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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브리핑] 폭력이란 무엇인가(2/1)

by 이우 posted Dec 29, 2011 Views 12749 Replies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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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 난장이 )

 

 



프롤로그(prologue)

 

   2008년에 베트남전쟁1)을 배경으로 한 영화 <님은 먼 곳에>(제작 : 타이거픽쳐스 감독 : 이준익 출연 : 수애, 정진영)가 개봉되었습니다. 흥행 실적은 좋지 않았지만 주인공 ‘순이’로 출연했던 수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순이는 남편 박상길을 찾기 위해 전쟁 중인 베트남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전쟁 중인 베트남에 여자가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마침내 길이 생깁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 중인 우리나라의 군인들을 위문하기 위해 위문공연단 파견이 계획되고, 어렵게 위문공연단의 일원이 된 순이는 베트남으로 갑니다. 이 위문공연단이 전쟁터로 가려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돈을 벌고, 덤으로 가수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순이는 위문공연을 하며 남편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쟁터…. 이성과 감성이 진흙탕처럼 비벼지고, 무엇이 폭력인지, 아닌지 설명하기 어려운 혼재 상황입니다. 순이는 살아남기 위해 옷까지 벗어야 했지요.

 

  슬로베니아 출신의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이와 같은 ‘폭력’을 설명하려고합니다. 지젝은, 먼저 폭력을 <주관적 폭력(subjective violence)>과 <객관적 폭력((objective violence)>으로 나눕니다. 폭력의 주체가 누군지 명백하게 보이는 폭력을 <주관적 폭력>이라고 하고 폭력의 주체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비가시적인 폭력을 <객관적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지젝은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만들어내는 원인을 <상징적 폭력(symbolic violence)>과 <구조적 폭력(systemic violence)>으로 나누고 길을 나섭니다.

 

   이 책에서 지젝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는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만 바라보았는데, 정말 폭력을 없애고 싶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상징적 폭력>와 <구조적 폭력>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정상인 것처럼 여겨져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젝은 이 책에서 현대사회에 정상적인 모습으로 숨어 있는 <객관적 폭력>을 찾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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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님은 먼 곳에>(제작 : 타이거픽쳐스 | 감독 : 준익|  출연 : 수애, 정진영 | 2008 )

 

 

 


주관적 폭력(subjective violence)>과 객관적 폭력(objective violence)

 

 

  위 영화의 베트남 전쟁에서 살펴보면 대한민국의 군인과 베트콩, 한국과 베트남이라는 폭력의 주체가 확실하기 때문에  <주관적 폭력>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폭력 사태를 막을 수 있을까요? 폭력의 주체인 우리나라 군인들과 베트콩(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군인)에게 ‘싸움을 그만두자. 계속 전쟁을 한다면 서로가 다칠 뿐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주체가 어쩌지 못하는, 폭력을 생성하는 구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순이가 속한 공연단이 베트콩에 잡혔을 때 ‘우리는 싸우러 온 군인이 아니라 돈을 벌로 온 밴드’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 베트콩 지휘관은 말합니다. ‘한국군도 돈 벌러 왔다’. 이 말에서 우리는 이 전쟁의 <구조적 폭력>에 ‘돈’이라는 구조, 즉 ‘자본주의적 구조’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방미할 때마다 케네디 대통령에게 우리에게 월남 파병의 기회를 달라고 말합니다. 최근에 공개된 국가기록물에 의하면, 월급수준은 미군과 동일하게 하고 전쟁물자는 미군에서 거의 다 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월남에 파병된 한국군에게는 10분의 1만 지급하고 나머지 돈은 우리나라의 경제기반시설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구조가 베트남 전쟁이라는 <주관적 폭력>을 낳는 <구조적 폭력>입니다. 물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대립되는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도 이 폭력의 원인인 <구조적인 폭력>입니다. 만약, 정부가 ‘애국애족’, 혹은 ‘국가에 충성하자’ 등 언어의 상징성을 이용하여 베트남전쟁을 상징화하였다면 이것은 <상징적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순이가 속한 ‘위문공연단’은 어떨까요? 지젝이 보기에는 그들도 폭력의 주체입니다.’ <주관적 폭력>이라는 차원에서 위문공연단은 폭력의 주체가 아니지만, <구조적 폭력>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위문공연단은 폭력의 주체일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트콩은 순이가 속한 위문공연단을 적으로 간주하고 처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붓딸 상습 성폭행’, ‘미성년자 집단성폭행', ’마포 여고생 성폭행 미군‘, ’경찰, 고3 모친 살해 사건 현장검증‘, ’전국 1등 강요당한 고3, 모친 살해하고 8개월 방치‘, ’경찰, 청와대 진입 시도 대학생 15명 연행‘, ’애틀랜타서 피살된 한인‘, ’성매매 여성이 밝힌 지옥에서 보낸 14년', ‘우회전 했을 뿐인데 과태료‘, ’경찰, 한미FTA 반대집회 엄정대처'…. 2)  이 많은 우리 사회의 폭력들도 그  주체에게 ‘하지 말라’는 경고를 주거나 ‘강력한 처벌’을 한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 생길 것이라고 지젝이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이런 폭력을 없애려고 한다면 그 안에 숨어 있는  <객관적 폭력>을 찾아내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01. 인도주의적 위기(humanitarian crises)’에 기대어 있는 폭력의 저층 구조

 

 

  지젝은 <객관적 폭력> 중의 하나인 <SOS 폭력>으로 제1장을 시작합니다. <SOS 폭력>은 ‘인도주의적 위기(humanitarian crises)’에 기대어 있는 폭력의 저층 구조입니다. 그 중 하나가 ‘가짜 급박감’입니다. 예를 들면 ‘이 나라에서는 6초마다 한 여성이 강간당합니다’, ‘혹은 ’당신이 이 문단을 읽을 동안 열 명의 아이가 굶주릴 것입니다‘라는 인도주의적인 급박감을 이용하여 폭력적인 구조를 강화하게 되면 <SOS 폭력>이 됩니다.

 

  “스타벅스는 바로 몇 년 전에 이런 종류의 거짓 급박감을 써먹은 적이 있다. 매장 입구에 스타벅스 체인 이윤의 거의 절반이 커피 원산지인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은 위한 의료시설로 간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여 놓아,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마다 한 어린이의 생명을 살리게 된다는 의미를 은영 중에 풍겼던 것입니다.” (30p~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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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젝은 인도주의적 위기(humanitarian crises)’에 기대어 있는 폭력의 저층 구조를 <<SOS 폭력>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착한 구매’, 혹은 ‘착한 소비’라고 말하는 대부분은 인도주의를 외치면서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마케팅 전략입니다. ‘착한 구매, 혹은 ’착한 소비‘를 아무리 한다고 해도 해당 기업의 이익만 증대시킬 뿐, 실제로는 사람들을 구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관적 폭력>의 원인이 되는 자본주의적인 구조를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지젝은 <SOS 폭력>을 <객관적 폭력>이라고 말힙니다.

 

  더 나아가, 지젝은 앤드류 카네기, 빌 게이츠, 조지 스로우 등도 <SOS폭력>의 주체라고 말합니다. 앤드류 카네기는 사병을 고용해 자신의 철강소에서 일하는 노동자 단결을 잔혹하게 억누르면서도 많은 재산을 교육, 예술, 인도주의적 대의를 위해 내놓았으며, 빌 게이츠 또한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다 동원하면서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자선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후진국을 도우면서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 빈곤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숨깁니다. 그래서, 지젝은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지젝은 <주관적 폭력>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 즉 <객관적 폭력>의 하나로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꼽습니다.

 

 


02. 상징적 폭력과 물신주의적 부인(fetishist disavowal)

 

 

  지젝은 제2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를 통해 우리에게 <상징적 폭력>에 대하여 알려줍니다. 지젝은 <상징적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상상계3) ·상징계4) ·실재계5)라는 라캉6) 이론을 빌려옵니다. 상징성이 폭력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이성의 작용이며, 이성의 작용은 차이를 배제하고 동일성을 만들면서 실재하는 세계와 다른 상징들로 채워집니다. 이 상징성은 실제와는 다른 현실을 ‘실재’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주관적 폭력을 낳는 저층의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상징적 폭력>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가지는 상징성 때문에 일어나는 폭력을 말합니다. 언어로 대상에 의미를 부과하면 실재(the real)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가지게 되고 이것은 폭력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구조적 폭력>은 ‘지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구조에서 생기는 폭력‘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객관적 폭력>은 정상적인 체계 속에 내재되어 있어 감지해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2003년 미국과 영국이 합동으로 이라크를 공격하였습니다. 공격의 이유는 ‘이라크가 과거 대량 살상 무기의 보유를 밝힌바 있고, 여전히 그 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 세계의 안보 환경을 위협하고 있다‘고 판단하고(상상계). ’세계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였습니다(상징계). 그러나 2004년 10월, 미국이 파견한 조사단이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보고를 제출하면서(실재계) 전쟁의 정당성이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이 폭력을 행할 수 있던 것은 ’세계 평화‘라는 언어의 상징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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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 전쟁 또는 제2차 걸프 전쟁 또는 이라크 자유 작전(Operation Iraq Freedom).

2003년 3월 20일 미군의 이라크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유엔안보리결의1441에 의해, 이라크에 대한 유엔회원국의 무력사용이 승인된다.
평화유지전쟁은 유엔안보리가 유엔헌장 제42조에 의해 무력사용을 승인하지만, 오늘날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합법적 침공은 대부분 이에 의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 거부감을 갖습니다. 베트남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살상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적’이라는 상징화나 ‘평화’, ‘사랑, ’정의‘ 등으로 상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누구나 거부하는 일이지만, ’정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는 죽일 수 있습니다. 실재 정의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언어의 상징성은 ’윤리적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인질을 죽이라고 명령한 사령관이 바로 그날 밤 자기 가족에게 사랑이 가득한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은 분명 모순입니다. 그러나 언어가 가지는 상징성은 윤리적 고려의 범위를 좁히게 합니다. ’가족‘에게는 윤리적인 고려를 하지만 ‘적’은 배제시킵니다. 그래서,  인질을 죽인 사령관’이 그날 밤 사랑으로 가득 찬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윤리가 <물신주의적 부인(fetishist disavowal)>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신주의적 부인(fetishist disavowal)>이란, ‘알고는 있지만 부인(否認)하면서 유예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풀어 말하면 ‘나는 안다. 하지만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다. 나는 알지만 따라오는 당연한 결과를 떠맡기 싫다. 그러므로 나는 알지 못 한다’며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윤리마저도 한계를 설정할 수밖에 없고, 어떤 종류의 고통은 묵인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가령 우리의 식량이 되기 위해 도살당하는 동물들은 어떤가? 공장식 농장에 가서 돼지들이 반쯤 눈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도살을 위해 살찌워지는 광경을 보고 난 뒤에도 계속 돼지고기를 먹(는다). ...(중략)... 우리는 알고는 있으나 묵인하는 편을 택한, 고문 받고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떤가? 하루에도 수천 번씩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스너프 영화7)를 통해 지켜보아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눈알을 뽑고 고환을 으스러뜨리는 등의 무자비한 고문 행위들. ...(중략)... 그 장면을 본 사람이 평소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중략)...이는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어떻게든 망각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 효력을 유예하는 행동을 통해 말이다. 이렇게 자신이 본 것을 망각하고자 하는 데서 물신주의적 부인이라는 제스처가 나온다.“(89p)

 

  지젝에 따르면, 먹기 위하여 생명을 해(害)할 수밖에 없지만 모든 생명체와의 연대를 강조하는 불교 윤리나, 기독교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을 철저히 배제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금언 또한 <물신주의적 부인을 위한 제스처>입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제로,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을 배제하는 반윤리를 묵인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할 수 있는 것(can)에 존재하는 이 <물신주의적 부인>입니다. 예를 들면, 돼지를 먹지 않는 것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impossible) 것으로 판단하고 <물신주의적 부인>을 하면서 “동물을 사랑하자”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신주의적 부인>이나 <물신주의적 부인을 위한 제스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존 시스템을 더 강화시키고, 오히려 기존의 폭력적인 구조를 못 보게 가립니다. 그래서 지젝은 알랭 바디우를 따라서 <폭력적 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국지적인 행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순이가 속한 위문공연단처럼 전쟁 중인 베트남으로 가 군인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지 말라는 것이고, 파병을 놓고 찬성이니, 반대니 하는 형식적 제스처에 불과한 논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능동성이다. 곧 ‘행동하라’는 요구, ‘참여하라’는 요구,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감추라는 요구다. 사람들은 늘 개입하면서, ‘뭔가를 한다’. 학자들은 학자대로 무의미한 논쟁에 참가한다. 진정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설사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보다는 참여와 대화를 좋아한다. 우리를 대화에 끌여들여서 우리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길한 수동성을 깨트려버리기 위해서다. 그런 면에서 유권자들의 기권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인 셈이다."(296~297p)

 

  여기에서 지젝이 말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은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폭력적 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국지적인 행동에 가담하거나 참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 주제 사마라구의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주제 사라마구 저, 원서 : Ensaio sobre a Lucidez)>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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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사마라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

 

 

 

  이 소설은 어느 이름 없는 민주주의 국가의 수도에서 벌어진 이상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선거일, 수도의 정치를 평가하는 선거에서 유권자 중 70퍼센 이상이 백지로 투표합니다. 시민의식 실종에 당황한 정부는 일주일 뒤에 한 번 더 선거를 치러 시민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더 나빠졌습니다. 83퍼센트가 백지 투표를 던집니다. 우파, 좌파, 그리고 중도 정당의 정치인들은 당황해 합니다. 정부는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음모가 있다고 확신하고 도시에 비밀경찰을 투입하고, 거짓말 탐지기로 시민들을 테스트해 보지만 사건은 점점 더 오리무중으로 빠져듭니다. 해결점을 찾지 못한 정부는 마침내 계엄령을 선포해 타 도시와의 교류를 막고 수도의 관문에 군대를 배치합니다. 이 또한 시민들의 서로 협동하면서 별 효과를 거두지 못 하자 더 강력한 조치로 경찰과 정부기관을 수도에서 철수하기로 합니다. 대통령과 총리는 전격적으로 수도이전을 하고 정부를 27개 팀으로 나누어 야심한 밤을 틈타 도시를  빠져나옵니다. 봉쇄된 도시였지만 사람들은 정부가 공격해 올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혼연일체가 되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갑니다.

 

  소설 속의 시민들은 국지적이고 폭력적인 시위를 하지 않으면서도 투표를 통하여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정부를 해산시켜 버립니다. 정부가 존재하고 그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찬성이든 반대든 정부를 용인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시민들은 백지로 투표함으로써 정부라는 그 자체를 부정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듯, 어떤 경우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은 ‘무엇인가를 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소설이 아니라 우리 현실 속에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12월 어느 날 전철 분당선 야탑역에는 이상한 풍경이 있었습니다. 유흥가가 밀집된 번화가에서 청소년협의회 소속의 사람들(이 속에는 중고등학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이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청소년 유해시설을 없애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맞은편 쪽에서는 ‘고등학생’이나, ‘이효리’ 등의 명찰을 단 일군의 웨이터들이 ‘나이트 클럽’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전단지에는,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100퍼센트 부킹!”이라는 문구가 선명합니다. 우리는 시위나 캠페인 등으로 ‘청소년 유해시설‘이라고 판단되는 유흥업소를 없애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청소년 유해시설‘이라고 판단되는 시설물들을 없애려고 한다면,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처럼 유해시설에 가지 않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청소년 유해시설‘이라고 판단되는 업소들이 충분한 매출을 올릴 수 없다고 판단하면, 스스로 물러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유해업소를 없애자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청소년을 위해 유해시설을 없애 달라’며 평화적 시위를 하는 것은, ‘아직 우리 사회는 건강하다‘, 혹은 ’시민들의 언론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는 상징으로만 효력을 나타낼 뿐입니다. 이처럼, 어쩌면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못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는 ‘배려하자’, ‘소통하자’, ‘친절하자’, 또 ‘문화다양성을 받아들이자’는 구호도 ‘텅 빈 제스처’입니다. 이런 구호는 배려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고, 또, 친절할 수 없는 사회구조를 가리고, 정책 실패의 책임을 국민들에게 떠넘깁니다. 지젝의 말처럼 ‘배려하자’, ‘소통하자’, ‘친절하자’, 또 ‘문화다양성을 받아들이자’는 ‘텅 빈 구호’를 외치지 않고 이런 행위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

 

 


03. 세계 없음(worldless)의 공간이 폭력을 만들다

 

 

  제3장 <피로 물든 조수가 범람하다>에서 지젝은 <세계 없음(worldless)의 공간>8)이 주관적 폭력을 만들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 공간이 점차적으로 <세계 없음(worldless)의 공간>으로 경험"되고, 이런 공간에서는 '의미 없는' 폭력 말고는 달리 취할 수 있는 저항의 수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 없음(worldless)의 공간>은 ’의미 없음‘의 공간으로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현재 서구 사회에서 문제되고 있고 우리 사회에서도 계속 증가하고 있는 이른바 ’묻지마 살인‘이나 ’묻지마 폭력‘(주관적 폭력)이 <세계 없음(worldless)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력 사례입니다. 대부분의 폭력이 다른 사람의 부(富)를 탈취하거나 특정한 대상을 향한 분노의 표출인데 비하여 이 폭력은 이유가 없습니다. 분명 억압받고 소외되어 있는데 ’나‘를 억압하고 소외하는 폭력의 주체가 불분명합니다.

 

  지젝은 <세계 없음(worldless)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력으로 2005년 가을, 프랑스 교외에서 일어난 ‘파리 폭동’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파리폭동에서 시위하는 군중들은 ‘긍정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전망이 전혀 없’었으며 그래서 ‘특별한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꼭 집어 표현할 수 없는 막연한 원한에 근거하여 자기들을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시위에 나선 사람들은 그저 자본주의적인 규칙을 따르다가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극도의 좌절감에 빠져 있지만 표현해 낼 수 없고,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저 충동을 행동으로 표출할 뿐입니다. 지젝은 자본주의 구조가 우리의 사회를 ’의미 없는 사회‘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구조는 전지구적이며 전 세계를 포괄하지만, 동시에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 없는’ 이데올로기적 상황을 유지시키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의 인식론적 지도를 그릴 기회가 박탈된 상태로 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는 역사상 최초로 의미를 와해시키는 사회경제질서다. (엄밀한 의미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적 세계관’이나 ‘자본주의 문명’ 따위는 없다. 세계화가 우리에게 주는 근본적인 교훈은 자본주의 모든 문명에 적용될 수 있다는 적응될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기독교든, 불교든, 서양이든, 동양이든 말이다.)  자본주의가 가진 전지구적 차원이라는 것은 ‘의미 없는 진실’의 수준에서만, 그러니까 전지구적 메커니즘이라는 ‘실재’로만 정식화 될 수 있다.”(123p)

 

 


  

 

다음 게시물 <[북브리핑] 폭력이란 무엇인가(2/2)>로 계속됩니다.

http://www.epicurus.kr/Others_Review/390321 )

 

 

 

 

 

 

주) ..............................

 

  1) 베트남 전쟁 :  1955년 11월 1일에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시작되어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공산군에 의해 함락됨으로서 종전된 이 베트남 전쟁(베트남어: Chi?n tranh Vi?t Nam/ 戰爭越南)에서 우리나라는 32만명의 군인을 파병해 5천명이 전사했으며,  31만 명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남베트남 민간인 사망자 수는 1백5십8만1천 명, 캄보디아 민간인 사망자 7십만 명, 라오스 민간인 사망자 수도 5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미군 사망자는 대략 6만여 명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군이 사용한 무기와 화학약품으로 인해 피해자 본인은 물론 자녀들에게까지 그 피해가 유전되고 있습니다.


  2) 2011년 12월 11일자 각 신문에 실렸던 기사 제목.

 

  3) 상상계: 라캉에 따르면 갓 태어난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자신의 손과 발 등 일부분을 보고, 마침내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며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고 주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가 실재하는 나가 아니라 허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아이는 결핍을 가집니다. 이 결핍은 바로 옆에 존재하고 있는 어머니를 통해 채워집니다. 아직 이 단계에서는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못해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이 단계의 어린이는 자아가 분열되어 있습니다. 상상계는, 실재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르지만 상상하는 세계입니다.

 

  4) 상징계 : 언어와 문화로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질서의 체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강압(폭력)이 존재합니다. 아이가 자라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실재하는 대상을 언어로 대치시킵니다. 즉, ‘우유’라는 물질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 언어로 ‘우유’라고 표현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린 아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인 것입니다. 외부 세계의 질서가 언어로 기표되고 아이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기에 무의식이 형성됩니다.

 

  5) 실재계 : 아이가 언어로 외부 세계와 소통할 수 있게 되면서 사회로 진입하는 단계입니다. 실재 존재하는 세계를 말합니다.


  6) Jacques Lacan(1901~1981) : 프랑스 정신 분석 학자. 정신 분석과 철학, 문학 이론 형성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파리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자격 취득 후 1932년부터 평생을 정신분석가로 활동했다. 프랑스 구조주의 사상이 밀어닥치던 1990년대 중반 라캉의 이론은 루이 알튀세르나 미셸 푸코와 같은 철학자들과 함께 구조주의의 중심 이론 가운데 하나로 거의 빠지지 않고 거명됐다..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 분야의 이론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후 명실상부한 최고의 이론가다. 라캉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프로이트 사후 분화를 거듭하던 정신분석학계에 강력한 이론적 성채를 제공했다. 그러나 라캉이 단순히 프로이트로 돌아가기만 한 것은 아니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극복하고 혁신하려고 했다. 그는 ‘리비도’(성에너지)와 같은 프로이트의 생리학적·생물학적 개념과 완전히 단절해 무의식을 구조주의적으로 해명했다. 특히 프로이트가 거리를 두었던 철학이나 언어학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정신분석학에 새로운 성격을 부여했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라캉의 대표 명제는 이런 사정을 보여준다. 그러다 곧바로 탈구조주의 물결이 구조주의 위를 덮쳤다. 라캉은 이 물결에 밀려, 특히 질 들뢰즈의 철학에 밀려 지식장의 주변부로 밀려났다가 라캉의 이름은 슬로베니아학파를 이끄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등장과 함께 부활했다. 지젝이 자기 사상의 이론적 기둥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는 것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 라캉을 두고 ‘욕망의 이론가’라고 하는데, 그가 평생토록 해명하려 한 것이 이 욕망의 성격과 구조와 작동이었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밑바닥에서 작용하는 욕망의 질서를 가리키며, 이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실행하는 존재가 주체다. 라캉은 주체가 대상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그 세계를 상상계·상징계·실재계로 나누었다. 1950년 이전 상상계를 설명하는 데 집중했던 라캉은 원숙기에 이르러 상징계를 분석하는 일을 중심 과제로 삼았고,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실재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7) 스너프 영화(snuff movies) : 폭력, 강간, 살인 등의 장면을 연기가 아닌 실제 상황 그대로 필름에 담는 것.

 

  8) 세계 없음(worldless)의 공간 : 우리가 예전에는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세계(world)'에 살고 있었는데, 유토피아적 전망 자체가 사라져버린 이곳은 이제 세계가 아니라 단순한 장소(place)에 불과하다는 바디우의 독특한 조어.(122p)









 

 

  • ?
    풀무 2011.12.30 10:03
    정리가 잘 된글 감사합니다.^^
  • profile
    이우 2011.12.30 13:57

    정리를 하고, 약간의 의견과 생각을 더했습니다. 제 의견과 생각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의견과 생각이 들어 있으니, 이 글이 모두 맞다고 판단하지 마시길.....^^

  • ?
    풀무 2011.12.30 10:50

    지젝에게... 문제 제기에는 공감하는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
    식물은 동물에게 산소를 공급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잡혀먹히지요.
    (자연생태계를 상징한 폭력입니까?.)
    우리는 삼차원이라는 세계에 던져진 순간 엄마 뱃속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숨을쉬고 태어나서 산소를 들이 마십니다.
    (번식이라는 상징적 폭력입니까?)

    저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 이야기를 잠시하죠.(많은 논의가 크게 보면 이속에 포함되기에)
    부처는 전체를 상- 공- 성 으로 편의상 분리하였습니다.
    상 이란 -눈에 보이는 세계 즉 삼차원의 세계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세계(아함경등)
    공 이란 -말그대로 비어있는 또는 구분 되어지지 않는 세계 (반야심경 즉 마하반야밀다심경)
    성 이란 -눈에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고 비어있기도 하고 비어 있지않기도 한 그무엇 ( 법구경,화엄경,열반경등)

    불교에도 소승불교 대승불교 로 나뉘어져 있더라구요
    궁금해서 그차이를 보니 간단히 머 이런거였습니다.

    그냥 자기가 혼자 부처의 길로 가면  되는 것이요 (소승불교)
    수 많은 중생들을 더불어 함께 부처의 길로 가야 되는 것이요(대승불교)

    이둘의 부처가 되는 본질은 다르지 않았지만
    삼차원 세계에서의 행위의 형태가 다를뿐이죠.

  • profile
    이우 2011.12.30 14:35

    풀무 님이 말씀하시는 "상징"과 지젝이 "상징폭력"이라고 이야기하는 "상징'이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  이렇게 요약해 볼게요.

     

    (1) 식물은 동물에게 산소를 공급합니다 --> 식물은 동물에게 산소를 공급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동물이 이용할 뿐이지요.

    (2) 그리고 그들에게 잡혀먹히지요 --> 동물이 잡아 먹습니다. 식물이라고 다 잡아 먹히지는 않습니다.

    (3) 자연생태계를 상징한 폭력입니까?  --> 상징이 아니고, 폭력이 아니고, 그냥 생태계입니다.

    (4) 우리는 ... 엄마 뱃속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숨을쉬고 태어나서 산소를 들이 마십니다. --> 이것도 생태계입니다.

    (5) 번식이라는 상징적 폭력입니까? --> 상징도 아니고, 폭력도 아닙니다. 그냥 생태계입니다.

    (6) 부처는 전체를 상- 공- 성 으로 편의상 분리하였습니다 ... 소승불교 대승불교 로 나뉘어져 있더라구요  --> 불교 철학에서는 궁극적으로 '분별하지 마라'고 가르칩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읽으시고, 모든 것을 '폭력'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될 것 같습니다.^^



     

  • ?
    풀무 2011.12.30 17:23

    지젝이 문제 제기한 자본주의나 자유주의 등의 폐단에 대하여서는 공감하는 부분이 많이 있음을 여러번 밝혔습니다.

     

    (6) 은  이우님이 알고계시는 분리하지 마라 가 맞습니다.

        그런 뜻에 이야기 입니다. ^^  오해없으시길 ^^

     

    지젝이 말했습니다.  어쩌면 가만히 있는것이 폭력을 줄이는 길일 수 있다고

    그리고 저항하거나 부정하거나 맞서거나 하는것이 더 큰 폭력을 불러올수 있다고

     

    그럼 과연 이 책은 저항하거나 맞서거나 부정하지 않는 책입니까?

      가만히 있는 책입니까?

     

    지젝 본인도 말합니다

    인간과 세상을 진정 위한다면 가만히 본질을 추구하거나,

    혹 삶에서 육체의 행위를 하려면,  정면으로 부정하고, 충돌하는 식이 아닌

    그렇지 않음을 그저 드러냄으로써 폭력을 상쇄하려는 노력의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어둠속에서 그저 상쇄의 빛을 드러내는것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관 무관한듯 평화운동을 하는것

    그대가 이건 아니라고 주장하는 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그것을 상쇄시킬 수 있는 내용이 풍부한 그런것 그런글 그런책

    그런 상쇄의 풍부함이 더욱 들어나는 지젝의 출판물을 개인적으로 진심을 담아 기대해봅니다.^.^

     

     

     

     

  • profile
    에피 2012.01.01 01:48

    한바탕 지식 난장이 벌어졌네요.  우후~~ 재미 있습니다^^

    풀무님이 지젝과 한 판 붙으셨네요.  캄보디아, 베트남 여행에서 돌아와 이제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풀무님의 질문에 이우님의 글로 답해 봅니다.

     

    '그럼 과연 이 책은 저항하거나 맞서거나 부정하지 않는 책입니까?  가만히 있는 책입니까?

     어쩌면 가만히 있는것이 폭력을 줄이는 길일 수 있다고,

     그리고 저항하거나 부정하거나 맞서거나 하는것이 더 큰 폭력을 불러올수 있다고'

     

    => 이 책에서 지젝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는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만 바라보았는데, 정말 폭력을 없애고 싶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정상인 것처럼 여겨져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젝은 이 책에서 현대사회에 정상적인 모습으로 숨어 있는 <객관적 폭력>을 찾아냅니다.

     

    여기에서 지젝이 말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은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폭력적 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국지적인 행동에 가담하거나 참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풀무님의 열공에 박수를 보냅니다.^^ 

    읽은 책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나누는 토론 과정이 즐겁습니다.

    독서토론은 개인적인 책읽기에서 빚어질 수 있는 피상적이고 독단적인 이해의 위험을 극복하게 해줍니다.  

     

    계속 지식난장판을 벌여보자구요^^

  • profile
    이우 2012.01.02 01:26

    저는,  이 책에서 <지젝이 말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은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폭력적 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국지적인 행동에 가담하거나 참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라고 받아들였는데 맞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말미에 보면,  지젝이  무조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상항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 ?
    풀무 2012.01.02 09:26

    ^.^

    그부분들은 너무도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좀더 세밀한 상대의 의사 파악을 부탁드립니다. (조심스럽게 ^.^)

     

    소승불교- 부처의 깨달음을 인지하고, 조용히 혼자 부처의 길로 가는것 ---이것이 가만히 있는것과 유사하구요

    대승불교 - 부처의 깨달음을 인지하고, 더불어 부처의 말씀을 대중에게 전하며 부처의 길로 가는것 ----이것이 행위와 유사하죠.

     

    현상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부처의 깨달음으로 가는것 궁극의 부처가 되는 것은 다르지 않죠.

    이런차원에서 소승불교 대승불교의 예를 앞전에 이야기 한것입니다.

     

    전 지젝에게 한 시대의 친구로써 ?   어떤 문제에 대하여  

    이왕 어떤 행위를 하려면 많은 문제들을  "상쇄" 할 수 있는 행위를 권해본것입니다.

     

    ^.^

     

     

     

     

  • profile
    이우 2012.01.03 16:16

    문장이 어려워서 한참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풀무 님의 이야기는 ...음.... 깨달음을 얻는데, 소승불교처럼 혼자 내면을 다스리는 방법과 대승불교처럼 대중에게 알려주며 함께 가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고 ... 음....  '많은 문제들을 상쇄(셈을 서로 비김. 맞비김. 서로 덜어냄)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행위', 또 '소승불교의 길과 대승불교의 길을 한꺼번에 아우르는 어떤 길'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시죠?

     

    음...먼저, 전제된 소승불교의 비유는 잘못된 것 같습니다. 지젝이 말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은 소승불교처럼 혼자 깨달음을 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을 하기 전에 기회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자칫하면 국지적인 행위(여기에서 '국지적'이라는 말이 포인트입니다^^)가 되어, 오히려 폭력적인 구조를 강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젝이 말하는 '가만이 있음'은 오히려 대승불교와 가까운 것 같네요.^^

     

    음... 제가 생각한 것은 ... 이미 지젝은 폭력적인 구조를 없애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길을 모색했고(풀무 님이 비유하신 소승불교의 길과 대승불교의 길까지^^)  충분한 답은 되지 않지만 그 모색의 과정에서 얻은 것을 정리한 것 같습니다.

     

    풀무 님이 말씀하시는대로, 지젝이 제안했던  (1)국지적인 행동에 참가하지 않고 가만이 있는 것, (2) 근본적인 원인을 없애는 적극적인 행동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그것을 도출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도출된 내용이 지젝이 경계하고 있는  국지적인 행동이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리어 폭력구조만 강화시킬 테니까요 ....

     

    정말, 간절히 바라건대, 풀무 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가능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 ?
    풀무 2012.01.04 09:45

     

    .(지젝은 폭력적인 구조를 없애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길을 모색했고

    충분한 답은 되지 않지만 그 모색의 과정에서 얻은 것을 정리한 것 같습니다.)

     

    위와 같은 이우님의 해석을 존중합니다.^.^

     

    전 어떤 답이 필요할때면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마음을 비우고 내면에게 물어봅니다.

    오늘의 내면의 소리를 적어봅니다.

     

               --  평화가 되어 있지 않는 개인이나 단체의 행위는 궁극의 평화는 아니다,

       

                    사랑이 되어 있지 않는 개인이나 단체의 행위는 궁극의 사랑은 아니다.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스스로가 평화가 되어라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면 사랑하려 하지말고 사랑이 되어라.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맞는지 틀리는지는 각자의 몫이겠죠.  이우님 감사합니다. ^.^

     

     

     

     

       

     

     

     

  • profile
    이우 2012.01.05 12:49

    도리어 감사드립니다. 말이 아닌 지면으로 하는 토론도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정리할 수 있고, 거기다가 언제든지..... 많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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