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붓과 먹으로 그린 걸레스님 중광의 선화(禪畵), <무구(無坵)>(1981년. 한지에 수묵담채, 미화랑 소장).
서양화와는 달리 점이 아니라 선의 속도와 강약으로 그려진다. | IM-A840S | 2011 걸레스님 중광 만행기행전에서 | 이우
점의 체계에 대하여 대립하는 것이 바로 선의 체계, 아니 차라리 다선적 체계이다. 선을 해방시키고 사선을 해방시켜라. 이런 의도를 갖고 있지 않은 음악가와 화가는 없다. 선의 체계에서 점의 체계나 교육학적 표상을 만들어내더라도, 그것은 점의 체계를 무너뜨리고 지진동(地震動)을 일으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점의 체계는 음악가, 화가, 작가, 철학자가 이 체계와 대립할수록, 그리고 심지어 이 체계와 대립하기 위해 이 체계를 도약의 발판으로 만들어낼수록 더 흥미로울 것이다.
역사는 역사에 대립하는 자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도발에 의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맞닥뜨린 완전히 만들어진 점의 체계, 또는 그들 자신이 발명한 점의 체계를 다음과 같은 조작으로 허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선과 사선을 해방시키고, 점을 만드는 대신 선을 긋고, 까다로운 또는 개량된 수직선과 수평선에 달라붙는 대신 지각할 수 없는 사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항상 역사에 회수될 테지만, 그것이 역사에서 유래하는 일은 결코 없다. ... 창조는 세계를 재현하는 업무에서 빠져나온 돌연변이 추상적인 선과 같다. 창조는 역사가 점의 체계 안에서 기껏해야 다시 파악하거나 다시 자리잡을 수밖에 없는 새로운 유형의 실재를 배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화에도 똑같은 것이 있을까? 사실상 점이 선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선이 탈영토화된 점을 데려다가 외적 영향력 속으로 보내버린다. 그렇다면 선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은 점들 사이에서 다른 방향으로 질주하며, 이 때문에 점들은 식별불가능하게 된다. 선은 사선이 되었고, 사선은 수직선과 수평선에서 해방된다. 하짐나 사선은 임 횡단선, 준-사선 또는 자유직선, 파선(波線) 또는 각, 또는 곡선이 되었으며, 언제나 이것들 중간에 있다. 수직적인 백색과 수평적인 흑색 사이에는 클레으 회색, 칸딘스키의 적색, 모네의 자색, ㅇ들 각각이 색의 블록을 형성한다.
이 선은 기원이 없다. 이 선은 언제나 그림 밖에서 시작했고, 그림은 이 선을 중간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이 선은 좌표가 없다. 이 선은 자신이 떠다니는 창도하는 고름판과 한테 섞이기 때문이다. 이 선은 연결을 정할 수 있는 연결이 없다. 이 선은 재현 기능을 잃어버렸으며, 어떤 형태를 둘러싸는 모든 기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 선은 추상적인, 진정 추상적이고 변이적인 선이 되었고, 시각 블록이 되었다. 그리고 점은 이런 조건에서 색-점 또느 선-점으로 다시 창조적인 기능을 발견한다. 선은 점들 사이에, 점들 중간에 있으며, 더 이상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가지 않는다. 선은 더 이상 윤곽을 둘러싸지 않는다. '그는 사물들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사물들 사이에서 그렸다".
- <천의 고원> p.556~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