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의미에서 유목민은 이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움직여도 그들은 여전히 매끄러운 공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막이나 스텝, 바다에서도 홈을 파고 살 수 있고, 홈 패인 도시에서조차 매끄럽게 살 수 있다. | Canon EOS 5D | 서울역 | 이우
괴테식 여행과 클라이스트식 여행? 또는 프랑스식 여행과 영국식 여행? 나무형 여행과 리좀형 여행? 그러나 이들 어떤 대립항도 맞아떨어질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혼합되거나 서로 이동한다. 이들 간의 차이가 객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막이나 스텝, 바다에서도 얼마든지 홈을 파고 살 수 있다. 도시에서조차 매끄럽게 된 채로 살 수 있고, 도시의 유목민이 될 수 있다. 이미 오래 전에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남쪽 바다를 향해 떠나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여행을 결정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도시 한가운데서도 낯선 여행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리에서의 여행도 있다고. (...)
우리는 진정한 유목민을 생각하고 있다. 토인비가 시사하는 대로 이들 유목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동하지 않는다’라고. 전혀 이동하지 않음으로써, 이주하지 않음으로써, 또 하나의 매끈한 공간을 보유한 채 떠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또 정복하거나 죽을 때 에야 비로소 그곳을 떠나기 때문에 유목민인 것이다. 제자리에서의 여행. 이것이 모든 강렬함들의 이름이다. (...)
사유하는 것. 그것은 여행하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매끈한 공간과 홈이 패인 공간에 대한 신학-사유적인 모델을 만들어 내려고 시도해 보았다. 즉, 이 두 종류의 여행을 구별해 주는 것은 장소의 객관적인 질도, 운동의 측정 가능한 양도 아니며, 또 정신 속에만 들어 있는 그 무엇도 아니며 공간화의 양태, 공간 속에서의 존재 방식 또는 공간에 대한 존재방식이다.
_ <천 개의 고원>(p.92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