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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슬럼독 밀리어네어_이우

by 이우 posted Dec 1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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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빈곤을 구경거리로 만들다
-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 · 감독: 대니 보일 · 개봉: 2009년 -

 


 
이우


 

 

1. 영화는 예술인가

 

  우리는 영화를 예술이라 부르는 데 주저치 않지만 영화사 초반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처음으로 영화의 예술성을 주장한 사람은 이탈리아인 ‘리치오니 카뉴도(1879년-1923년)’. 그는 영화가 ‘본질적으로 빛의 펜으로 그려지고 영상으로 만들어진 시각(視覺)의 드라마’라며 예술의 범주 안에 넣었습니다. 그는 ‘예술의 기본은 건축과 음악’이며, 이를 ‘보충하는 것으로서 그림과 조각과 시와 무용’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 영화라며 영화를 ‘움직임의 조형 예술’로 분류하며 건축·음악·그림·조각·시·무용에 이어 ‘제7의 예술’이라 불렀습니다. 그런 이유로 영화이론가들 사이에서는 ‘리치오니 카뉴도’를 두고 ‘영화시(映畵詩)의 전도사(傳道師)(장에프스탕)’라고 부릅니다. 그에게 있어 영화는 예술이지요.

 

  이 무렵 독일에서도 사회학과 미학(美學)의 두 입장에서 영화의 예술론이 이야기되고 있었습니다. 그중 미학자 ‘콘라트 폰 랑게’가 도달한 결론은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는 인간의 정신적인 창작활동이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저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이것이 미학자 랑게가 영화에 관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영화는 대상(자연)을 기계적으로 재현하고 현실화할 뿐으로, 예술로서 필요한 의식적인 자기의식은 성립할 수 없다. 즉, 인간의 정신적인 창작활동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영화는 그 기술적인 진보에 따라 사실적인 재현력이 높아갈수록 예술성에서 멀어진다. 움직이는 사진은 정지하고 있는 보통 사진보다도 예술성이 적고, 그림이나 조각과 동일시할 수 없으니 그저 구경거리의 장르에 두어야 한다."

- 콘라트 폰 랑게의 <현재와 미래의 영화>(1920년) 중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대니 보일’이 만든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 이 영화의 수상 실적은 놀랍습니다. 아카데미 전초전이라 불리는 ‘골든글로브’에서 4개 부문 수상,  영국 ‘아카데미상 BAFTA’에서 7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2000년대 이후 아카데미 수상작 중 <반지의 제왕>(11개 부문 수상)에 이어 최다 수상을 기록했습니다. 2008년에서 2009년 사이 벌어진 각종 영화제에서 무려 88개의 상을 수상한 것이지요. 영화제 수상만 아니라 미국 비평가 협회는 ‘올해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했고, ‘L.A. TIMES’는 ‘올해 최고의 영화 1위’, 작가 스티븐 킹이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 영화 TOP 10’까지 올랐습니다. 정말 대단한 영화인가 봅니다. 그러나, 기대는 바로 무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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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구경거리 장르

 

  이 영화, 참 많은 장르가 따라다닙니다. ‘로맨스·멜로, 드라마, 범죄’. 이 영화의 장르가 뭘까요? 로맨스, 혹은 멜로? 어떤 면에서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자말’은 형인 ‘살림’과 함께 도시의 쓰레기더미 속에서 ‘슬럼독(Slumdog)’으로 삽니다. 쓰레기더미 위에 찬 비 내리던 어느 날, ‘자말’은 비 속에 떨고 있던 어린 소녀 ‘라티카’를 만나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날 이후,  ‘자말’의 삶은 오직 ‘라티카’를 향한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옆에 있는 그 누군가가 죽든 말든 ‘자말’은 오직 ‘라티카’로 향한 삶을 시작합니다. 그를 백만장자 밀리어네어(millionaire)로 만든 퀴즈 쇼에 나간 것도 상금이 탐났던 것이 아니라 ‘라티카’를 찾기 위한 것이었지요. 이렇게만 본다면 이 영화의 장르가 로맨스·멜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로맨스, 혹은 멜로라기에는 애틋한 사랑이 없고, 감동이 없습니다. 카메라도 이 두 사람의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퀴즈쇼를 풀어내기 위한 소품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로맨스·멜로로 보기엔 허전합니다.

 

  드라마? 이것도 맞긴 합니다. 빈민굴에서 태어난 소년 ‘자말’이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백만장자가 되는 것으로 본다면 ‘인생 역전’ 드라마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마을을 침입한 이슬람교도에 의해 엄마가 죽고 형인 ‘살림’과 함께 고아가 된 ‘자말’은 역경과 고난 속에 삽니다. 그리고 마침내 빈민가의 백만장자(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가 되었으니 드라마틱하긴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상합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자말’이 너무 불구(不具)입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대부분 적극적이고 능동적입니다. 그러나 저항할 줄 모르고 반항할 줄도 모르는 수동적인 캐릭터가 ‘자말’입니다. 엄마가 죽어도, 형이 죽어도 신경 쓰지 않고 분노하지 않습니다. 눈물 흘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시간이 가는대로, 던져지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갑니다. 퀴즈쇼 우승도 그가 이뤄낸 것이 아니라 우연이 만들어낸 것이었지요. 이게 드라마라면 정말 재미없습니다. 로또에 당첨된 억세게 운 좋은 남자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 것쯤 되는 거죠. 음…, 아무래도 드라마로도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범죄·누아르(noir)·블랙 비스트(Black Beast)? 어떻게 보면 이것도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누아르(noir)는 범죄와 폭력을 다루면서, 도덕적 모호함이나 성적 동기에 초점을 맞추는 일군의 영화를 가리킵니다. ‘살림’과 ‘자말’ 형제, 그리고 ‘라티카’는 포주 ‘마만’에게 속아 앵벌이가 됩니다. ‘마만’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아이들의 눈을 빼낼 정도로 잔혹한 인물입니다. ‘마만’이 ‘자말’의 눈을 빼려하자 형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벗어나는 ‘자말’…. 형 ‘살림’은 이런 것이 인생이라면 차라리 나빠지기로 하고 조직폭력배가 됩니다. 매일 밤마다 ‘신이여, 용서 하소서’를 부르짖으며 폭력과 살인을 하는 ‘살림’. 범죄와 폭력을 다루고 있으니 범죄·누아르(noir)·블랙 비스트(Black Beast)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이 영국인 감독은 범죄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주인공 ‘자말’은 형이 범죄자가 되건 말건 신경 쓰지 않으며, 사건에 휘말리지도 않습니다. 감독은 범죄 사건을 치밀하게 묘사하지 않으며 사건 경위를 파고들지도 않고, 해결할 의지도 없습니다. 영화 속에서 작은 장치로 범죄나 폭력 장면이 있다고 해서 영화 장르를 범죄·누아르(noir)·블랙 비스트(Black Beast)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3. 빈곤을 구경거리로 만들다

 

  그렇다면, 대체 이 영화의 장르는 뭘까요? 우왕좌왕, 갈팡지팡, 횡설수설하고 있는 이 영화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영화 정보에서 ‘로맨스·멜로, 드라마, 범죄’라고 나열해 놓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모두인 것일까요? 자말이 유명 배우의 사인을 얻기 위해 똥통으로 뛰어들 때 관객들이 소리를 지르고, 포주 ‘마만’이 숟가락을 달궈 자말의 친구 눈을 뺄 때 관객이 무서워 소리를 질렀으니 호러(Horror) 혹은 공포영화로도 봐야 하나요? 설령, 이 영화를 두고 ‘로맨스·멜로, 드라마, 누아르(noir), 호러(Horror)’ 이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도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모두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남자이기도 되고 여자이기도 하다는 것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미학자 ‘콘라트 폰 랑게’가 말한 것처럼 ‘구경거리 장르’일 뿐입니다. 범죄가 일어나건 말건, 사람들이 슬럼독이 되어 쓰레기더미를 개(dog)처럼 배회하건 말건, 사랑을 하건 말건 이 영화는 퀴즈쇼에서 시작해 퀴즈쇼로 끝납니다. 아이들의 눈을 빼건 말건, 권총을 뽑아들고 사람을 죽이건 말건 감독은 온갖 영화적 장치를 배열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자말’이 퀴즈쇼에서 우승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포커싱(Focusing)합니다. 감독은 그에게 있어 범죄 현장, 살인, 폭력 등 자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처참한 삶의 현장, 심지어 사랑마저도 퀴즈쇼를 진행하는 수단, 그저 오락을 즐기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락성을 갖춘 영화’. 흠, 감독은 분명이 이 영화를 만들면서 폭력과 살인, 앵벌이, 매춘, 빈곤을 소재로 삼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 처참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락거리, 구경거리’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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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승리(Jai ho)

 

  심지어 감독은 우여곡절 끝에 ‘자말’이 퀴즈쇼에 우승해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가 되는 순간, 경쾌하고 즐거운 한 바탕 춤판을 벌입니다. 인도 전통 악기와 테크노 리듬이 조합된 경쾌한 메인 영화주제곡 <Jai Ho>가 흘러나오고 영화 속 인물들은 흥겹게 춤을 춥니다. 아카데미 주제곡상을 수상한 곡이기도 한 이 주제곡 <Jai Ho>는 ‘승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범죄가 일어나건 말건, 사람들이 슬럼독이 되어 쓰레기더미를 개처럼 배회하건 말건, 사람이 죽건 말건 소용없다는 듯이 ‘승리(Jai ho)’를 외치며 축제를 벌입니다. 만약, 이 영화가 인도인 감독이 만들어 인도에서 개봉된 것이라면 이 ‘야호(Jai ho)’를 현대철학이 말하는 삶에의 긍정이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 인도를 식민지화했던 영국인 감독이 만들고 영국에서 개봉한 영화입니다. 인도를 침탈했던 영국이 자신이 황폐화시킨 인도인의 빈곤한 삶을 오락 영화로 만들고, 우연하게 퀴즈쇼 상금을획득한 것을 두고 ‘승리(Jai ho)’라고 외치는 것을 삶에의 긍정이라 봐줄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승리한 것일까요? 영화의 스토리로 본다면 쓰레기더미에서 극빈의 생활을 하던 ‘자말’이 퀴즈쇼에서 우승해 백만장자가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라고요? 그럼 ‘자말’이 우여곡절 끝에 ‘라티카’를 만나 사랑을 이룬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것도 아닌 것 같다고요? 도대체 이 영국인 감독은 무엇을 두고 승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 영국이 인도에 자본주의의 씨를 뿌렸는데 드디어 인도인들이 슬럼독(Slumdog)이 되어 밀리어네어(Millionaire)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났으니 영국인의 입장에서는 승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5. 슬럼독(Slumdog)

 

   대체 영화 전반을 통해 비추어졌던 인도인의 처참한 삶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 영국인 감독은 처참한 생활을 하는 인도 사람들을 ‘슬럼독’이라 표현합니다. 슬럼독(Slumdog)이라는 말처럼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개(dog)’입니다. ‘슬럼독(Slumdog)’은 ‘빈민굴, 빈민가’를 의미하는 영어 'slum'과 동물 ‘개’를 의미하는 영어 'dog'의 합성어이니까요.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빈민가 사람들을 속어로 ‘슬럼독(Slumdog)’이라 말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긴 한데 ‘사람’이 아니라 ‘개(dog)’로 바라본다는 겁니다. 누가 사람을 개로 바라볼까요? 빈민가(Slum)에서 살고 있지 않은 ‘돈 있는 사람’들이지요. 사람이냐, 혹은 개냐를 규정짓는 이 구분법의 잣대는 ‘돈’입니다. ‘자말’도, ‘살림’도, ‘자말’이 사랑하는 ‘에티카’도 모두 ‘슬럼독(Slumdog)’입니다. 이 영국인 감독에게는 가난한 인도인도 ‘슬럼독(Slumdog)’이었던 모양입니다.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속어는 해당 나라 구성원에게 사용해도 기분 나쁜 말입니다. 영국인 감독이 인도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서 인도인에게 ‘슬럼독(Slumdog)’이라 이름 붙이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것이지요. ‘일본인’을 의미하는 영어는 ‘재패니즈(Japanese)’, 속어로는 ‘잽스(Japs)’입니다. 만약 일본인을 주제로 해 영화를 만들면서 타이틀을 ‘잽스(Japs)’로 달면 어떨까요? 한때 우리가 일본에게 강점당할 때 일본인에게 자주 듣던 말이 있습니다. “조센징, 바카야로!” ‘조센징(일본어: ちょうせんじん)’은 원래 ‘조선인’을 뜻하는 일본어이지만 ‘바보자식, 멍청한 놈’를 뜻하는 ‘바카야로ばかやろう)’와 조합되어 우리를 비하하는 단어로 굳어졌습니다. 만약,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서 ‘조센징’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어떨까요? 자신의 나라 구성원도 아닌 남의 나라 사람들을 두고 ‘슬럼독(Slumdog)’이라는 속어로 표현한다? 이 영국 감독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영국인 감독이 만들고, 영국에서 개봉된, 영국 영화입니다. 그런데 영화 내용은 영국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 인도의 영화처럼 보입니다. 영국은 약 180여년간 인도를 무력 침탈했습니다. 인도를 가난하게 만든 것이 바로 영국인이었고, 대영제국이었습니다. 이 나라, 남의 나라를 침탈해 놓고 뻔뻔하고 파렴치하게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이 파렴치함이 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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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파렴치함에 대하여

 

  인도의 역사는 호모 에렉투스가 생활하던 50만년전까지 올라갑니다. 7만 5천년 전 타밀 나두 지방에는 호모 사피엔스가 살았고, 기원전 약 3300년 무렵부터 기원전 1300년 무렵까지는 고대 문명인 ‘인더스 문명’을 이룬 것이 인도인이었습니다. 근세에 들어 크고 작은 분쟁들이 있었지만 인도는 전통적으로 면직물을 중심으로 산업을 발전시키며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앵벌이가 없었고, 조직폭력도 없었고, 쓰레기더미도 없었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바로 이전 시대가 무굴제국시대. 무굴이 세웠던 ‘타지마할’이 의미하듯 그 시기 인도는 황금기를 누립니다. 그러나 이런 인도는 영국의 침략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어 버립니다.

 

  영국은 1661년 봄베이(뭄바이), 1690년 캘커타를 차지하고, 1765년에 벵골의 징세권을 획득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인도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산업혁명으로 원자재와 생산 제품의 시장이 필요했던 영국은 철저하게 인도를 침탈합니다. 대량생산으로 시장이 필요했던 영국은 인도를 자신의 시장으로 만듭니다. 그 결과로 영국의 기계 제조 직물이 인도로 유입되고 인도의 전통적인 면직물 산업이 황폐화됩니다. 또, 영국은 인도를 원료공급원으로 만듭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차, 아편, 인디고 등의 재배를 인도에서 확대한 것이지요. 1947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이미 인도는 영국의 침탈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인도가 이 영화 속에서처럼 처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게 된 겁니다.

 

  이런 구조를 자신들이 만들어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인도인을 자국의 빈민들에게나 쓰는 속어 ‘슬럼독(Slumdog)’이라 칭하고,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오락물로 만드는 이 영화를 어떻게 봐주어야 할까요? 자신들이 인도의 경제를 망쳐 놓고 그 아래에서 허덕이며 처참한 삶의 현장을 퀴즈쇼라는 오락 영화로 만들어 다시 돈벌이를 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대체 뭘까요? 정말 이 ‘대니 보일’이라는 이 영국인, 참 파렴치하고 적반하장, 후안무치입니다.

 


  7. 그 나물에 그 밥

 

  자신들의 나라를 점령해 경체 침탈을 자행한 영국인들이 그 결과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자신더러 ‘슬럼 독’이라고 하고, 심지어 이 빈곤을 오락영화·상업영화의 소재로 삼아 돈벌이를 하는 이 영화를 인도인이 본다면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분명, 분노할 겁니다. 이런 영화가 2008년에서 2009년 사이 벌어진 각종 영화제에서 무려 88개의 상을 수상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요? 이 영화를 제3세계 국가에서 용인할 수는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영화에 상을 준 국가들을 살펴보면 영국, 미국, 독일, 일본이었습니다. 모두 제국주의 시대의 강대국들이지요. 영국은 식민지 정책을 통해 부를 축적한 국가고, 미국은 결과물이었습니다. 독일과 일본 또한 식민지를 개척하던 나라들이었지요. 우리 또한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일제에게 강점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일본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있어 한국이 근대화될 수 있었다’. 헐! 영화를 옹호하고 용인하는 것에도 구조가 있습니다. 영국-미국-독일-일본으로 이어지는 이 축과 이 영화는 같은 궤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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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제국주의

 

  아시겠지만, 영국-미국-독일-일본으로 이어지는 이 축은 식민정책으로 부를 축적했던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입니다. 특정국가가 다른 나라, 지역, 식민지 등을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정책, 또는 그러한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을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라고 합니다. 1870년경부터 제국주의라는 말은 근대적인 의미와 내용을 가진 말로 사용되면서 자본주의국가간의 팽창주의적 경쟁이 격화되기 시작합니다. 인도도 희생양이었으며 우리나라도 그 희생양이었습니다.

 

  1880년에서 1890년대 영국은 제국주의를 영국의 번영과 진보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여겼습니다. 영국은 자유무역정책을 보호정책으로 전환하고 광대한 식민지를 긴밀히 조직하려고 했습니다. 1870년대 수에즈운하주(株) 매수, 인도의 지배 강화, 1884년 제국연방동맹의 성립에 의거한 자치령과 본국과의 결합, 1903년 식민지장관 A.N.체임벌린의 보호관세정책, 보어전쟁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영국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해외진출을 불가결의 요건으로 삼던 후진 자본주의국가에서 이런 경향을 받아들이면서 세계의 분할, 국제대립의 격화, 군비확장을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 국가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세계대전입니다.

 

  제국들에 의한 식민지 정책은 주로 유럽중심으로 이루어 집니다. 유럽의 초기 식민지 확대 정책은 희귀한 자원과 노예의 확보, 남아메리카의 은, 아프리카의 금, 상아와 노예, 인도의 후추 등이 대표적인 목표물이었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대량생산을 위해 보다 많은 자원과 노동력이 필요했고 동시에 생산된 제품을 판매할 판매처가 필요했습니다. 당시의 대표적인 식민무역은 영국의 경우 인도의 값싼 노동력과 면화로 면직물을 만들고 이것을 다시 인도에서 아편과 바꾼 후 중국에서 은과 교환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것은 아편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식민지는 에너지 및 자원의 확보와 자본 투자처로서 더욱 유용해졌습니다. 이를 위해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에 척식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영국의 동인도회사나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그것입니다. 후발주자로 미국과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대열에 등장했지요. 제국주의의 전성기였던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시기에 이르러 세계는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로 양분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에티오피아와 타이 등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들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제국주의시대 서구 열강들이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있었습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에서의 폭력과 착취에 대해 후진국을 식민지화시켜 발전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태생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인 데이비드 리빙스턴 등의 서구 기독교인들은 전도이니 선교이니 하는 명분을 내세워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식민지에서의 제국주의적 통치 즉,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고 확장시키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그 실례로, 중남미에서의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은 인디오들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제하는 민족말살정책에 가담했으며, 개신교 선교사들도 식민지 대중들이 겪는 경제적, 정치적인 고통은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탈정치적이고 내세지향적인 설교를 늘어놓음으로써 대중의 아편 역할을 했습니다.

 

  영국-미국-독일-일본으로 이어지는 이 제국주의 축과 그들이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했던 ‘발전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논리, 그리고 '가난은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탈정치적이고 내세지향적인 편향된 종교 의식을 합치면 바로 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가 됩니다. 이 영화가 그렇지요. 영국이 인도를 침략했지만 그건 인도를 발전시켜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럼에도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니 자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빈곤과 자신은 아무련 관련도 없다는 태도를 취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아무런 노력 없이 자말은 백만장자가 됩니다.  자말이 백만장자가 되는 순간, 승리의 노래도 부를 수 있지요.

 

 주인공 ‘자말’은 먹고 살기 위하여 불법적인 관광 가이드가 됩니다. 배운 것도 없이 가이드로 나선 ‘자말’은 주워들은 정보에 자신의 이야기를 곁들여 관광객을 안내합니다. 관광객이 ‘인도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다’고 요구하자 자말은 관광객을 시장으로 안내하고 그 사이 인도의 아이들은 관광객이 몰고 온 자동차를 분해해 부속을 팔아버립니다. 이를 안 관광객이 자말을 폭행합니다. 피투성이가 된 자말에게 관광객이 돈을 내밀며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를 먹고 살게 해준 우리에게 너희들은 도둑질을 하지만, 우리는 너희들에게 돈을 주겠다’. 자말이 관광 가이드로 일하고, 인도의 아이들이 관광객의 자동차 부품을 파는 구조를 만든 원인은 제국시대 인도를 침탈했던 영국이었습니다. 제국시대가 끝나자 이제 강대국들은 관광을 위해 인도에 들어옵니다. 그러고는 말하지요. ‘우리가 너희를 먹게 살게 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마치 이것이 사랑의 표현이라도 되는 냥 ‘너희를 먹고 살게 해준 우리에게 너희들은 도둑질을 하지만, 우리는 너희들에게 돈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헐!

 


  9. 확대 재생산

 

  영국-미국-독일-일본으로 이어지는 이 축과 이 영화가 같은 궤적인 것은 또 있습니다. 영국-미국-독일-일본으로 이어지는 이 축이 자본주의 축이라는 것은 이미 아실 겁니다. 이 영화에는 확대·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구조가 들어 있습니다.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산업화를 진행하다 보니 강이 오염되고, 강이 오염되고 나니 식수가 부족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맞습니다. 강은 단장해서 관광지를 만들어 돈을 벌면 되고, 식수는 생수 공장을 만들어 팔면 됩니다. 이 구조에서 살아가려면 맞벌이를 해야 합니다. 노인과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를 돌보는 회사를 차려 돈을 벌면 되고, 실버 사업을 일으키면 됩니다. 자본 구조가 만들어 놓은 문제를 자본 시스템으로 해결하면서 다시 경제를 확대하고 자본 구조를 견고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본의 구조는 확대되고 재생산되는 겁니다.

 

  이 영화의 골격도 그렇습니다. 인도는 영국에게 무력으로 침탈당하며 황폐화되었지요. 그러면서 ‘돈’을 추구하며 살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빈곤 속에서 인도는 폭력, 앵벌이, 살인, 구걸, 도둑질, 매춘 같은 자본 구조의 문제가 일어납니다. 영국은 인도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폭력, 앵벌이, 살인, 구걸, 도둑질, 매춘 등 인도의 문제를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카메라에 담습니다. 관객들의 입맛에 맞게 재미있고 즐거운 영화를 만들어 다시 돈을 버는 겁니다.

 

  폭력과 살인, 앵벌이, 매춘, 가난과 빈곤을 오락거리, 혹은 구경거리로 만드는 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는 오락성을 이용해 자신들이 인도를 침탈했던 잘못을 교묘하게 숨기면서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자본의 구조를 공고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가 하는 것처럼 자본구조를 옹호하고 그 구조를 공고하게 만들며 자본주의 사회에 필요한 대중을 양산합니다. 슬럼독(Slumdog)인 ‘자말’이 백만장자가 되는 순간, 그의 사랑도 이루어지고 ‘폭력과 살인, 앵벌이, 매춘, 가난과 빈곤’을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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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영화는 감동적이고 재미있고 즐거우면 된다?

 

  이런 영화를 보고 ‘재미있지 않느냐, 그럼 되었지. 영화에 무엇을 바라느냐’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를 용인하기도 합니다. 물론, 영화평론가들도 영화란 무엇을 담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재미있고 즐거우면 된다는 주장을 하고, 카메라 워킹이나 영상 기법을 두고 영화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필름하이커(Filmhiker)라 자처하며 영화평을 쓰고 있는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누가 영화에 철학 이론을 넣으라고 하던가요? (중략) 놀라운 풍경에 놀랄 수 있는 감수성이 부족한 것이야 말로 철학적 지식이나 미학적 지식의 결여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실험영화, 예술영화가 가치 있기 위해서는 상업영화 역시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영화는 감동 있고 재미있고 즐거우면 끝입니다.”

 

  정말 영화는 재미있고 즐거우면 끝일까요? 이 영화 재미있고 즐겁기는 합니다. 120분 동안 영화를 보았지만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습니다. 아마 그래서 이 영화가 용인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 더 무엇을 바라느냐고 말하는 것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동안 영화가 상업성에 포획됩니다. 영화가 자본의 구조 속에 포획되면 영화는 관객 동원이 잘 되어 돈만 잘 벌어들이면 된다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이 상업성에 포획되면 자신도 모르게 범죄가 일어나건 말건, 사람들이 슬럼독이 되어 쓰레기더미를 개처럼 배회하건 말건, 사람이 죽건 말건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우 마이 갓!

 


  11. 불편함에 대하여

 

  안타깝게도 이게 현실일지 모릅니다. 영화는 이제 산업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거대자본이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전략적으로 영화 흥행 요소만을 찾아내려는 이론까지 등장하고 영화 예술이란 말은 사치가 되어버렸습니다. 열심히 일하며 오랜만에 얻은 휴일. 우리는 티켓을 끊고 팝콘과 콜라를 손에 들고 기분 좋게 영화관에 들어갑니다. 영화가 시작됩니다. 영화는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Pieta)>(2012)입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관객들은 불편합니다. 그 잔혹함에 눈을 가리기도 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이 영화 괜히 봤다'는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이런 영화가 어떻게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영화 흥행의 성공 요건이라는 3S(Story·Style·Spectacle)도 엉망이고 도대체 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김기덕 감독은 관객에 대한 배려가 없어. 즐거운 휴일을 망쳐 버렸네.’ ‘관객에 대한 배려가 없어’라는 이 말은 ‘영화는 관객을 즐겁고 편하게 해주어야지’라는 것이겠지요.. 김기덕 감독요? 그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사회에 영향을 주는 영화를 만느는 것이니까. 그래서 김기덕의 영화는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영화계의 타자’입니다.

 

  이 영국인 영화 감독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자금을 투여했는데 흥행에 성공해야지요. 그러자면 관객의 심리를 역이용해야 합니다. 영국에서 개봉하는 영화이니 영국인이 싫어하면 안됩니다. 인도에서 행한 자신들의 잘못을 부각시키면 안되겠지요. 아이들의 눈을 빼건 말건, 권총을 뽑아들고 사람을 죽이건 말건 감독은 온갖 영화적 장치를 배열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자말’이 퀴즈쇼에서 우승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집중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또 ‘자말’과 ‘라티카’의 사랑이라는 달콤한 이야기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배치를 통해 관객은 빈곤, 폭력, 앵벌이, 살인, 구걸, 도둑질, 매춘 같은 불편한 것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빈곤, 폭력, 앵벌이, 살인, 구걸, 도둑질, 매춘 같은 인도의 모습을 영화적 장치로 보여주는 것 또한 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인도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지적 허영심을 채울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영화가 상업성에 포획되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영화가 아니라, 사회에 의해 영향을 받는 영화, 즉 대중의 입맛에 맞추는 영화를 만들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영화가 다시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포스터_피에타.jpg

 


 

  12. 대중을 생산하다

 

  영화는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과 함께 매스 미디어(mass-media)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매체입니다. 이때 미디어(media)란 어떤 작용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매개물을 의미하는 것이고, 매스(mass)란 말은 하나의 덩어리로 지각되는 물체나 인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매스(mass)를  '대중(大衆)'이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우리말 대중이라는 말은 피플(people)과 매스(mass)의 2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플(people)로서의 대중이 적극적·합리적인 집합체라면, 매스(mass)로서의 대중은 피플(people)에 비하여 수동적·비합리적인 집합체입니다.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 1841~1931, 프랑스의 심리학자·사상가)’은 ‘대중은 비합리성·망동성(妄動性)·경신성(輕信性)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면서 심지어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때의 대중을 매스(mass)라고 합니다. 즉, 매스(mass)로서의 대중은 합리적이지 않고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자말’처럼요.

 

  그런데 영화,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매체(media)를 두고 피플 미디어(people-media)라고 하지 않고 매스 미디어(mass-media)라고 하는 것은 이 매체들이 적극적이고 합리적인 피플(People)이 대상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비합리적인 매스(mass)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이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했을 때 어른들이 텔레비전을 두고 '바보 상자'라고 부른 것은 그냥 우스개 소리가 아닙니다.  텔레비전 앞에서  사람들이 수동적·비합리적인 '바보' 가 되는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었지요.    

 

  특히 매스미디어는 언어, 회화, 사진, 음악 등 인간의 감각과 지각에 영향을 주는 모든 표현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효과적으로 매스에게 어떤 사실이나 사상 등 의미 있는 내용을 전달하고 영향을 미칩니다.  매스미디어가 특정 사상이나 정신, 질서 체계를  노출하게 되면  매스는 미디어가 전달하는 특정 사상이나 정신, 질서 체계를  주입받게 됩니다.  만약, 영화가 흥행과 상업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어 관객들이 원하는 재미와 즐거움, 감동이라는 오락성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되면 관객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을 피할 수밖에 없고  현재 질서체계, 즉 동일성을 지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면, 수동적·비합리적인 매스는 미디어의 영향을 받고 현 사회 질서, 동일성에 복종하는 대중이 됩니다. 매스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종하는 대중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대사회학이나 현대철학에서는 대중(大衆)은 일시적·부분적·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계획적·지속적(持續的)으로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매스미디어의 이런 속성은 곧잘 정치적으로 이용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한때 우리 사회에 회자되었던 ‘3S 정책’이었습니다. ‘3S 정책’이란 대중을 우매하기 만들기 위하여 스크린(Screen, 영화), 섹스(Sex) 그리고 스포츠(Sports)를 교묘하고도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정책을 의미합니다. 1980년대 우리나라 정부는 스크린, 섹스 그리고 스포츠를 교묘하고도 체계적으로 운영하여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대중을 우민화시켰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런 정책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등장한 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던 일제강점기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파극’도 여기에 속합니다. 감동 있고, 재미있고, 거기에다가 인기도 좋았던 ‘신파’는 식민지인의 울분을 눈물로 대치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비합리적이고 망동적인 대중을 매스미디어를 통해 복종적인 대중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스미디어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영화를 재미있고 즐거워야 하는 오락 기능으로만 대하는 순간 중대한 실수를 하게 됩니다. 상업성에 포획된 매스미디어는 재미있고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지고, 이렇게 만들어진 매스미디어는 다시 매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순환구조가 생겨납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처럼 세계의 빈곤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고. 이 영화에 담긴  영국-미국-독일-일본으로 이어지는 이 축의 궤적을 용인하게  됩니다. 이를 경계해서 미학자 ‘자네트 월프’는 <미학과 예술사회학>이라는 책에서 ‘예술 작품을 생산하고 수용할 때 인식과 의지에 기초’하지만 ‘윤리나 정치 같은 인식과 의지의 문제와 관계없다고 생각하기가 더 쉽기 때문에 윤리나 정치 판단에 자신도 모르게 개입하게 된다’며 '아름다운 것은 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미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이란 무엇인가. 미와 예술의 정의는 사회적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문자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예술작품을 생산하고 수용할 때도 마찬가지로 인식과 의지에 기초한다. 즉 지식과 윤리, 정치 등이 예술작품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일정한 양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술작품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사실과 윤리나 정치 같은 인식과 의지의 문제와 관계없다고 생각하기가 더 쉽기 때문에 그것들을 무시함으로써 윤리나 정치 판단에 개입하게 된다. 아름답기 때문에 옳고 맞다고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은 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 자네트 월프 (<<미학과 예술사회학>>(이론과실천. 1988년·1997년) 중에서

 

 

  13. 무비 저널리즘

 

  다행스럽게 지금 우리 사회는 ‘무비 저널리즘’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무비 저널리즘이란 영화 <도가니>, <부러진 화살>, <두 개의 문>, <MB의 추억>, <야만의 언론>, <남영동1985>, <26년>, <피에타> 등과 같이 재미와 즐거움, 감동만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는 영화를 말하는 신조어입니다. 물론 무비 저널리즘의 성격을 띠고 있는 영화들이 이전에도 있습니다. 1960년, 1970년대에는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심을 다큐멘터리로 표현하기도 했고 1995년대에 제작된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뤄 당시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중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최근 <도가니>, <부러진 화살>,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 <두 개의 문>이 흥행되면서 ‘무비 저널리즘’이란 신조어를 탄생시켰습니다. 무비 저널리즘은 일반 저널리즘과는 달리  매스미디어가 가지는 영향이 역방향입니다. 일반적인 저널리즘은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처럼 관객의 입맛에 맞추려고 하지만 ‘무비 저널리즘’은 관객의 입맛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편하게 해서 오히려 관객에게 영향을 주려고 합니다.

 

  무비 저널리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에 대해 영화 <두 개의 문>을 제작한 김일란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의 공감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관객들 의식 속에 부조리하고 모순된 현실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 스스로가 방관과 개입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가 앞에 놓인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했으면 한다”며 제작 의도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무비저널리즘이란 말이 생긴 것은 영화의 사회적 영향력이 이전보다 몰라보게 커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관객이 그저 재미와 즐거움, 그리고 감동을 얻기 위해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scen05.jpg

 
 

  14. 영화는 허위적 사치인가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오락으로서의 성격을 빼버리면 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는 무엇일까요? 폭력과 살인, 앵벌이, 매춘, 가난과 빈곤을 오락물, 혹은 구경거리로 만드는 못 쓸 영화이며,  인도에 대한 영국의 침탈을 합리화시키는 파렴치한 영화이며, 자본의 구조 중 부정적인 것만을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영화입니다. 저는, 모든 영화가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그저 재미와 감동, 즐거움만을 주는 구경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재미와 감동, 즐거움을 긍정합니다. 그러나 재미와 감동, 즐거움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가난과 빈곤을 다시 오락물로 확대·생산하는 이 영화 앞에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 영화에 수많은 상을 주었던 이 세계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조리와 곤궁(困窮)을 오락물로 삼는 이 세계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의문, 즉 ‘예술은 허위적 사치인가’라는 의문을 풀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은, 결국 예술은 허위적 사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도형수들이 노를 젓고 선창에서 기진맥진하는 노예선의 제일 뒤 갑판에 앉아 노래할 수 있다. 또 우리는 희생자들이 사자의 이빨 밑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이 곡예장 위에서 끊임없이 주고 받는 세속적인 대화를 기록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했으므로 여러 가지가 변했고 특히 도형수와 순난자(殉難者)들의 수가 지구에서 그렇게 증가한 것이다. 이 많은 비참 앞에서 예술이 계속하여 하나의 사치가 되고자 한다면 오늘도 역시 하나의 허위를 승낙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술은 대체 무엇에 관하여 말하겠는가? 만일 예술이 대다수 사람이 요구하는 것에 순응한다면 예술은 무제한의 오락이 될 것이다. 만일 예술이 맹목적으로 대다수 사람을 거부하고 자기의 꿈 속에 고립되기를 결심한다면 아무 것도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오락인들의, 혹은 형태에 대한 문법가들의 생산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살아 있는 현실과는 단절된 예술에 귀착되고 마는 것이다."


- 까뮈의 <예술가와 그의 시대> 중에서

 
 

 

 

 

 

 

 

 


  • profile
    에피 2012.12.22 18:22
    크아~ 영화리뷰의 대 서사시! 한 편의 논문을 읽은 듯한 충족감(?) 영화로 사학 , 철학을 꿰었네요^.~ 개봉할 때 본 영화인데, 무엇이 나를 불편하게 했는지 이제 명확하게 보입니다. mass가 아닌 people로 살아야겠지요. 개별성, 단독성을 유지하면서요... 전체성의 늪에서 어찌 살아갈까~ 설움, 외로움과 손잡고....
  • profile
    이우 2012.12.22 19:45

      재미 없고, 즐겁지 않고, 게다가 감동까지 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영화를 긍정해보려고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긍정되질 않고 분노만 가득 차니  그 참....

  • ?
    이용태 2018.04.19 16:52

    요즘 김기덕이 도마위에 올랐는데 여기에 인용하셨었네요^^

    다시 봐도 역~시 이우쌤 글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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