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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신파가 필요해_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

by 이우 posted Sep 29, 2011 Views 21026 Replies 0

뮤지컬_엄마를 부탁해.jpg

 

  신파극(新派劇)이 권장될 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식민치하의 신민들의 그 울분을 새로운 물결, 신파(新派)가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신파를 보면서, 분노와 격정·울분을 드러낼 수 없었던 식민지인들은 ‘울’면서 저항의 힘을 잃었다.
 
  원래 신파는 정치선전극이었다. 일본에서 자유민권운동(1870~80) 시기에 전래의 가부키(歌舞伎)연극을 구파(舊派)라 하고 정치선전극을 신파(新派)라 불렀다. 1911년 일본극장의 관리인으로 일하던 임성구가 조직한 한국 최초의 신파극단인 혁신단(革新團)이 일본신파극의 번안작인 <불효천벌(不孝天罰)을 가지고 창립공연을 가지면서 우리나라의 신파는 시작되었다. 서양 멜로드라마를 일본식으로 변형시킨 일본신파극에 한국적 특수성이 가미된 한국적인 멜로드라마, 이것이 신파극(新派劇)이었다. 우연한 사건의 전개, 과도한 정서의 분출, 선악의 이분법.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신파극의 특성은 대체로 패배주의를 구현하고 이를 자학적으로 카타르시스하는 작품구조를 가졌다.
 
  신파극은 사회적·역사적 맥락이 없는 통속적인 줄거리를 가졌지만 작품 속에는 당대의 대중심리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특정한 사회적·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수일와 심순애’로 알려진 <장한몽>, 1930년대에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결함을 지닌 주인공'이라는 구조로 정립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함을 지닌 주인공’ 앞에서 식민지 국민은 ‘울었다’. 우리나라 근대 공연예술의 터를 닦았던 최초의 극작가 김우진이 당시 사회비평을 통하여 ‘이광수류의 문학(신파)을 매장하라’고 외치며 식민지 지식인의 울혈(鬱血)을 쏟아낸 것은 신파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멜로로 위장하고 식민지인의 분노를 눈물로 대체시킨 신파가 시작된 것이 1911년. 그로부터 딱 100년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 신파가 다시 필요했던 모양이다. 2008년, 2009년 150만 이상의 독자들이 선택했다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작년 연극으로 공연되면서 매회 객석 점유율 90%를 기록했고, 올해 음악을 만나 악극(樂劇, Musical) <엄마를 부탁해>로 공연되었다.


 

‘엄마’라는 눈물
 
  관람석은 메어졌다. 마당놀이와 연극, 뮤지컬을 넘나드는 연기력파 배우 김성녀, 열정으로 부대를 장악하는 관록의 배우 김덕환, 섬세하게 작품을 해석한다는 이계창, 풍부한 감성과 탁월한 곡 해석을 자랑한다는 뮤지컬계의 독보적인 여가수 차지연, 팔색조로라 불리며 시원한 가창력을 가졌다는 김경선 등 30여명의 배우들이 무대에 올랐다. 다층의 조명과 깨끗한 음향, 잘 정돈된 소품만 봐도 이 뮤지컬의 공연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배우의 발성은 정확했으며 노래도 아름다웠다. 배우들의 동선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을 만큼 연출도 좋았다.
 
   그러나 이런 조합이 만들어 낸 것은 ‘눈물’ 뿐이었다. 작가 신경숙이 소설을 쓰고 ‘엄마가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깨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했지만, <해럴드 경제>가 ‘엄마의 모성에만 초점을 맞춘 기존 연극들과는 달리 엄마를 한 인간이자 여자로서 다시 만나게 해주었다’는 리뷰를 썼지만, 이 뮤지컬에서의 ‘엄마’는 정말 ‘엄마’였을 뿐이다. ‘엄마의 부재를 통해서 실재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은 엄마의 부재를 통해 ‘회한(悔恨)’을 느낀다. <동아일보>는 대놓고 ‘죄책감이 수조 위에 떨어진 한 방울 잉크처럼 객석을 물들인다’고 적었다.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는 효(孝)라는 가치 속에서 괴로워 하는 현대인들, 특히 불효(不孝)라는 ‘결함을 지닌’ 40대 이상의 관객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해 ‘자학적인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형식은 현대화되고 세련되었지만 일제 강점기의 신파와 다를 바 없었다. 100년 전 ‘결함을 가진 주인공’이라는 주어가 ‘결함을 가진 ’관객‘이라는 주어로 대치되고, ’식민지인의 울분‘이라는 목적어가 현대의 ’자본‘이라는 목적어로 대치된 것, 그것이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였다.
 
   정말, 울었다. 절대적인 사랑으로 희생하는 극 중의 ‘엄마, 즉 ‘결함을 지닌 주인공’ 앞에서 식민지 국민이 울었듯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울었다’. 관객들은 일제강점기 신파극처럼 ‘울면서 자학적으로 카타르시스’해내고 있었다. ‘엄마라는 사람의 한 인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라는 결함을 지닌 사람’을 말하고 있었으며, 관객들은 ‘엄마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반성하면서 자학’했다. 좋은 배우들과 훌륭한 조명, 음향, 소품 담당들. 그 많은 사람이 정성과 땀을 더해 무대에 올린 것이 관객들에게 ‘죄책감’을 들게 하고 울리는 것이라니……. 그것 밖에 없다니!
 
  뮤지컬을 보았던 어느 지인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신파가 필요해’. 일제강점기 우리에게 신파가 필요했듯 우리 시대에도 신파가 필요했던 것일까. 현대인에게는 ‘울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돌려 말하면 ‘내 영혼’을 ‘카타르시스’할 것이 절실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멀게 보자면, 신파라는 것이 원래 당대의 대중심리로 가득 채워져 있다 했으니 울분 가득 했던 일제강점기처럼 뭔가 알 수 없는 울분이 우리 시대에 쌓여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로 사이에서


   정작, 문제는 ‘눈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물만 나게 하는 뮤지컬’이라는 것에 있다. 이 정도의 공연물이라면 ‘눈물’ 뒤에 ‘무엇인가’가 있어야 했다. ‘뮤지컬’을 ‘확실한 줄거리에 음악·춤·대사가 있는 감상적이고 오락적 성격을 띠는 연극’이라고 정의하고 그저 감상과 오락만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감상적이고 오락적인 뮤지컬은 뮤지컬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쇠퇴했다.
 
  니체의 정의에 따른다면, ‘뮤지컬’은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인 ‘음악’과 아폴론적인 예술 ‘극’이 결합한 형태다. 물론 음악 중에는 제례악이나 군악처럼 아폴론적인 것이 있지만 뮤지컬에서 사용하는 음악이 대부분 감성에 기반을 둔 노래이니 디오니소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이 즉시적/감상적/질서 잡히지 않은 미(美)를 향하고 있다면, 아폴론적인 예술은 이성/절제와 균형의 미(美)를 추구한다.
 
  ‘극’이라는 것이 즉시적이며 감성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절제와 균형을 잡기 위해 처음부터 기획되기 때문에 극은 대표적인 아폴로 계열의 예술에 속한다. 조명과 음향, 배우들의 시선과 동작 하나 하나도 모두 정확하게 계산된 연출이 필요하다. 잘 계산되어야만 하는 공연물인 뮤지컬이 ‘눈물’만 나게 하고 ‘더 이상의 무엇인가’가 없다면 그 기획의도를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


 

눈물, 그 너머
 
  프랑스 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그의 저서 <구별짓기>를 통해 “개인 간 문화 취향의 차이가 형성되는 데는 소속 계층이 주요 변수로 작용하고, 이 문화 취향의 차이는 학력, 화폐 등과 더불어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데 주요한 권력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현대사회 문화 취향의 차이로 생성되는 권력이 ‘문화자본’이다. ‘문화자본’은 문화예술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능력, 문화의 장에서 행사할 수 있는 상징적 권위, 공공 제도가 부여하는 권력의 행사, 교육과 계급에 의해 축적된 문화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데, 현대 사회의 문화자본은 개인의 취향이 경제 자본을 만나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말이 의미하듯 생성된 문화 자본은 자신과 다른 미적 취향을 배제하는 성향을 갖게 된다. 현대의 대규모 공연 예술이 ‘문화적인 취향을 통해서’, ‘경제적인 이익’만을 위해 생산될 때 예술 영역은 수직계열화되고 독점화될 수밖에 없다. 앤디 워홀의 작품이 수백 억에 거래되면서 문화자본이 될 때 자본화되지 못한 무명의 화가는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이중섭의 작품을 모작해 팔 결심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 생산자가 대중의 보편적인 심리를 이용하여 자본을 축적할 의도를 가진다면, 좋은 공연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기획 과정에서 자본 축적의 의도가 없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대규모 자본이 투자된 현대의 공연물은 어쩔 수 없이 문화자본 형성에 기여할 수밖에 없다. 공연 예술인 뮤지컬이 ‘눈물’만 나게 하고 ‘더 이상의 무엇인가’가 없이 ‘자학적인 카타르시스’만을 연출했다면, 연출가는 “예술작품이 윤리나 정치 같은 인식과 의지의 문제와 관계없다고 생각하고 무시함으로써 윤리나 정치 판단에 개입”하게 된다는 대표적인 현대 미학을 몰랐거나, 혹은 무시한 것이 된다.


  (...)“미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이란 무엇인가?" 미와 예술의 정의는 사회적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문자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예술작품을 생산하고 수용할 때도 마찬가지로 인식과 의지에 기초한다. 즉 지식과 윤리, 정치 등이 예술작품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일정한 양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술작품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사실과 윤리나 정치 같은 인식과 의지의 문제와 관계없다고 생각하기가 더 쉽기 때문에 그것들을 무시함으로써 윤리나 정치 판단에 개입하게 된다. 아름답기 때문에 옳고 맞다고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은 죄의 흔적을 갖고 있다.'(...)


- 자네트 월프 (<<미학과 예술사회학>>(1988/1997 이론과실천) 중에서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를 보고 ‘울’었다. 정확하게는 울 뻔 했다. 그러나 그것밖에 없었다. 잘 연출된 공연이 주는 것이 ‘눈물’밖에 없을 때, 그 이상이 없을 때 ‘눈물’은 그저 어떤 의도(자본 축적)를 위해 이용하는 ‘도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100년 전의 신파극처럼 ‘자학적인 카타르시스’가 의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만들다보니 ‘눈물’밖에 없는 공연물이 된 것일까. 이 진퇴양란의 자리에 뮤지컬 <엄마가 필요해>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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