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non EOS D60ㅣ남이섬ㅣ욕망은 정교한 몽타주에서, 고도의 엔지니어링에서 산출되는 결과물이다.
파시즘을 위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분자적이거나 미시적인 역량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군중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전체주의적인 유기체가 아니라 오히려 암적인 몸체인 것이다. 미국 영화는 종종 이러한 분자적 초점들, 즉 패거리, 갱, 분파, 가족, 마을, 구역, 교통수단 등 아무도 모면할 수 없는 파시즘을 보여 주었다. 욕망은 왜 스스로 억압되기를 바라는가? 욕망은 어떻게 자신의 억압을 바랄 수 있는가? ....
확실히 군중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권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군중들은 일종의 마조히스트적인 히스테리에 빠져 억압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욕망이란 필연적으로 필연적으로 여러 분자적 층위를 지나가는 복합적인 배치물과 절대 분리될 수 없으며, 이미 자세, 태도, 지각, 예감, 기호계들을 형성하고 있는 미시 구성체들과도 분리될 수 없다. 욕망은 결코 미분화된 충동적 에너지가 아니라 정교한 몽타주에서, 고도의 상호작용을 수반한 엔지니어링에서 결과되는 것이다.
_ < 천 개의 고원> p. 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