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결코 비극적이지 않다. 음악은 기쁨이다. 하지만 음악은 우리에게 죽음의 취향을, 그것도 행복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죽고 싶은, 조용히 꺼지고 싶은 취향을 주는 일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우리 안에서 고개를 드는 죽음의 본능 때문이 아니라 그 본능의 음 배치물, 그 본능의 음 기계에 고유한 차원 때문에 횡단선이 소멸의 선으로 바뀌는 순간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평화와 격분. 음악은 파괴를, 즉 소진, 분쇄, 분해 등 온갖 종류의 파괴를 갈망한다. 바로 이것이 음악의 잠재적인 “파시즘‘이 아닐까. 우리는 음악가가 무엇인가를 기념하여 쓸 때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영감의 모티브나 회상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그저 자기 고유의 위험에 직면하게 하는 생성,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생성이다. (,...)
시각적 상관물을 가진 얼굴은 회화와 관련되며, 청각적 상관물을 가진 목소리는 음악과 관련되는 것이다. 회화가 얼굴의 탈영토화이듯 음악은 목소리의 탈영토화로, 이 때 목소리는 점점 더 언어와 멀어진다. (...) 목소리는 얼굴보다 훨씬, 정말 훨씬 앞선다. (...) 음악이 회화보다 훨씬 더 커다란, 즉 훨씬 더 강렬하면서도 집단적인 탈영토화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목소리보다 훨씬 더 커다란 탈영토화 역량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 특질 때문에 음악은 집단적으로 매혹시키며, 더 나아가 우리가 늘 말해온 “파시즘적” 위험의 잠쟈성마저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음악은 드럼과 트럼펫을 울리면서 인민과 군대가 심연 속으로 가도록 이끈다. 분류나 결집의 수간인 그림에 불과한 군기와 국기보다 훨씬 더 한 것이다. 음악가들은 개인적으로는 화가들보다 반동적이고 종교적이며 덜 “사회적”일 수도 있다. 이들은 회화의 힘보다 무단히 우월한 집단적인 힘을 휘두르는 것이다. “일치단결한 인민의 합창은 매우 강력한 끈이다.”....
_ <천 개의 고원>(p.566~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