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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時論)] 바람 구두 신은 랭보

by 이우 posted Oct 25, 2015 Views 3999 Replies 2
인문학공동체 에피쿠로스 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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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튀르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 1854년~1891년), 학창 시절에 너를 만나고 30년만에 다시 너를 만난다. 베를렌(Paul Verlaine, 1844년~1896년)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너를 ‘바람 구두를 신은 사나이’라 부르며 가난한 옆구리에 끼고 길을 걷거나 막걸리 상 위에 던져두고 술을 마셨다. 혹, 여행 가방 속에 구겨 넣고 바람처럼 세상을 떠돌았다. 우리는 그때 ‘유신’이라는『지옥에서 보낸 한 철』(랭보, 1873년)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너를 ‘상징주의’로 부르거나 ‘근대시의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네가 3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1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너를 읽고 있다. 이 시대에서도 너는 전설(傳說)이다.

  랭보, 네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 왔을 때 너는 ‘상징주의(象徵主義, symbolism)’였다. 네가 열 살 때 어머니의 기독교적 엄격함에 몇 번이나 가출했는데도 아이러니컬하게도 너는 ‘암시’나 ‘계시’를 뜻하는 ‘symbol’을 쓰는 시인이 되어 있었다. 그때 우리는 너를 읽었으나,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것, 사회 제도나 관습, 종교, 의식 등에 저항하고 반항하는 ‘너’, 파괴적 열정에 사로 잡혀 폐쇄적이고 억눌린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던 ‘너’가 아니라 기껏해야 ‘상징주의(象徵主義, symbolism)’로 읽었다. 김억(金億, 1896년~?)은 <봄은 간다> 풍으로, 김소월(金素月, 1902년~1934년)은 <진달래꽃>이나 <못 잊어> 정도로…….

  미안하다, 랭보. 우리,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는 온전하게 너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저항하고 반항하는 네가 아니라 상징하는 너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계몽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기독교적·형이상학적 역사 속에 있었다. 우리는 너를 초월적·이상적인 미의 세계, 음악성과 운율의 문제로 받아들였고 낭만주의와 혼동했다. 우리는 ‘바람 구두 신은 남자’ 랭보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미안하게도 랭보,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 너를 그저 낭만주의나 상징주의로만 받아들인 이 전통은 지금도 남아 우리를 억압하는 세계의 질서를 그저 따뜻하게만 바라보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랭보, 최근에는 어쩌구니 없는 일도 벌어졌다. 이른바 ‘자유경제원’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지지 포럼’을 열고 너와 같은 작가군을 ‘헬 조선을 조장하는 작가’라 부르며 퇴출해야 한다고 한다. 아, 랭보. 우리는 아직 『지옥에서 보낸 한 철』(랭보, 1873년)을 살고 있다. 

  랭보, 네가 너무 보고 싶다. 우리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창조적 이미지들을 구축하려고 했던 너를 보고 싶다. “시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구해야 하는 것(투시자의 편지, 1871년)”이라 말하던 ‘기괴한 영혼‘ 랭보, 너를 보고 싶다. 현실의 견고함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역동을,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규칙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재건축하려고 했던 ‘바람 구두 신은’ 랭보, 네가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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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역신문공동체 <은평시민신문>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 profile
    리강 2015.11.03 08:23
    셋째 문단 둘째 줄 : 읽을 수 밖에 없었다 -----> 읽을 수밖에 없었다
    셋째 문단 넷째 줄: 낭만주의와의 혼동했다-------> 낭만주의와 혼동했다
  • profile
    이우 2015.11.04 17:21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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