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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의식혁명_ 페이커(faker), 데이비드 호킨스

by 이우 posted Feb 28, 2012 Views 20222 Replies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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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 혁명>(데이비드 호킨스 저 | 한문화 ) -

 

 

 

   ‘데이비드 호킨스’가 지은 <의식혁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호킨스는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 “진실과 거짓까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의식혁명, 17p)이 있고 이것을 ‘신성(神性), 또는 영성(靈性)’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신성’, 혹은 ‘영성’을 ‘단지 육체의 존재상태일 뿐인 1’에서부터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의 정점인 600, 더 나아가 ’깨달음의 상태인 1,000까지’(의식혁명, 61p) 수치화(의식레벨)합니다. 이 ‘의식 레벨’을 측정하기 위해 자극에 대한 근육의 반응도를 측정하는 실험을 이용합니다.(호킨스는 스스로 이를 ‘운동역학*’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뉴튼의 운동역학이 아닙니다^^)  ‘신성’ 혹은 '영성‘, ’의식 수준‘이라는 질적인 면을 양적으로 수치화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페이크(fake)①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신성’ 혹은 '영성‘, ’의식 수준‘이라는 질적인 면을 양적으로 수치화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의외로, 굉장히, 단순, 명확합니다. 아래와 같이 실험하는데 이 실험을 통해 “피험자들의 다양한 태도, 생각, 느낌, 상황, 인간관계 등의 강도를 수치로 측정”(61p)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10초내에 가능합니다"(61p). 게다가 단순하게 “예, 아니오의 대답 형태”(61p)로 말입니다. 아래와 같이 실험하면서 시험자가 피험자에게 ’단순히 살아 있는 상태가 1이라면 사랑의 힘은 200이상인가'라고 질문하고 근육의 반응을 측정합니다. 피험자의 근육이 강해지면 긍정을, 약해지면 부정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300인가’, ‘사랑은 400이상인가’ 이런 식으로 질문을 계속해 근육 반응이 약해질 때까지 시험합니다. 이렇게 수백만의 사람에게 측정한 결과 ‘사랑’의 의식 수준은 500으로 측정되었다고 합니다. 정말일까요? 호킨스는 “수많은 피험자에게 거듭 시험해도 늘 마찬가지였다“(61p)고 말합니다. 정말일까요?

 


     1. 피험자를 세운 후 오른팔은 내리고 왼팔은 팔꿈치를 쭉 펴서 바닥과 평생 상태를 유지하도록 한다. 이 때 왼팔과 오른팔은 바꿔도 상관없다.
    2. 시험자는 피험자를 마주 보고 왼팔을 피험자의 왼쪽 어깨에 놓아 안정을 시킨 후 오른손을 상대방이 올린 왼쪽 손목 위에 놓는다.
    3. 상대방에게 이제 그의 왼팔을 누를테니 그가 온 힘을 다하여 누르는 힘에 저항하도록 이른다.
    4. 그 후 상대방의 왼팔을 고른 힘으로 확실하고 빨리 누른다. 여기서 시험자는 피험자의 왼팔 근육의 반동을 보는 것이므로 불필요한 힘을 무리하게 가하여 피험자의 왼팔 근육을 피로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험은 피험자의 신체 강약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근육이 시험자의 미는 힘에 저항하여 왼팔을 어깨의 관절에 고정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는 보는 것임에 주의해야 한다.

     피험자가 근육에 이상이 없고, 마음이 편안하고,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지 않는다면(시험자는 피험자에게 미소를 짓지 말 것) 왼팔 근육은 강하게 나타나고, 왼팔은 어깨의 관절에 고정된다. 만일 시험이 바람작하지 않은 자극(예를 들어 인공감미료)을 주어 실시될 때는, 피험자의 왼팔은 똑같은 자극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그의 왼쪽 몸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

(의식혁명, 12p)

 


  호킨스는 이 방법을 통해 신성’과 ‘영성’ 레렐, 즉 ‘의식수준’을 1부터 1,000까지 나누고 측정했습니다. 시험자가 주어진 질문을 하면 이 말이 진실일 때 피험자의 근육이 강하게 반응하고 거짓말이거나 진실이 아닐 때에는 약하게 반응합니다. 놀랍게도, “피험자가 주어진 질문에 대해 지식이 있든 없든”, “문화적인 차이나 시간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과학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킨다”고 말합니다.(17p) 나아가서 호킨스는 “이 기술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떠한 주제이든 그 거짓됨과 진실성을 온전하게 분별할 수 있는 객관성을 제공”(17p)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말일까요? 정말 이 방법은 호킨스가 이야기하는 대로 과학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어떤 주제이든 그 거짓됨과 진실성을 온전하게 분별할 수 있는 객관성을 제공하고 있을까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호킨스가 의식 수준을 측정하는 이 방법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피험자가 ‘마음이 편안하고,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이 그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이 편안한 상태‘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으며, 또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지 않은 상태‘를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호킨스는 피험자가 시험자의 질문을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받아들이면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안경, 모자, 액서서리와 같은 등과 같은 복장 상태, 시험자의 목소리 등과 같은 것에 영향 받아 피험자가 ‘혐오감’과 같은 감정을 가질 때도 부적합 결과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 전제 조건들을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오류입니다.

 

  이 측정이 과학적이 되기 위해서는, 안경, 모자, 액서서리 등이 측정 결과에 왜 영향을 미치는지 검증이 되어야 하고, 피험자의 감정 상태가 객관적으로 측정되어 피험자 감정 상태만으로도 피험자가 적합한지 아닌지 확인되고 난 후 측정이 시행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피험자의 수많은 감정 상태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툴이 없다는 것입니다.

 


  … 때로는 피험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반응을 염려한 나머지, 질문이 전해주는 상황이나 사건을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받아들여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러한 경우 질문은 반복되어야 한다 (중략) 시험의 정확성을 위하여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안경(특히 금속 안경테는 안된다)은 벗어야 하고, 모자(화학섬유로 된 모자를 쓰고 있는 경우엔 예외 없이 약한 반응이 나타났다)도 벗어야 한다. 시험을 하고 있는 팔에는 보석이나 자수정 등이 없어야 한다. 그래도 합당치 않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더 조심스럽게 관찰하면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시험자가 피험자에게 혐오감을 일으키는 향수를 썼을 경우 피험자의 반응은 약해진다. 피험자가 계속해서 부적합 반응을 보이면 시험자의 목소리가 피험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 않았는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중략) 부적합한 반응이 있을 때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요소는, 피험자가 생각하는 영상이나 기억의 시점이다.   …

(의식혁명, 60p)

 


  과학적 연구는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논리성이란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설명이 시간적 순서와 이치에 맞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시간적 순서란 원인의 변화가 결과의 변화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굴뚝에 ‘황새가 보금자리를 많이 치고 있는 지역에서는 황새가 적은 지역보다 출생률이 높다’는 관찰 결과는 어느 현상이 원인이고 어느 현상이 결과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 새가 아이를 낳게 하는 원인이라고 결론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결과는 환경 오염과 위생 수준, 인간과 동물에 대한 공동체적 태도 등의 관념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따라서 이 연구는 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피험자의 감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호킨스의 실험 방법을 따를 경우, 시험자가 가진 생각이나 관념, 혹은 의도에 따라 측정이 달라질 수 있고 나아가서 시험자의 의도에 측정 결과를 맞출 수도 있습니다. 호킨스는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파된 가르침의 수준은 가장 높은 차원인 1,000레벨, 불교와 힌두교의 가르침도 1,000레벨, 유대교는 985레벨, 이슬람교는 540레벨”(256p~257p)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수치는 “문화와 지식과는 상관 없으며(61p) 25년간 수백만명의 피험자에게 행해 얻어진 수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과학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호킨스가 이슬람교 가르침 수준이 “540레벨”이라고 하는데 나는 1,000레벨로 맞추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대답은 “예”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호킨스가 말하는대로 위 실험을 준비하고 피험자에게 묻습니다. (1)단순히 살아 있는 상태가 1이라면, 이슬람교의 가르침은 1,000인가‘라고 묻습니다. (2)만약 피험자의 근육이 약해지면(1,000이 아니라는 의미), 안경이 실험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하며 부적합하다고 말합니다. (3)안경을 벗게 하고 다시 묻습니다. 다시 피험자의 근육이 약해지면, 당신이 내 목소리 때문에 감정이 흔들렸다고 말하고 부적합 판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다시 실험합니다. (4)이렇게 해서 1,000레벨이 나올 때까지 실시합니다. 아무리 해도 나오지 않으면, 피험자의 감정 때문에 부적합 결과가 나왔다고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다가 근육의 힘이 강해지는, 즉 긍정의 답을 얻으면 적합으로 판정하면 되지요.

 

  이처럼 호킨스의 측정은 과학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험자의 의도에 맞출 수 있어 이건 실험이라기보다는 페이크(fake)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실험이라면 시험자의 생각과 신념, 의도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결과를 얻어낼 수 있으며, 수백만 명에게 실험해도 같은 수치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페이크(fake)②

 

  설령, 이 실험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결과를 도출했다고 하더라도 이 결과가 불변하는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과학적인 실험이라고 하더라도, 시험자의 의도나 관념이 개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과학을 바라보는 바른 태도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과학 실험에 의해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이 결과가 항구적이거나 불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과학적 실험 결과가 불변하는 ‘진리’나 ‘본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놓고 옹호 측의 실험 결과와 반대 측의 실험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것은 실험 결과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시험자의 의도가 개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지식은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입니다. 20세기 후반의 현대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학자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자가 실행하는 실험이나 관찰은 과학적 진리를 밝히는 절대적인 잣대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수학자인 라베츠도 그의 책 <과학 지식의 한계>에서 과학적 지식은 그것을 발전시켜 준 시대와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근대 자연과학의 기반인 뉴턴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의 개념을 부정했으며,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180°이다’라는 명제가 공리이지만, 구면 기하학에서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보다 크고, 쌍곡기하학에서는 180°보다 작습니다.

 

  이 책에서 호킨스는, “히틀러와 히틀러의 군대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는 식으로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히틀러 또한 호킨스와 같은 이런 류의 실험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게르만 우월주의 강화를 위해서라면 역사왜곡도 마다치 않았던 아돌프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이 유태인이나 다른 민족에 비하여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인체 실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로 두 개의 구조, 뇌의 용량 등 과학적 수치를 이용하여 과학적으로 게르만 민족이 우수하다는 상세한 결과치를 얻어 공포합니다. 잘 알고 있다시피 이 결과는 독일인들이 유태인 학살을 관망하는 기초 자료로 이용됩니다. 히틀러의 이 실험도 호킨스가 했던 실험 만큼이나 시험자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호킨스는 이 책에서 ‘신성, 혹은 영성’이라 불리는 질적인 면을 양적인 면으로 측정하면서 이것을 마치 ‘절대적인 과학의 결과물’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지식이란 것 자체도 상대적이며 주관적이며, 시대와 문화 또는 인간의 관점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인데 불구하고 말입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이 믿기 쉽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진실로 받아들인다".

 

  정말 데이비드 호킨스는 자신의 실험 결과를 '객관적인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요? <의식혁명>에서 자신의 실험이 “거짓됨과 진실성을 온전하게 분별할 수 있는 객관성을 제공”(17p)한다고 주장해 놓고는 이 책의 속편인 <나의 눈>을 통해 “객관적인 진리를 찾는 일로 인생을 허비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나의 눈, 231p)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말했듯이 실험에 의하여 얻은 결과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르 뒤집어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런 뒤집기는 ’에피메데우스의 역설‘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문장은 참이 아니다‘라는 진술이 그것입니다. 이 진술이 참이면 이 문장은 참이 아니고, 이 진술이 참이 아니면 이 문장은 참이 아닙니다. ’영성과 신성'을 실험과 측정을 통해 객관적으로 증명하고 이것을 기초로 책을 쓰면서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에피메데우스의 역설‘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나는 거짓말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닐까요? 이 명제를 가만 생각해보면 거짓일 때에만 참이고, 참이라면 거짓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어느 쪽이든 ‘거짓’인 셈이지요 도식화하면 이렇습니다. T를 참(True), F를 거짓(False)이라고 하면, T and T = T, T and F = F, F and F = F, T or T = T, T or F = F, F or F = F. 그래서 이 명제는 F, 즉 거짓(False)입니다. 그래서, 실험에 의하여 얻은 결과인 객관성을 토대로 책을 기술하고 있으면서,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책은 무조건 F, 즉 거짓(False)이 됩니다.

 

  이런 모순을 예상이라도한 듯 호킨스는 ‘진리의 본질은 주관성이며, 주관성은 이원성을 넘어선 것이며, 이원성과 그 너머 것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나의 눈, 50p)이라며 교묘하게 피해갑니다. 그리고는 다시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동료들의 연구와 공동 연구자로 구성된 여러 팀의 연구에 의해 발전했다‘(나의 눈, 50p)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또 뒤집어 ’객관성‘을 획득하려고 합니다.

 

   이런 비판에 호킨슨은 분명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는 아직 선형적인 인과율, 지각, 이원성으로 이루어진 뉴튼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질 못했군. 뉴튼적 패러다임에서 지각을 초월하는 비선형적인 패러다임으로 도약하게나. 그러면, 알 수 있을 것일세.” 이런! 호킨스는 그럴듯하게 역사와 철학과 과학을 비틀고, 주관과 객관, 진실과 거짓을 복잡하게 얽혀놓고 있습니다. 하나의 결과에 여러 가지 원인이 존재하는 비선형이론이라고 할지라도 검증되지 않는다면 과학적인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호킨스는 모르고 있는 오양입니다. 아니면, 의도를 가지고 숨기고 있거나....

 


페이크(fake)③

 

  의식 레벨을 측정한 호킨슨은 그 결과치를 바탕으로 ‘의식의 에너지장에 대한 실제적인 지도’를 그려냅니다. <인간의 의식 수준(Level of Human Consciousness)>(p70~p91)>을 ‘수치심 에너지 수준 20’에서부터 깨달음의 에너지 수준 700~1,000 나눠 설명합니다. “수치심은 에너지 수준 20, 무기력은 50, 분노 150, 용기 200, 중용 250, 이성은 400, 사랑은 에너지 수준이 500”입니다. 또, “기쁨이 540, 평화는 600, 깨달음이 1,000”입니다. 에너지 수준이 커질수록 긍정의 방향이라는 것은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의도는 긍정적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의식 수준의 사회적 분포(Social Distribution of Consciousness)>(p92~p93)도 그립니다. 여기에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동물보다는 인간이 높고, 숙련되지 않은 노동자보다는 숙련된 노동자가 높고, 그보다 교육자가 높고, 또 그보다 전문가층, 과학자, 행정 관리 층이 높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요?

 

 

   … 200 이하의 에너지장은 겨우겨우 생존을 유지하는 아주 원시적인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중략) 이것이야말로 석기시대의 문화 수준으로 동물의 존재 방식보다 낫다고할 수 없다. 200대 중에서도 낮은 수준에 속하는 사람들은 숙련되지 않은 노동, 원시적인 상거래, 카누나 움집 만들기 등에 노력을 소모한다. (중략) 300대의 수준에서는 기술자, 숙련공, 경영자, 그리고 소박한 형태의 사업을 볼 수 있다. (중략) 400대의 수준에서는 지성의 눈뜸으로 진정한 식자층이 나타나고, 좀 더 높은 수준의 교육으로 전문가층과 과학자, 행정 관리 등이 형성된다. (중략) 500의 수치는 깨달음의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 된다. (중략) 이 수준에서는 음악, 미술, 건축들의 걸작이 나오고, 이들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의기가 고양된다. …

 (의식혁명, 93p~96p)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수치화할 수 없는 것들을 서열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수치심보다 무기력, 무기력보다 분노, 분노보다 용기, 용기보다 이성, 이성보다 사랑, 사랑보다 기쁨, 기쁨보다 평화, 평화보다 깨달음이 높은 것일까요? 정말, 동물보다는 인간이 높고, 숙련되지 않은 노동자보다는 숙련된 노동자가 높고, 그보다 교육자가 높고, 또 그보다 전문가층, 과학자, 행정관리 층이 높은 것일까요? 또, 이 정도에서 현재 우리가 통속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체계(동일성)와 호킨슨의 <의식 수준 레벨>이 비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호킨스가 그리는 이 맵(map)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나’의 의식 수준은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그들보다 의식수준이 높고, 미국에서 살고 있는 그들보다 의식 수준이 낮습니다. 또, 글을 쓰면서 살고 있는 ‘나’는 막노동을 하는 그들보다 의식 수준이 높으며, 교회의 목사보다는 의식 수준이 낮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글을 쓰며 살고 있는 ‘나’는 미국에서 막노동을 하는 그들보다 높은 것일까요, 낮은 것일까요? 아프리카의 오지에 살고 있는 영매(무당)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행정관리보다 높은 것일까요, 낮은 것일까요? 미국에서 글을 쓰고, 영성을 지도하는 호킨스는 어떨까요? 만약, 호킨스가 현재 미국이 아니라 아프리카 오지의 영성 지도자라도 이와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요?

 

  호킨스의 주장대로 이 레벨 수치가 문화와 자식에 관계 없는 이른바 ‘영성’이 만드는 결과가 원시사회보다 문명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높다는 것, 즉  ‘영성’이 바라는 것과 현재 우리의 통속적인 가치관이 비례하고 있다는 것은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원시 사회에서 현대 사회에로의 이행은 영성이 시키는 대로 가는 것이 되고, 아프리카보다 미국 사회가 더 영성이 바라는 것과 같은 레벨이 되며, 동물보다는 인간이 훨씬 월등한 의식 수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호킨스의 의도를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팍스 아메리카’(Pax America)의 냄새가 짙습니다.

 

  그렇다면 막노동을 하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막노동을 하는 의식 수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의식 수준은 높일 수 있는 것일까요? 호킨스의 말대로라면, 막노동을 하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막노동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호킨스의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이 생애를 통해서 겨우 5점밖에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통계적인 수치로 확인”(p97)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고 호킨스는 바로 뒤집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백이상의 수치에 이르는 갑작스러운 도약 또한 가능하다. 만일 에고 중심적인 200 이하의 에너지장의 웉라리에서 벗어나, 친철하고 진실하고 착하고 용서할 줄 아는 의식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자기의 근본 목적이 된다면, 그는 높은 차원의 의식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는 굉장한 의지력이 요구되는 것이 사실이다. (중략)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잠재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

(의식혁명, 98p)

 

  … 이 책을 철저하게 소화한다면 독자들은 35점 정도의 의식 수준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일생 동안 겨우 5점의 발전을 한다고 생각하면 35점 향상은 굉장한 것이다. 첨단 이론물리학*과 비선형 동역학*이 보여주듯이, 개인의 작은 향상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중략) 전 인류의 의식 수준은 몇 세기 동안 190에 머물렀으나 1980년대 중반에 갑자기 240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이제 위로 전진할 수 있는 안전한 발판 위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다....

(의식혁명, 268p)

 

 

  그러면서 갑자기 '자신의 책을 읽으면 갑자기 35점 이상의 수준을 향상시킨다(268p)'고 합니다. 나아가 이론상으로는 잠재력이 활성화되면 몇 백 이상이 향상된다고 말합니다(98p) . 이론상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그의 실험으로 확인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그의 말대로라면 현재 우리의 교육 체계를 호킨스가 말하는 ‘잠재력 활성화 교육’으로 바꾼다면, 우리의 세계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 미움과 분노가 아니라 사랑이 충만한 세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호킨스가 이 책의 전반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 역사상 최초로, 획기적인”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와!

 


페이크(fake)④
 
  그러면서 미국인답게 호킨스는 이 기술을 이용한 무궁무진한 ‘응용 기술’들을 선보입니다. ‘우리 연구의 목적은 학구적이거나 철학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좀더 실제적으로 활용되기 위한 것이다’(p128)며, ‘산업과 과학 분야에 적용하여 재료 연구는 물론 제품 개발, 과학 분야, 의학분야에 적용해 많은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으며, ‘신학과 인식학, 철학에 응용해 진실 자체를 확정하는 기술로 사용할 수 있다’(p105~p107)고 말합니다. <질문의 진실성>을 검사한다면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며(p115), 간첩 행위를 식별할 수 있으며(p115), 재판과 경찰 업무에 거짓말 여부를 측정하며(p116), 군대에 적용해 역사적 무력 충돌에 대한 연구도 아무런 위험 부담 없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p117), 정치 지도자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p117), 또, 잘 되는 사업이나 안 되는 사업도 가려낼 수 있습니다(p118).  이렇게 호킨스는 의식 레벨  측정으로 우리 삶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며 장밋빛 세상를 그려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시골 장날 보는 만병통치약 선전으로 보이는 것은, 혹은 미아리 고개에 밀집한 점집으로 보이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일까요?

 

  이 ‘실제적인 목적’의 연구가 실패하면 좋겠습니다. 이 연구의 성공은 위에서 말하는 장밋빛 세계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암흑 세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연구가 성공하여, 나의 의식 지도(의식 수준, 문화 수준 등)가 학교 입학이나 취업, 직업 선택에 사용되면 나의 자유(내 삶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연구가 성공하면,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깨달음을 얻은 자가 국가통치권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게 되고, 국민들이 선거를 통하여 정부를 구성할 수 없습니다. 이 연구가 성공하면, 교육자나 과학자, 예술가들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 연구가 성공하면, 오래전 노예제도나 카스트제도처럼 개인의 의식 지도에 맞게 직업과 계층이 구분되어 배분될 것이며 마침내 신분제사회가 도래할 것입니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년 ~ 기원전 347년)은 자신의 저서 <국가(Politecia)> 제6권에서 진리(이데아)를 파악할 줄 아는 철인(哲人)을 통치자로 하는 이상적인 국가를 만듭니다. 이 국가의 통치자 철인은 기개의 혼(용기)을 가진 사람을 선별해 국가를 지키는 수호자 계급을 만들고, 정욕의 혼(절제)을 가진 사람을 선별 생산자를 만듭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哲人) 자리에 호킨스의 ‘깨달음을 얻은 자’, 즉 의식 레벨이 가장 높은 자를 올려 놓으면, 호킨스의 국가가 만들어 질 것입니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이 책이 지금으로부터 2천4백년전 플라톤을 만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 책 전반을 통해 나타나는 호킨스의 생각, 즉 실체를 현실세계와 영성으로 분리한 것은 플라톤의 사유와 같은 계열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페이크(fake)⑤

 

  플라톤 철학 이론의 핵심은 ‘이데아(idea) 이론’입니다. 이데아론은 서양의 사상과 신앙 체계에 큰 영향을 미쳐 정통파 기독교 교회와 나스틱파(Gnostics, 영지주의자)에 의해 채택되었습니다. 즉, 이데아들를 신의 생각들(God's thoughts: 하느님의 생각들)이라고 이해하였으며, 이를 변형한 생성된 신플라톤주의는 특히 기독교 신비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플라톤이 이성 우위의 전통을 가진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이를 두고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습니다. 호킨스의 이 책은 정확하게 플라톤의 ‘이데아(idea) 이론’에 변용됩니다. 화이트 헤드가 말을 빌린다면,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혁명>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합니다.

 

  플라톤은 <국가론>(Politeia)에서 목수가 만든 실제 탁자와, 목수의 마음속에 있는 탁자에 대한 생각이나 개념 사이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즉 목수는 자신이 만들 각각의 탁자를 가능하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에 맞도록 만들려고 하지만, 재료상의 한계 때문에 항상 불완전하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목수가 만든 어떤 탁자도 서로 완전히 동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목수는 창조주(demiourgos), 즉 신(神)을 의미하고, 탁자는 현재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 즉 우주를 의미합니다. 창조주(demiourgos)의 원리가 표상된 것이 ‘이데아’이며, 이 이데아의 모습이 부분적으로 분산하여 시현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창조주가 어떤 생각과 계획에 의해서 우주를 만들 때 그 복제품은 재료에 내재된 한계 때문에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완전한 개념을 포함하는 이데아의 영역과 이들 이데아가 불완전하게 복제되는 물질 세계가 존재하게 됩니다.

 

  이데아론에 따르면, 매일의 일상 세상의 사물들의 본래의 모습은 초월적이며 완전한 원형(原形, archetypes)이며, 물질 세상의 사물들은 그 원형들 즉 형상들(forms) 또는 이데아들(ideas)의 불완전한 복사체(複寫體)입니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형태의 원형 또는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Form of the Good: 선한 존재라는 지고한 이데아)인데, 이 선의 이데아는 모든 다른 원형들 즉 이데아들이 나오는 근원이 됩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데아의 세계는 비물질적이고, 감각에 의해 느낄 수 없는 존재의 영역으로서 실재의 세계이며 이성의 세계입니다. 반면에 물질 세계는 가시적 세계이며 감각 경험의 세계이며, 변화의 영역에 속합니다. 따라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모형이며, 실재는 이데아입니다. 이런 까닭에 플라톤의 철학은 수학적, 이론적, 형이상학적이며, 추상과 사고를 중시해서 결과적으로 경험적인 것보다는 관념적인 것을 강조하게 되고,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계’와 이와는 별도로 실재계의 원본에 해당하는 ‘이데아(idea, eidos)’로 세계를 나누기 때문에 이원론(二元論)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플라톤은 현실 세계의 원본인 이데아(idea)를 만들어 실체를 분리합니다. 이런 사유는 현실 세계는 이데아의 복사본이며 완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합니다. 현실세계는 이데아로 가는 여정에 불과하며, 죽음이란 이데아로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축복받아야 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현실과 이데아라는 이원론은 신학에 채용되어 신플라톤주의, 부철학과 스콜라 철학으로 이어지고, 데카르트와 칸트로 이어주지는 이성중심주의?관념론에 닿습니다. 이 이성중심주의?관념론은 결국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대철학과 예술은 이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호킨스는 지금 의실레벨을 실험해 그 결과를 수치화하고 지금 현실 세계 위에 ‘영성’, 혹은 ‘신성’의 세계를 증명하려고 합니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상정하여 현실 세계를 억누르고, 데카르트가 이성(정신)으로 감성(몸)을 지배하는 논리로 귀결되었듯이 호킨스의 이원론은 세계를 계열화하고 계급화할 것입니다.


  호킨슨의 실험에 의하면, 수치심보다 무기력, 무기력보다 분노, 분노보다 용기, 용기보다 이성, 이성보다 사랑, 사랑보다 기쁨, 기쁨보다 평화, 평화보다 깨달음의 의식 수준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일부 독자는 실험이 잘못되고,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받아들이지 못하겠지만) 결국 긍정성으로 향하고 있다면(전쟁이 아니라 평화, 미움이 아니라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는 것)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호킨스가 설정한 ‘수치심’, 무기력‘, ’분노‘, ’용기‘, ’이성‘, ’사랑‘, ’기쁨‘, ’평화‘, ’깨달음‘의 이런 명사는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수치심‘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미워하기도 합니다. ’사랑‘을 위하여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 나타난 전쟁과 폭력은 모두 ’사랑‘과 ’평화‘의 명분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고 미국 정부는 ’신의 이름으로 정의를 행했다‘고 말했습니다. 신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졌으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전쟁이 터졌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살상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평화의 이름으로는 살상할 수 있으며, 이것은 대부분 개인이 아니라 국가나 민족 등 집단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플라톤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이원론과 관념론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호킨스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적습니다.

 

 

   … 우리는 이제 집단적인 깨달음의 진화를 꾀할 수 있는 지점에 와 있다. 무지로 인한 대가를 이제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치르고만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단의식은 새로움의 차원으로 뛰어오를 수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더 이상 암흑의 노예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저 높은 곳에 신의 영광이 있을지어다  …

(의식혁명, 275p)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혁명>은 의식을 레벨화해 현실 세계를 ’영성‘(혹은 ’신성‘)과 영성이 아닌 것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그리고 낮은 의식 레벨은 ’무지‘로, ’암흑‘으로 표현하고 ’저 높은 곳에 신의 영광‘을 만드려고 합니다. 개인의 의식에 초점을 맞추는 듯 하다가 결국은 ’집단성‘으로 나아갑니다. 호킨스는 기원전에서부터 근대까지 철학이 그려왔던 오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기원은 플라톤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플라톤의 ’저주‘이자, ’망령‘이며, 데이비드 호킨스는 영리한 페이커(faker)입니다.

 

 

 

 

 

.............................
* 이 책에서 데이비드 호킨스는 많은 전문용어를 차용합니다. 자연과학에서는 ‘운동역학’, ‘패러다임’, ‘시험’, ‘끌개’, ‘지배의장’, ‘임계점’, ‘선형이론’, ‘비선형이론’, '이론물리학', '비선형 동역학', 사회과학에서는 ‘문화적 상관관계’, ‘민주주의’, ‘시장경제’, 철학에서는 데카르트를 비롯해 칼 융의 정신분석학 등의 용어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문용어는 표면적인 의미만을 가져와 호킨스가 변용한 것으로 본래 의미와는 다릅니다. 이 책을 읽으실 때 이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profile
    이우 2013.12.07 03:22

      호킨스가 비판을 받는 것은 수치화할 수 없는 것을 수치화했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호킨스가 의식 수준을 수치화하면서 <의식의 지도>에 <수치심>, <죄의식>, <무기력>, <슬픔>, <두려움>, <욕망>, <분노>, <자존심>, <용기>, <중용>, <자발성>, <포용>, <이성>, <사랑>, <기쁨>, <평화>, <깨달음>이라는 기표를 <수준>으로 사용하는데, 호킨스 자신이 이 기표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의 저서에서는 이 의미들이 모두 일그러지고 비틀려 있습니다. 기표의 의미를 모르면서 여기에 20에서 1,000까지 의식 수준을 배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이 기표의 대부분은 오랫동안 철학의 주제가 될 정도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은 것들입니다.

  • ?
    yyy 2016.05.12 15:36
    글쓴 분의 사고에도 분명 이원성이 존재합니다.
    낮으니까 나쁜 것, 좋으니까 좋은 것,
    아메리카의 우월성과 나머지의 야만적 기질의 분리,
    수치화 할 수 있는 것, 없는 것 등등에 해당합니다.
    (저 수치 또한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고로 과학이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조건으로 세상을 규정짓는 학문이기죠)
    그러나 이 책에서의 핵심은 빛과 어둠, 선과 악의
    이원론을 초월하는데 필요로 하는 도구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달이 어디있는지 알기 위해 질문했을 때,
    답을 아는 자가 "저기에 달이 있다" 라고 말하는 것,
    혹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달의 위치를 남에게 인식시키려 할 때,
    듣는 나는, 언어를 구사하는 자, 그의 시력을 믿을 수 없다, 혹은
    저 손가락이 잘못 짚었을 것이다 라는, 자신이 현재 의심의 에너지와
    해당 에너지를 사용할 때 나타나는 감정을 통찰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감정에 지배받은 자들이 하는 말은
    "나는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외칩니다. 호킨스 박사의 말처럼
    무지를 신께 내맡기는 자는 겸허하며 비판보다 따뜻한 조언과
    존재론적인 겸손함을 내뿜습니다. 제 눈에 글 쓴 분께서는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기 위한 도전의 길목에서 수없이 상승을
    도모하시는 수행자로 보입니다. 감정이 배제된 채 이원론적으로
    접근하셨다면 '이성'의 단계에 진입하신 것이 틀림없을 듯 합니다.
    함께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치는 인류로
    거듭납시다~!!
  • ?
    윤하 2017.04.07 08:12
    날카로운 비평입니다, 잘 봤습니다!!^^
    플로톤의 이데아론에 대해서 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교과서적으로 외우기만 했는데 위 글 속에서 깊은 의미에 대한 이해가 되네요.!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의식수준을 봤을 때,
    저는 든 생각이,
    어라 내가 전부다 살면서 느끼는 감정들인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낮은 의식 수준, 높은 의식수준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골고루 느끼는 감정들이라
    중요한 것은 각각의 감정 ,의식이 적절한 비율로 조화롭게 삶 속에서 섞이는 것이지,
    무슨 서열을 매겨서 배제하고 하는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만 좀 더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의 방식, 태도, 상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구술한 게 이 책의 장점인 듯 합니다.
  • profile
    이우 2017.04.16 19:05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은 개인의 의식에서 얻어지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인간을 개인화시키면서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에서 멀어지게 하는 '미국적 개인주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호킨스의 얄팍한 언술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 ?
    Kjb1 2018.10.30 13:11
    안녕하세요. 추천하시고 싶은 책있으시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 profile
    이우 2018.11.06 03:38
    답이 늦었습니다. 책들이 많고 의견이 많아 어떤 책을 추천해드려야 할지 모호합니다. 위 책 <의식혁명>과 관련해 말씀드린다면, 현실을 벗어나 이상하고 초월적인 <의식혁명>의 반대편에 있지만, 유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원전은 어려울 수 있지만, 책세상에서 나온 <에티카>(책세상문고 058 · 책세상)는, 원전의 일부와 해제를 포함하고 있어 이해하기가 용이한 편입니다. <의식혁명>처럼 비가시적이고 확인할 수 없는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책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사물의 질서를 원인으로 파악해 '윤리(에티카)'를 이끌어 내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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