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non EOS 5D | Canon EF 50mm + 접사링 | 경기도 포천 광덕산_고마리 | Photo by 이우 )
... 아득하게 먼 옛날, 좀 더 정화하게 말하자면 2억년 전에는 꽃이 없었다. 물론 그때도 식물은 있었다. 양치식물이나 이끼류 그리고 침엽수와 소철 따위... 이런 식물들은 진정한 의미의 꽃이나 과일을 맺지는 않았다. 이 가운데 일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를 복제하는 무성생식으로 번식했다. 반면 유성생식을 통한 번식은 비교적 신중한 방식이었는데, 보통 바람이나 물을 통해서 꽃가루를 퍼뜨렸다. 그리고 이들 꽃가루 가운데 지극히 일부만이 같은 종의 다른 개체를 만나 작고 원시적인 형태의 씨를 맺었다.
꽃이 나타나기 이전의 세상은 훨씬 단조로웠다. 진화의 속도도 느렸고, 교배도 느렸다. 교배는 가까이 있는 개체 사이에서, 혹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개체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재생산이 이처럼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품종이나 변종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매우 단순한 세상이었다. (중략)
꽃이 생기기 이전의 세상은 지금 세상보다 훨씬 활기가 없었다. 열매나 커다란 씨가 적어서 온혈동물들이 먹고 살 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파충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날이 추워지면 생물체들은 더욱 활기를 잃고 느리게 움직였다. (중략) 꽃이나 열매가 없는 탓에 이들이 뿜어내는 향기나 온갖 빛깔, 무늬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녹음은 지금보다 훨씬 더 짙었다. 오로지 초록이 세상을 지배했다.
그런데, 꽃이 등장하면서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꽃을 피운 뒤에 씨를 안으로 맺는 식물을 속씨식물이라 부르는데, 이 속씨식물이 백악기에 나타나 놀라운 속도로 지구 전체에 퍼졌다. 이 갑작스러우면서도 필연적인 사건을 찰스 다윈은 ‘지독한 신비’라고 불렀다. 이제 식물은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바람이나 물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다. 동물과 공진화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은 동물에게 영양분을 제공하고, 동물은 식물의 유전자를 멀리까지 퍼뜨려주는 이 확기적인 계약이 성립되면서, 세상은 과거와 전혀 다르게 바뀌었고 훨씬 복잡해졌다. 상호의존도가 높아지고 정보교환이 많아졌다. (중략)
진화의 속도는 훨씬 빨라졌다. 새로운 세상에서 더 크고, 더 밝고, 더 달콤하고, 더 향기로울 때 거기에 따른 보상이 충분히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특수화 역시 보상을 받았다. 자기의 수술에서 꽃가루를 묻힌 곤충이 엉뚱한 곳을 찾아가지 않게 형태나 향기가 다른 식물과 확연히 구분될 수 있도록, 헌신적인 꽃가루 매개체의 관심을 자기 이외의 다른 식물로 눈을 돌리지 않도록 할수록 번식은 훨씬 유리해졌다. 이런 필요성으로 인해 식물은 동물의 욕망을 분석하고 세분화해서 특수화의 길을 걸었다. (중략)
꽃은 열매와 씨를 맺었고, 열매와 씨는 다시 대지에서 생명을 틔웠다. 속씨식물은 동물을 유혹해 자기 씨를 멀리 퍼뜨리게 하려고 당분과 단백질을 생산해 내었다. 그 덕에 전세계의 식량 에너지 생산량이 한층 늘어났다. 이로 인해 포유류가 번성할 수 있었다. 꽃이 없었다면,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세상에서도 건재했던 파충류가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꽃이 없었다면 우리 인간도 나타날 수 없었다. ...
- 마이클 폴란의 <<욕망하는 식물>>(황소자리, 2007)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