뚝. 하얀 주사기.


  눈이 차오르네
  하얀 눈벽이 차오르네
  그래도 나 자꾸만 하얀 벽을 드높이 드높이
  오오랜 내 문명의 끝은 어디인가요?
  부드러움의 지옥
  하얀 설탕 지옥에 빠진 흰 개미
  녹아내리는 하얀 설탕
  하얀 개미를 꿀처럼 결박하는 하얀 설탕 지옥
  숨이 막혀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05~107



  강변 포장마차
  김혜순


  까만 쓰레기 봉지가 강변 포장마차 앞에 놓여 있다. 그 안으로 담배꽁초가 들어간다. 시들은 국화꽃이 구겨져서 들어간다. 코 푼 휴지가 들어간다. 쉰밥덩이가 들어간다. 남은 곱창이 쏟아진다. 국수 가닥이 말라비틀어져 들어간다. 지금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주시기 바랍니다, 단발머리가 들어간다. 말장화가 들어간다. 백납 같은 비구니 둘이 들어간다. 취한 얼굴이 트림을 데불고 들어간다. 문이 닫히려 할 때 아이 업은 여자가 들어간다. 쓰레기 봉지 안으로 씹다 버린 껌이 들어온다. 사과 깡치가 들어온다. 까만 하늘의 별도 들어온다.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가 나와 봉지를 묶어놓고 들어간다. 생리대와 생선 대가리 사이에서 인광이 터졌다가 제풀에 사라진다. 뭉게뭉게 냄새가 섞이고 아이의 머리가 불끈 솟은 다음 울음 소리가 터져 나온다. 까만 하늘엔 까만 별이 뜨고, 파아란 하늘엔 파아란 별이 뜬다. 승객을 모두 바꾼 을지로 순환 전철은 88분 후에 정확히 강변역에서 다시 멈춘다. 까만 쓰레기 봉지가 강변 포장마차 앞에 놓여 있다. 높이 뜬 역 구내로 생리대가 올라간다. 생선 대가리가 올라간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11



  황학동 재생고무공업사
  김혜순


  머리와 꼬리가 다르지 않은 뱀들
  입과 항문이 다 구멍인 저 뱀들
  칼로 내리쳐도 각각 다시
  살아나서 꿈틀거리는
  저 검은 고무 호스들
  불 꺼진 집
  한 칸을 가즉 채운
  구부러진 백만 마리의 뱀들
  눈꼽 낀 흑구렁이들
  그 중 긴 것은 시베리아에 머리를 두고
  부산 앞바다에 꼬리를 둔 것도 있다 하고
  땅 및 서울을 몇 바퀴나 빙빙 도는 징그러운 놈도 있다고 하지만
  이제 죽어 천 토막 만 토막 난 것들
  스쳐가는 오토바이의 불빛에
  잠시 등가죽에 붙은 애꾸눈으로
  창문 밖을 홀기는
  저 녹슨 구름 연통들, 혹은
  팽팽하게 긴장하며
  아랫도리를 빳빳하게 세우며
  쾌락에 전신을 맡기며, 또아리를 풀고
  힘차게 힘차게 땅속 깊은 곳의 물줄기를
  넓디넓은 정원 위에 내뿜던
  이제 갈갈리 찢어진 壯士들의 주둥이들
  주머니가 없어 욕망도 더 큰 검은 구멍 동체들
  이제 대낮이 와도
  머리와 꼬리 사이가 늘 밤인 저 연놈들
  어둠의 서식처들
  황학동 재생고무호스공업사 가득
  엉켜 잠들었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14~115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김혜순


  1.
  아침 일곱여덟시경
  나는 생각한다
  서울에서 지금
  일천이백만 개의 숟가락이 밥을 푸고 있겠구나


  동그랗구나
  숟가락들엔 모두 손잡이가 달렸다
  시끄러운 아스팔트 옆
  저 늙은 나무엔 일천이백만 개의 손잡이가 달린 이파리들이 달렸다


  2.
  하늘이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환하게 내다 걸면 태양이 일천이백만 쌍
  우리들 눈 속으로 떠오른다 그러면


  서울사람들, 두 귀를
  가죽배의 방향타처럼 쫑긋거리며
  이불을 털고 일어난다
 
  바람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 그대 숨이 내 숨으로
  들어오면 머리 위에서 신나는 풀들이
  파랗게 또는 새카맣게 일어선다 오오


  그러다 밤이 오면 죽음이 오백 년 육백 년 전 할아버지의
  배꼽을 지나 내 배꼽으로
  들어오고 일천이백만 개의 달이
  우리의 가슴 속을 넘너들며 마음 갈피갈피
  두루두루 적셔준다


  한밤중 서울의 일천이백만 개의 무덤은 인중 아래
  모두 봉긋하고 오오오
  또 한강은 일번이백만의 썩은 무덤 속을 헤엄쳐나온
  일천이백만 드럼의 정액을 싣고 조용히 내일로 떠난다


  다시 하늘이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내다 걸면
  일청이백만 쌍의 태양이 눈을 번쩍 뜨고
  저 내장들의 땅속 지하 삼천 미터까지
  빛살 무늬 거룩하게 새겨진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2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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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03
    May 2018
    09:26

    [철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 왕도정체 · 귀족정체 · 금권정체 · 참주정체 · 혼합정체 · 민주정체

    제10장 정체의 종류 (...) 정체(政體)에는 세 종류가 있고, 그것들이 왜곡된 또는 타락한 형태도 셋이다. 세 종류의 정체란 왕도정체와 귀족정체(aristokratia, 최선자정체), 그리고 세번째로 재산평가에 근거한 정체이다. 세번째 정체는 금권정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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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03
    May 2018
    08:37

    [철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 분배적 정의(正義, justice)와 조정적 정의, 정치적 정의

    제3장 기하학적 비례에 따른 분배적 정의 (...) 분배에서의 정의는 어떤 가치 기준에 따라야 한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누구나 같은 종류의 가치를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민주정체 지지자들은 자유민으로 태어난 것이, 과두정체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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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02
    May 2018
    20:54

    [철학] 『도래하는 공동체』 : 도래하는 존재는 임의적 존재이다

    (...) 도래하는 존재는 임의적 존재이다. 스콜라 철학이 열거하는 초범주개념들 가운데 개별 범주 내에서 사유되지 않지만 다른 모든 범주의 의미를 조건 짓는 단어가 바로 형용사 ‘쿼드리벳(quodlibet)*’이다. 이 단어를 통상 “어떤 것이든 무관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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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02
    May 2018
    20:52

    [철학] 『도래하는 공동체』 :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의 모순은 언어에 기원을 둔다

    (...)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의 모순은 언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실제로 '나무'란 단어가 모든 나무를 무차별적으로 지칭할 수 잇는 것도 그 단어가 특이한(singular) 불가언적적 나무들 대신에 그들의 보푠적 의미를 가장하기 때문이다. (...) 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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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02
    May 2018
    20:49

    [철학] 『도래하는 공동체』 : 파시즘과 나찌즘은 극복된 것이 아니다

    (...) 만일 우리가 인류의 운명을 다시 한 번 계급의 개념으로 사유하고자 한다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사회 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모든 사회 계급이 용해되어 있는 단일한 행성적(planertaria) 소시민 계급 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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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02
    May 2018
    20:47

    [철학] 『도래하는 공동체』 : 모든 귀속의 조건을 거부하는 임의적 특이성

    (...) 중국의 5월 시위(천안문 광장의 반정부 시위)에서 가장 인산적이었던 점은 그들의 요구 사항에서 확실한 내용이 상대적으로 거의 없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자유는 실제 투쟁 대상이 되기에 너무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개념들이었고 유일하게 구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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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01
    May 2018
    15:02

    [철학] 플라톤의 「향연」 : 사랑은 결핍이다

    (...) "친애하는 아가톤, 자네는 먼저 에로스가 어떤 분인지 밝힌 다음 그분이 하는 일을 논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이야기를 훌륭하게 시작한 것으로 생각되네. 자네가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것에 나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네. 자네는 그분이 어떤 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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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26
    Apr 2018
    03:49

    [철학] 『안티 오이디푸스』 : 의미, 그것은 사용이다.

    오이디푸스와 믿음 (...) 중요한 것은, 오이디푸스는 잘못된 믿음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란 것이 필연적으로 잘못된 어떤 것이요, 실효적 생산을 빗나가게 하고 질식시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견자(見者)란 가장 덜 믿는 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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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3
    Apr 2018
    02:30

    [철학] 권력의지와 영원회귀에 대한 결론

    (...) 신의 죽음 또는 죽은 신이 자아(Moi)로부터 자아의 동일성과 관련하여 지니는 유일한 보증을, 말하자면 통일을 이루는 자아의 실체적인 기반을 빼앗아버린다고 말하였다. 즉 신이 죽었기 때문에 자아는 이제 소멸되거나 증발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245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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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19
    Mar 2018
    12:40

    [사회] 미니마 모랄리아 : 에로스(eros) 혹은 관능(sense)

    (...) 에로틱의 질적인 영역에서 가치전도가 일어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자유주의 아래서 상류사회의 기혼 남성들은 양갓집 규수로 자란 정실부인만으로는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고 연예인이나 집시 여인, 정부나 매춘부로로 부족분을 채우곤 했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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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13
    Mar 2018
    15:45

    [철학] 스피노자의 철학 : 선(Good)과 악(evil), 좋음(Good)과 나쁨(Bad)

    (...) 브레이은베르흐와의 서신은 모두 8통의 편지가 전해오고 있는데, 각각 4통씩 1664년 12월에서 1665년 6월 사이에 씌어졌다. (...) 곡물중개상이었던 블레이은베르흐는 스피노자에게 편지를 통해 악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처음에 스피노자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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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04
    Mar 2018
    17:58

    [철학] 『선악의 저편』 : 남성과 여성

    232. 여성은 자립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여성 자체'를 남성들은 계몽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은 유럽이 일반적으로 추악해지는 최악의 진보에 속한다. (...) 238. (...)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못 생각하고, 여기에 있는 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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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01
    Mar 2018
    08:21

    [철학] 스피노자의 철학 : 도덕(Morals)과 윤리(Ethics) · 정념(passion)

    (...) <너는 저 열매를 막지 말라.> 불안에 사로잡힌 무지한 아담은 이 말을 금지의 표현으로 듣는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담이 먹을 경우에 그 아담을 중독시키게 될 과일이다. 그것은 두 신체의 만...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398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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