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사회·고대사회의 노동
국가 장치와 잉여 노동이 없는 곳에는 노동-모델도 없다. 그러한 곳에서는 오히려 말에서 행동으로, 이러한 행동에서 저런 행동으로, 행동에서 노래로, 노래에서 말로, 말에서 계획으로, 이런 식으로 이상한 반음계에 따라 이동하는 자유로운 행동의 연속적 변주가 있다. (...)
원시사회들은 노동의 부재로 인해 결핍된 사회, 또는 생존의 사회가 아니라 반대로 저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노동이라는 요인을 필요치 않는 자유로운 행동과 매끈한 공간의 사회라는 것이다. 비록 노동과의 차이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형태로 표현될 수는 있지만 이러한 사회는 결코 태만한 사회가 아니다. 또 법과의 차이가 ‘무정부 사회’라는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이들 사회는 무법 사회가 아니다. 대신 이들 사회에는 오히려 자체에 고유한 엄격함과 잔혹함을 가지고 활동의 연속적 변주를 규제하는 노모스의 법이 존재한다.
노동이 국가장치에 대응하는 홈이 패인 시간-공간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전-고대, 또는 고대적 형태들이다. 왜냐하면 잉여 노동이 공물이나 부역 형태로 고립되고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태들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 노동 개념은 가장 명확한 형태로, 가령 제국의 토목공사, 도시나 농촌의 급수 공사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여기서는 평행한 단편들을 통해 물이 ‘박편 모양’으로 흘러간다(홈파기).
_ <천 개의 고원>(p.935~936)
자본사회의 노동
자본주의 체제에서 잉여 노동은 점점 노동 자체와 구별할 수 없게 되어 완전히 노동 속으로 용해되어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시간과 ‘착취된’ 시간이 시간 속에서 분리되지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 두 가지가 구별될 수 있겠는가? (...) 모든 노동이 잉여 노동이라는 점은 전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잉여 노동은 이미 더 이상 노동조차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잉여 노동과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화 전체는 점점 더 물리적-사회적 일 개념에 일치하는 시간-공간의 홈 파기와는 무관하게 된다. 오히려 잉여 노동 속에서 인간 소외 자체가 일반화된 ‘기계적 예속’으로 대체되어 가며, 이리하여 전혀 노동하지 않고도 잉여 가치를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인다. 이리하여 사용자 자체가 피고용인이 되어 가는 경향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는 노동량에 작용하기 보다는 교통 수단, 도시적 모델들, 미디어, 여가 산업, 지각하고 느끼는 방법 등 온갖 기호계를 동원하는 복잡한 질적 과정에 작용하게 된다.
자본주의가 전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밀고 나간 홈 파기의 결과, 유통되는 자본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일종의 매끈한 공간을 필연적으로 재창조하고 재구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홈 파기는 가장 완벽하고 엄격한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이것은 단지 수직적일 뿐만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 작용한다. (...)
_ <천 개의 고원>(p.936~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