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정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왔던 작년 여름. 끝도 없이 쏟아지던 장맛비 속, 무료한 마음을 달래려 무심코 펼쳤던 신경숙 작가의 <깊은 슬픔>. 책이 꽤 두꺼웠으나 가방 안에 넣어서 틈틈이 꺼내 읽었던 것 같다. 우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책에 스며들기를 여러 번, 어느새 가을, 겨울이 다가왔다. 둘째 동생은 왜 허구한 날 그 책만 읽냐, 신경숙 작가는 너무 우울하다며 그만 읽으라고 나를 타박하였다. 깊은 슬픔의 주인공들이 서로의 등만 바라보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 걸까, 고등학교 때부터 신경숙 작가를 좋아했으나, 손에 물이 마를 날 없이 가까이 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다가 언제였을까, 이제는 그만 읽어도 되겠다 싶어 책꽂이 한쪽에 미련 없이 놓아버렸다.
그 후, <깊은 슬픔> 만큼 가까이 한 책은 고미숙의 <호모에로스>였다. 고미숙 특유의 시원한 입담이 그대로 담긴 문체덕분에 껄껄거리며 웃기도 했고, 인문학적 사유가 넘치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하기도 했다. 여러 번 곱씹어봐야 하는 구절들 앞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고 며칠 붙잡고 있기도 했다.
알람소리 대신 매미소리로 깨는 여름 새벽녘, 문득 <호모에로스>를 다 읽으면 그 사람에게 이 책 내용을 말해줘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는 그 사람에게, 책을 읽으며 가슴이 벅찼던 순간들을 같이 나누고 싶었다. 매일 그 사람 앞에서 얼굴만 빨개지고 쉬운 인사말 한마디 건네기가 힘든데, 가능할까,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가끔은 혼자 있고 싶어 카페에 앉아있으면, 이야기를 엿듣고 싶을 정도로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라보며, 나도 그 사람과 저렇게 편히 앉아 시간을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이 자연스럽게 솟아났다. 그러다가도 사람 욕심이 끝도 없구나 싶어, 그 상상을 한곳으로 밀어내었다. 예전에는 멀리서 바라만 봐도 좋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좀 더 곁에 있으려고 하는구나, 싶었다.
카페 문을 열고나오니 바깥의 더운 열기가 이마로 훅 끼친다. 앞으로 예전처럼 그 사람을 자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늦여름 더운 열기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한다. 모이를 먹다가 푸드득 날아가 버리는 비둘기,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엄마를 조르는 꼬마들, 예쁘게 단장한 여대생 무리들, 그 사람에게 전하고 싶었던 무수한 말들이, 그들에게, 금방이라도 쏟아질 거 같아 간신히 부둥켜안았다. 그 사람을 알게 된 것도, 여기까지 온 것도, 다 시절인연 덕분이겠지, 앞으로의 일들도, 꽃이 피고 지듯이, 계절이 일어나고 바뀌듯이, 흘러갈 것이다. 깊은 슬픔의 주인공들이 시절인연을 일찍 깨달았으면, 서로의 등을 바라보며 그리워하고, 아파하지 않았을 텐데…….
길거리에 우두커니 오래 서 있었음을 알아채고 나니, 이마에 맺힌 땀이 불을 타고 흐르고,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이 땀이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시원한 것은 왜 일까. 그리고 내년 여름,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고민하고 있을까. 이 아픔을 온전히 이겨내, 좀 더 성장한 나를 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